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라이벌인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함께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선 원조 국민가수이자 자타공인 전설적인 디바이다. 한국형 팝보컬의 선구자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숱한 '최초'의 타이틀을 기록한 가수이다. 뛰어난 무대매너와 트렌디한 스타일링, 팝을 기반한 보이스 색깔과 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으로 대한민국 역대 가장 격조 높은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패티김(본명 김혜자)은 1938년 경기도 경성부 인사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광산업을 했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중앙여중 2학년 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가사를 외우며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노래만 불러 야단도 많이 맞았다. 중앙여고 시절 그녀는 교내 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기 가수였다.
우연히 국악 특별활동반 수업을 구경하던 그녀가 시조를 따라 읊는 모습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담당 교사는 패티김에게 창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6개월 동안 국립국악원에서 창을 배운 그녀는 판소리 <심청전>을 반 년 만에 완창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한 1956년 덕성여대 주최 전국 중고교 국악 콩쿠르에 참가해 단가 <운단풍경>을 불러 창 부문 1위에 입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이었던 큰오빠의 반대로 국악을 그만뒀다. 1958년 봄, 여고 졸업 직후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지만 시력이 나빠 원고를 더듬거리며 잘못 읽다가 낙방했다. 낙심해 지내던 그 무렵, 우연히 서울 명동 거리에서 큰오빠의 친구이자 기타 연주자인 곽준용을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패티김은 미8군 프로덕션 화양의 김영순(베니 김)에게 오디션을 받고 통과했다. 첫 무대로 오산의 미 공군 기지의 한 클럽에 출연했을 때 그녀의 첫 예명은 ‘패티김’이 아닌 ‘린다김’이었다. 1959년 미8군 무대 정기 오디션에서 스페셜 A등급 가수로 성장한 린다김은 첫 봉급으로 3만 환을 받았다. 이때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지라”는 쇼 단장 베니 김의 권유로 예명을 패티김으로 변경하며 가수로서 기반을 잡아갔다.
가수 활동을 반대했던 큰오빠 때문에 활동을 중단했던 패티김은 1년 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168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서구적인 몸매와 얼굴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일단 외모에서부터 차별화됐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놀라운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탁월한 가창력이었다. 여전히 트로트 중심의 가요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기에 그녀는 미국 팝 스타일의 가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 했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로 성장했다.
1960년 5월 일본 AFKN 간부의 주선으로 일본 NET-TV의 공식 초청을 받아,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에서 정식 초청을 받은 가수로 기록됐다. 당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이어서 일본 진출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녀는 당시 일본의 정상급 악단 스타더스트와 3개월간 일본 전국 투어를 하며 팝송은 물론, 한복 차림으로 장고를 메고 장고춤을 추며 '아리랑 목동', '도라지', '아리랑' 등을 노래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그녀는 7개월간 장기 리사이틀 쇼를 개최하며 현지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1961년 5월 귀국해 서울 반도극장에서 성황리에 귀국 리사이틀을 열었다. 국내 최초의 개인 리사이틀로 기록된 이 무대를 통해 패티김은 비로소 인기 가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도유망했던 신인 작곡가 박춘석은 그녀의 귀국 리사이틀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용산 미8군 무대로 찾아와 패티김의 데뷔 음반 제작을 주선했다.
1961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는 패티김의 데뷔 음반으로 10인치 LP <패티김 힛트집>을 발매했다. 총 8곡을 수록한 이 앨범은 작곡가 박춘석이 프로듀싱을 주도했고, 그가 지휘한 ‘박춘석과 그의 악단’이 연주했다. 이 음반으로 공식 데뷔한 신인 가수였지만 패티김은 기본적으로 시원하고 고급스런 음색에 기본기가 탄탄해 안정적인 가창력을 보여준다. 빅밴드 재즈풍의 연주는 물 흐르듯이 세련된 사운드로 패티김의 노래를 윤기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수록곡 전 곡은 외국 팝송이었다. 이 음반의 특징은 거의 모든 노래를 한글로 번안하지 않고 영어 가사로 패티김이 노래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문화를 세계 최고의 선진 문화로 여겼던 사대주의적인 당시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번안곡은 단 2곡인데, 타이틀곡 '썸머타임(Summertime)'은 시작 부분만 한국어로 번안했다. 지금은 '사랑의 맹세'로 널리 알려진 'Till'은 수록곡 중 유일하게 가사 전문을 한글로 번안했다. 이 앨범에서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히트곡은 한글로 번안 작업을 시도한 2곡과 '파드레(Padre)'였다.
늘씬한 키에 서구적인 몸매와 외모, 시원한 목소리를 지녔던 패티김의 이 데뷔 앨범은, 이후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와 엄격한 자기 관리를 통해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팝의 대모로 군림한 슈퍼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음반 발표 후 김치캐츠·이해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초청자는 당시 일본의 인기 테너 색소폰 연주가이자 재즈 캄보 ‘쿨 캐츠’의 리더로 성장한 길옥윤이었다.
1963년 한국가수 2번째 미국시장 진출하여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과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였다. 물론 당시의 해외 시장진출은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1965년 가을 미국의 유명 TV쇼인 <자니 카슨 쇼>와 NBC TV <투나잇 쇼>에 출연하며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1966년 1월, 서울에서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전화 한 통이 날아왔다. 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1966년 2월. 패티김의 귀국과 때를 맞춰 일본 삿포로의 클럽이 부도를 맞아 파산한 길옥윤이 무일푼으로 귀국했다.
패티김은 1966년 1집 격인 <패티김 힛트쏭 하이라이트>에서 처음으로 대중가요 6곡을 취입했다. 그 음반에 수록한 패티김의 최초 취입 가요로는 박춘석의 '굿바이 월츠', '서울의 태양' 그리고 길옥윤의 '내 사랑아' 등의 곡들이 수록되었다.
패티김은 데뷔 음반부터 줄곧 팝송만을 취입했다. 그녀가 대중가요를 처음 취입한 것은 1963년 미국에 진출했다가 돌아온 1966년부터였다. 데뷔 앨범에서 팝송만을 고집했던 그녀는 작곡가 박춘석의 설득으로 번안곡 '사랑의 맹세(Till)', '파드레(Padre)'을 취입했다. 하지만 순수 한글 가사로 구성된 대중가요를 부르지는 않았다. 박춘석은 패티김에게 국내 활동을 위해서는 가요 취입이 필요하다며 계속해서 설득을 해서 6곡을 수록하게되었다.
1966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된 패티김 앨범 2집 <The Best of Patti Kim Album Vol.2>는 이전 오아시스레코드 발매 분까지 포함하면 통산 네 번째 음반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초우'는 1966년 개봉한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인데, 정진우 감독이 연출하고 당대의 청춘스타 신성일과 문희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이 멜로 영화 <초우>는 당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주제가의 작곡가인 박춘석은 귀국한 패티김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다. 때마침 귀국하여 화제를 모았던 패티김의 적극적인 활동은 영화의 흥행에 일조했다. 어찌 보면 그녀의 첫 번째 가요 히트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선 굵은 그녀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박춘석은 그녀가 미 8군 무대에 서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번안곡으로 패티김이 불렀던 'Till'과 'Padre'의 가사를 직접 지어주기도 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주제가도 큰 히트를 기록했다. 패티김은 스탠더드 팝 스타일로 노래한 '초우'가 크게 히트한 덕에 1967년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한 1990년대까지 각종 노래자랑대회에서 가창력을 뽐내려는 여성 참가자들이 어김없이 '초우'를 선곡하면서, 패티김은 ‘한국 팝의 여왕’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풍부한 성량으로 들려준 '초우'는 너무나 애절하게 가슴을 치는 절창이었다.
앨범의 최대 히트곡은 박춘석이 작곡한 '초우'이고, 패티김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까지 성사시킨 길옥윤의 희대의 작업송 '4월이 가면'도 이 앨범에 처음 수록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초우'를 애창하는 기성세대 중에는 패티김의 수많은 히트곡 중 이 노래를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다.

1966년 국내 활동을 재개하면서 피어난 패티김과 길옥윤의 연애는 드라마틱했다. 길옥윤이 패티김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첫 노래는 '4월이 가면'이다. 이후 표절 시비에 휘말리긴 했지만, 이 곡은 패티김의 마음을 사로잡은 희대의 ‘작업송’이었다.
이 노래는 당시 히트를 해서 문희와 성훈이라는 신인 배우를 기용해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성훈은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자 펄 시스터즈의 친 오빠이다. 당시 임영신 총장이 중앙의 아들을 영화계로 보내니 잘 보살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할 정도였다.
당시 패티김은 4월이 지나면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녀의 출국 날이 다가오자 길옥윤은 패티김의 출국을 막기 위한 곡 작업에 몰두했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던 4월 어느 날 새벽,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앞의 낡고 초라한 여관에 투숙했던 길옥윤은 뉴코리아호텔에 머물던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옥윤이 전화로 들려준 사랑의 연가는 달콤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엔 진심 어린 사랑이 있었고 패티김은 감동했다. 심야의 전화 데이트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연애 감정에 사로잡혔다. 4월이 지나가고 5월이 왔지만 마침 미국 비자 문제가 꼬인 패티김은 출국을 포기했다.
패티김, 길옥윤은 전방 위문 공연을 다녀오던 길에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공연 후에 군 책임자와 차를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환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원래 타기로 했던 첫 버스를 놓치고 두 번째 버스를 탔다. 비가 많이 내리던 그날, 두 사람이 탈 예정이었던 첫 번째 버스가 전복해 사망자까지 나오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천운이었다. 극적으로 사고를 모면한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1966년 6월 약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12월 10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당시 김종필 공화당의장의 주례로 3천여 명의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렇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6년 패티김과 길옥윤의 결혼식장에서 배포한 이 <패티김 길옥윤 결혼기념> 음반은 스타 가수 커플이 국내 최초로 선보인 결혼 기념 싱글 음반이다. 이 음반이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시판용이 아닌, 결혼식장 하객용으로 한정 제작한 비매품 음반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레코드에서 7인치 싱글로 제작한 이 음반에는 길옥윤이 작곡하고 패티김이 노래한 2곡을 수록했다. 길옥윤이 사랑의 감정을 처음 고백했던 '4월이 가면'과 '사랑의 세라나데'이다.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이 음반 이전에도 가수 커플이 함께 노래한 음반은 있었지만, 가수 커플의 결혼식 기념 음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전에 제작된 음반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제작된 가수 커플의 결혼 기념 음반으로 남았다. 결혼 직후 패티김은 신세기레코드에서 일반 가수 개런티의 10배가 넘는 36만 원의 거액을 받고 캐럴 앨범을 제작했다. 이 앨범은 또 다른 의미의 결혼 기념 음반으로 화제를 모았다.
패티 김은 1966년 최초의 한국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주연(애랑 역)을 맡았고, 1967년 TBC TV <패티김 쇼>라는 개인 이름을 최초 타이틀화한 쇼 프로그램 진행을 맡기도 했다.
패티김의 인생에 있어서 길옥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곡들을 상당수 작곡하기도 했고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1968년 발매한 <패티김 스테레오 힛트앨범 제2집>의 '빛과 그림자'는 사랑의 양면성을 의미하는 제목과 가사가 일품인데 어쩌면 짧은 결혼생활을 했던 두 사람의 미래를 예견하는 작품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곡은 패티김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가수 최희준도 불렀으며, 동명의 영화 주제가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영화의 영화음악을 길옥윤이 맡았다.
1969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된 패티김 <스테레오 하이라이트 Vol.3: 하얀집>은 총 10곡의 수록곡 중 '서울의 찬가'를 비롯한 8곡은 길옥윤의 창작곡이며 수록곡인 '서울의 찬가'는 약간 가곡의 느낌마저 드는 길옥윤의 작품이다. 첫 시작은 약간 느린 템포로 이뤄지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점차 속도감이 붙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사랑을 처음 시작했던 장소인 서울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점점 빨라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행진곡풍의 연주가 이뤄진다. 이곡은 1966년 서울시의 지원을 받은 동아방송(DBS)에서 녹음/발표되어 전파를 타기 시작했으며 음반으로 발매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카사비안카(Casavianca)'를 번안한 '하얀집'은 그리스 출신 가수 비키 레안드로스(Vicky Leandros)가 부른 곡이다. '카사비안카(Casavianca)'는 돈 배키(Don Backy)의 원곡을 이탈리아 가수 마리사 산니아(Marisa Sannia)가 불러 히트한 칸초네 곡이다. 국내에서는 비키 레안드로스가 부른 버전이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가요계에서는 번안곡이 인기였다.
1968년 '딜라일라'는 조영남이, '카사비안카'는 패티김과 펄시스터즈, 정훈희, 문주란, 최영희, 조영남 등 많은 국내가수들이 '하얀집', 혹은 '새 하얀집'으로 번안하여 불렀다. 애잔한 멜로디로 한국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 노래는 패티김이 우리말과 후렴구의 일부를 이태리어로 불렀다. 2005년 11월 KBS 2TV 드라마 <황금사과>에서는 가수 적우가 부른 '하얀집'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1969년은 길옥윤과 패티김의 결혼 3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래서 이 음반은 대중에게 부부가 금슬 좋게 잘 지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활을 하였다. 특히 수록곡 '뒷모습'은 두 사람이 혼성 듀엣으로 불렀기에 의미가 있다. 길옥윤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한 노래가 아니라, 푸르른 달빛 아래 이별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슬픈 노래였다.
패티김에 따르면 '서울의 찬가'는 1966년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에서 후원할 테니 서울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길옥윤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 곡은 새마을 노래처럼 리듬과 반주, 박수 효과를 넣어 건전가요 같은 느낌이 난다. 이 노래를 처음 발표했을 때 서울시청에서 매일 새벽마다 확성기로 틀어대는 바람에 근처 조선호텔에 투숙한 외국인들이 새벽잠을 설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3월 길옥윤이 사망하자 패티김은 그의 장례식에서 빠른 템포의 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이별'을 부르라고 권유했지만 패티김은 '서울의 찬가'를 선택했다. 10월에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패티김과 길옥윤 사망 직전 아내 전연란, 딸 안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의 찬가' 노래비를 제막했다. 이는 서울 사대문 안에 건립된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였다.
1969년 신세기레코드에서 제작한 <패티김의 사랑하는 마리아 / 박형준의 첫사랑의 언덕>은 패티김, 길옥윤이 첫딸 정아를 낳은 이후, 사랑의 감정이 가장 무르익은 시기에 발매했다. 총 11곡을 수록한 음반 앞면은 패티김의 노래 5곡으로, 뒷면은 박형준, 최희준, 한상일 등 남자 가수 5명의 노래로 구성했다.
길옥윤 작품집으로 제작한 이 음반의 화두는 패티김과 길옥윤이 결혼 후 혼성 듀엣으로 처음 노래한 타이틀곡 '사랑하는 마리아'이다. 이 노래는 1967년 12월,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길옥윤의 첫 리사이틀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불러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이 곡은 음반 발매 후 더욱 화제를 모으며 상당히 히트했는데, '사랑하는 마리아'는 이후 패티김 · 길옥윤 커플이 여러 곡을 혼성 듀엣으로 취입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수록한 패티김의 노래 중 길옥윤이 작곡한 '9월의 노래'도 크게 히트했다. 나머지 곡은 드라마 <풍난>, <꽃밭에 산다>의 주제가와 번안곡이었다. 앨범 뒷면에는 진귀한 노래들을 여러 곡 수록했다. 유명 작곡가였지만 일본에서는 가수로도 활동한 길옥윤의 솔로곡 '네 얼굴을 보면은', '낙엽'은 모두 번안곡이다. 이 노래에서 부드러운 미성을 구사한 길옥윤의 노래 실력은 상당하다. 뒷면 타이틀곡인 박형준의 '첫사랑의 언덕' 또한 당대에 크게 히트한 곡이다. 당시 고학력 학사 가수로 유명했던 박형준의 노래도 길옥윤의 작품이다. 세 번째 트랙인 길옥윤의 곡 '사랑은 홍역'은 훗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인기 가수가 될 하수영의 데뷔곡이지만, 이 곡은 히트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트랙인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도 알려지지 않은 진귀한 노래이다. 한상일의 대표곡이 된 '웨딩드레스'는 지금도 결혼 시즌을 대표하는 웨딩송으로 사랑받는 노래이다.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로 주문 제작한 이 노래는 가수와 노래 제목, 가사는 같지만 멜로디는 다른 두 가지 버전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표했다. 음반 상으로 먼저 발표한 노래는 이 앨범에 수록한 곡으로, 길옥윤이 작사 작곡한 왈츠풍 버전이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희우 작사, 정풍송이 작곡한 버전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방송국에 노래 신청이 들어오면 진행자가 두 버전 중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히트한 버전은 1970년 발매한 한상일의 독집에 발표한 정풍송의 버전이다.
이 음반은 1969년 처음 발매된 후 패티김 · 길옥윤 커플이 첫 혼성 듀엣으로 발표한 타이틀곡 '사랑하는 마리아'의 히트 덕분에 1970년에 2회 재발매했고, 1971년까지 도합 4회 재발매했다.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두 가지 버전을 남긴 '웨딩드레스'의 최초 버전과 하수영의 데뷔곡, 그리고 길옥윤의 국내 데뷔 솔로곡 등 진귀한 노래들을 대거 수록한 이 음반은 음악적으로나 대중가요 역사적으로나 모두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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