70년대 가요계를 휩쓸었던 가수 이수미의 '여고시대'

1970년대 초반 ‘여고시절’이라는 노래 하나로 일약 국민여가수로 급부상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이수미는 그 당시 가장 잘 나가는 톱스타였다. 데뷔는 트로트로 했지만 스탠다드 팝과 포크음악까지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 다양한 쟝르의 음악을 발표하였다.
1952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수미 (본명 이화자)는 1969년 목포 KBS <노래자랑>을 통해 데뷔했다. 집안에서 축음기로 항상 국악을 즐겨 듣던 부친의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녀는 목포여고 3학년에 재학중이었던 당시 언니들의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뒤집어 쓴 채 무대에 올랐다. 5주 연속 우승으로 뛰어난 노래실력을 보여주었던 그녀는 목포 MBC <연말 노래자랑 결산 방송>을 보러 온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의 눈에 띄어 데뷔하게 되었다. 청순한 미모에 부드럽고 호소력있는 허스키 보이스를 지니고 있던 그녀는 1969년 본명인 이화자로 ‘당신은 갔어도’를 발표하였다. 1971년 예명을 이수미로 바꾼 뒤 발매한 데뷔 앨범에 수록된 '때늦은 후회지만'을 발표하고 트로트 가수로 시작했으나 이 곡은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72년 2월 발표한 앨범 <여고시절>에서 스탠다드팝 계열의 곡 ‘여고시절’이 대 히트하면서 그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곡은 작곡가였던 김영광이 이 노래에 가장 잘 맞는 목소리를 찾기 위해 오아시스레코드의 모든 여가수에게 불러보게 했으며 결국 막내였던 이수미와 가장 잘 맞아 녹음을 하게 되었다고한다. 호소력 짙은 감성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단순하게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만으로 이루어진 곡이지만 졸업 시즌과 맞물리면서 여기저기 매일같이 흘러나왔던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었고 그해 연말, 신인상도 거치지 않고 바로 MBC 10대 가수와 TBC 7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기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여고시절’의 인기는 영화 제작으로 이어졌는데 그해 10월 강대선 감독이 청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박지훈, 김미영 주연의 동명 영화가 개봉됐고, 3만명의 관객이 몰리면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수미는 뛰어난 노래 솜씨뿐만 아니라 청순가련 하면서도 순수한 미모와 감성적인 부드러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많은 젊은 남성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김추자, 방주연, 정미조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불운이 연속되면서 그녀의 가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973년 발매된 컴필레이션인 「오아시스 팝 훼스티벌 vol.2」에서 4월과 5월 의 리더였던 백순진이 만든 곡인 ‘사랑의 의지’가 크게 히트했으며 ‘두고온 고향’ 역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연속적인 히트곡이 나오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73년 여름 발생한 ‘이수미 피습사건'은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으로 이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이미지 타격을 받으며 높았던 인기는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피습사건이었던 이 사건이 각 언론 지면엔 ‘가수 이수미, 대천해수욕장 면도칼 자해사건’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으로 연예활동에 염증을 느낀 이수미가 처지를 비관, 면도칼로 자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자해를 한 것’으로 종결된 이 사건은 ‘자해가 아닌 모 방송국의 유명 DJ가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으로 바뀌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문제가 커지자 가수협회에서는 그녀를 제명하는 제재를 내리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생사를 넘나들 만큼 큰 상처를 입었으며, 게다가 여자로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지경에 빠지게 되며 피해자였지만 자해범으로 몰리게 되었고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고 말었다.
‘피습사건’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 자신은 경찰에게 ‘짧은 머리의 20대남성이 범인이다’라고 진술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 당시 대천해수욕장에 놀러왔던 수백명의 죄없는 남성들이 끌려와서,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수미는 자신의 자백 때문에, 동료가수들과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의심을 받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등 그 여파가 너무나도 크게 번져나가자, 사건을 그냥 덮어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방공연이 끝나고 이틀의 휴가를 얻어 동료 가수들과 대천해수욕장에서 쉬고 있었어요. 저녁 무렵 혼자 해변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순식간에 제 배를 찔렀어요. 당시 경황도 없고, 또 저를 해칠 만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내가 했노라’ 하고 거짓 자백을 했죠. 동료 가수들이 밤샘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문제가 너무 커질까 봐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진술을 번복하고 ”죽고 싶은 심정에서 내가 한 짓이다“라며 자해했다고 자백을 함으로써, 사건이 더욱 크게 번지는 사태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수미가 사건 발생 뒤 30년이 지난 후에 그녀가 자해를 했던 것이 아닌 피습으로 인한 사건임에 대한 진실을 밝혔는데 여린 성격의 그녀로서는 사건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것이 두려워서 한 얘기였다고 한다.
1974년 6월 1년여의 제재가 풀리고 난 뒤 발표한 이수미 골든2집의 타이틀곡 ‘내 곁에 있어주’가 크게 히트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 곡은 ‘여고시절’을 만든 김영광의 곡으로 이 곡으로 MBC 10대 가수상, TBC 최고 여자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다음해인 1975년 4월 발매한 ‘오로지’와 ‘고향은 멀어도’를 발표하며 꾸준한 인기속에 활동을 이어갔으나1975년 지방공연 당시 술취한 팬의 난동 및 1976년에도 지방공연 당시 숙소에 치한이 급습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여전히 불운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1976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을 금지 당했다. 이것 역시 대마초를 핀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려진 이수미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고 한다.
“제 생일이었죠. 집으로 놀러온 동료 연예인들이 대마초를 꺼내 피우는 거예요. 다들 그러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대마초를 피운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려진 결정이었어요. 너무 억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죠”.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백화점 점원과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며 재기를 꿈꾸었지만 5공화국시절 사회정화 추진위원회의 징계(1982)로 인해 다시 한번 눈물을 삼키게 된다.
이후 연예계로 어렵게 다시 복귀했지만 끊이지않는 각종 루머들로 인해 심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1985년 김영광의 곡 ‘좋은일이 없을까요’로 다시 한번 재기를 시도했으나 대중들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았다.
1973년 피습사건으로 인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그녀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되었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된 아이를 입양해서 홀로 키웠다고 한다. 1997년 후배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이후 그녀의 노래가 2001년 SBS 시트콤 <여고시절>에 나오면서, 이수미의 ‘여고시절’이 젊은 세대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수미에 대해서 재조명되면서 그동안 잊혀졌던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수미는 데뷔 30주년기념음반을 발매했다. 이후 2003년 20년만에 신곡 4곡을 담은 앨범 <또 다른 세상에서>를 발매했으며 타이틀곡 ‘ 또 다른 세상에서 ’를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갔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찿지는 못하였다.
신데렐라처럼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 큰 인기를 누렸지만 피습사건으로 인하여 내리막을 걷게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이수미는 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지만, 운명은 예기치않은 안좋은 사건들로 인해, 여러번 인생에 큰 고비들을 맞으며 힘들게 견디미 살아왔다.
그러나 지난 2021년 5월 마지막 앨범인 <별이 빛나는 이 밤에>를 발표한 뒤 4개월 만 9월 2일,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향년 69세로 영면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