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항기(尹恒起, 1943년 9월 15일 ~ )는 싱어송라이터, 배우, 개신교 목회자이며, 대학 교수이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지금의 보령시)에서, 아버지 윤부길(극작가 겸 희극인)과, 어머니 고향선(본명 성경자, 무용가)의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1959년에 작곡가 겸 재즈 음악가 김희갑이 악단장으로 있던 에이원쇼 무대를 통해 미8군 쇼에서 진 빈센트(Gene Vincent)의 'Be-bop-a-lula'로 데뷔했다.
“1959년 제 동생 윤복희가 서울 삼각지에 있는 미 8군 ‘에이-원 쇼’에 출연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동생을 만나러 미 8군에 갔는데 문득 ‘나도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밴드마스터(악단장)인 김희갑 선생님을 졸랐고, 그렇게 해서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노래가 아닌 드럼을 배웠는데 그 인연으로 나중에 그룹 ‘키보이스’ 때 드럼을 맡게 됐지요. 드럼을 배우다 보니 노래가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당시 세계 최고의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배웠지요. 1959년 ‘에이-원쇼’의 메인 싱어가 위키리(이한필) 형님이었는데, 형님이 크리스마스 공연 때 감기몸살로 몸이 너무 아파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대타로 무대에 올라서 얼떨결에 데뷔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10월 해병대 군악대로 입대했지요.”
1964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 음악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 보이스(Key Boys)를 결성했으며 원년 멤버로는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 김홍탁, 옥성빈이고 통칭 ‘1기 키보이스’라고 불린다. 그해 독집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발표했다. 1960년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가 트로트였던 것에 반해 윤항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음악 스타일인 그룹 사운드(group sound)를 했었다.
1964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한 키보이스(Key Boys)의 데뷔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은 당시 키보이스 멤버는 차중락(보컬),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 차도균(베이스 기타), 윤항기(드럼) 등 5인조 라인업이었다. 이 앨범은 신중현의 에드훠 1집보다 5개월 앞서 발매한 한국 최초의 밴드 음반이라는 역사성이 있다.
총 13곡의 수록곡은 멤버들의 창작곡이 아니라, 트로트 전문 작곡가 김영광의 2곡, 비틀즈 등 외국 가수의 번안곡으로 채웠다. 타이틀곡은 주리오 작사, 김영광 작곡의 '그녀 입술은 달콤해'였다. '정든 배는 떠난다'는 1기 키보이스의 최대 히트곡이다.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번안한 '그녀 손목 잡고 싶네'는 국내 최초의 비틀즈 커버곡으로 기록됐다.
당시 ‘한국의 비틀즈’를 표방했던 키보이스는 자신들의 창작곡을 부르기보다는 카피 밴드에 가까웠다. 비치 보이스나 비틀즈의 노래와 연주가 이들의 연습 테마였고, 실제 무대에서도 즐겨 부른 주요 레퍼토리였다.
당시 키보이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앨범 발매 후 KBS TV에 출연해 한국 최초 밴드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키보이스는 부산 해운대에서 한국 그룹사운드 사상 처음으로 단독 야외 공연을 펼치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음반 발매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키보이스의 데뷔 앨범을 국내 최초의 밴드 음반으로 인증하는 것이 옳다. 이 앨범은 음반 수록곡 전체를 키보이스가 장악했고, 록의 본고장 영미권에서 들어온 록 음악과 국내 작곡가 김영광의 창작곡을 함께 수록해 다양성을 갖춘 음반이란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이 음반에서 멤버 각자가 보여준 개성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로 성장하게 될 멤버들의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하게 한다.
같은해인 1964년 키보이스는 쟈니리와의 스플릿 앨범 <오! 우짤꼬/ 정든 배는 떠난다> 를 발표하여 '정든 배는 떠난다'를 히트시켰다.
윤항기는 그가 리드했던 그룹 키 브라더스(Key Brothers)를 만들어 1971년 데뷔앨범 <GO GO 춤을 춥시다 / 별이 빛나는 밤에>을 발표하였다.
키보이스는 1960년 말 리드 기타리스트 김홍탁이 탈퇴하면서 거의 해체 상태였다. 그러자 드러머 윤항기는 락앤키(Lock & Key)라는 쇼단을 구성해 월남 위문 공연에 올랐다. 그가 공연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코끼리 브라더스 출신의 조영조와 장영을 주축으로 한 2기 키보이스가 인기리에 활약하고 있었다.
주축 멤버들이 거의 남지 않은 밴드에 이름을 빼앗겨버린 윤항기가 1970년에 새롭게 결성한 밴드가 바로 키브라더스였다.
키보이스의 ‘이름값’에 편승하려 한 기획사 탓에 이 음반은 키보이스 이름으로 먼저 발매했다. 초반 재킷에 기타 모양으로 인쇄한 ‘키보이스’ 로고는 그 때문에 삽입했다. 나중에 작은 글씨로 키브라더스라고 쓴 재반과 키보이스 이름으로 발매한 초반은 재킷만 다르고 음원은 같다. 키브라더스는 산타나(Santana)의 영향력이 짙게 느껴지는 라틴풍 록과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적절하게 섞은 개성적인 음악을 구사했다.
자유분방함의 최고점을 보여주는 트랙은 타이틀곡 '고고춤을 춥시다'이며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은 '별이 빛나는 밤에'이다. MBC-FM 라디오방송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곡은 키브라더스의 다음 음반에 수록된 '장미빛 스카프'와 함께 윤항기를 대표하는 히트곡이 되었다.
이 곡이 라디오 프로그램과 같은 제목이었던 까닭에, DJ 이종환이 사회를 맡은 쇼 <별이 빛나는 밤에>의 공연 사진을 재킷 오른쪽에 실었다. 라디오 방송과 결합된 시너지 효과 덕분에 1972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이 모두는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인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인기는 윤항기의 대표곡이 되었을 뿐 키브라더스의 것이 되지 못했다. 데뷔 앨범인 본작 이후 키브라더스는 이미 독자적인 밴드로서보다는 윤항기 백 밴드의 성격이 강해졌다.
두 번째 음반 <키-부러더즈 특선집>과 신세기레코드 이적 후 발표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마지막으로, 윤항기는 솔로 가수로 독립해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1974년 7월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발매한 <나는 어떻하라구>의 타이틀곡 '나는 어떻하라구'가 크게 히트하여 1975년에는 영화 <나는 어떡하라고>가 제작되었으며 영화의 주연으로 영화배우로도 데뷔하기도 하였다. 이 앨범에는 김민기의 곡인 '친구', '아침이슬'이 수록되었는데 이곡들은 당시 심의에 걸려 모두 삭제되어 재출반 되기도 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윤항기와 윤복희의 스페셜앨범 <외로운 해바라기/우리오빠>를 발매하기도 하였다.
1974년 개최된 제1회 한국가요제는 국내 최초의 대형 가요제이다. 원래 이 가요제는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연예 담당 기자였던 정홍택은 가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기 위해 노래 콘테스트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열리는 야마하국제가요제를 참관하고 돌아와 한국가요제를 구상했다. 대회 장소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좌석 수가 많은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으로 정했다.
이대회의 기념음반격인 <제1회 한국가요제 Best 10>의 음반 뒷면에는 가요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명기했다. 대회 조직위 위원장은 김성태, 위원은 대중가요계의 유력 인사 18명으로 구성했다. 편곡 지휘는 라음파가, 녹음 감독은 봉봉사중창단 출신으로 당시 일간스포츠 기자를 지냈던 김유생이 맡았다. 심사위원으로는 황문평, 이봉조, 길옥윤 등 작곡가와 이백천 등의 대중가요 전문가, 신문사 연예 기자들, 방송국 음악 담당 PD들이 초대되었다. 또한 심사에 대한 잡음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일반 독자 심사위원들도 공개 모집했다.
제1회 한국가요제는 기성과 신인 가수 모두에게 참가 문호를 개방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단 40곡만이 예심을 통과했다. 본선 무대는 1974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 동안 서울 대한극장에서 열렸다. 국내 최초로 기성 가수들과 신인 가수들이 경연을 펼친 대한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제 가요제 형식을 그대로 벤치마킹해 본선은 예선과 결선으로 나눠 경쟁을 벌였다.
1974년 대도레코드에서 발매한 제1회 한국가요제 음반은 본선 진출작 총 40곡 중 대상에 해당하는 그랑프리를 포함해 베스트10에 선정된 가수들의 노래로 제작했다. 베스트10에 선정된 10곡은 곧 이 앨범의 수록곡이 되었다. 베스트10 선정 가수는 박경희, 송창식, 윤항기, 박상규, 정은숙, 방은미, 강태웅, 문조, 김인순, 김명희였다. 아쉬운 점은 모든 곡이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라이브 실황이 아닌 스튜디오 녹음이란 점이다.
그랑프리를 차지한 곡은 박경희가 부른 전우 작사, 김기웅 작곡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로, 앞면 첫 번째 트랙을 장식했다. 그랑프리 상금은 1백만 원이었고 부상은 동경국제가요제 출전 자격이었다. 172cm의 큰 키와 화려하고 이국적인 외모, 풍부한 성량을 지닌 박경희는 패티김을 이을 대형 여가수의 등장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주며 스타덤에 올랐다. 박경희는 제 7회 동경국제가요제에 출전해 동상을 수상했다.
금상은 송창식의 자작곡 '피리 부는 사나이'가 차지했다. 송창식은 직접 피리 연주를 시도했는데, 사실 대상과 금상 결정을 놓고 심사위원의 고민이 컸을 정도로 근소한 차이로 대상작이 결정되었다. 대회 이후 송창식이 자신의 독집에 수록한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윤항기는 '외로운 해바라기'로 참여하였다. 당시 참가자 중 가장 어린 11살로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정은숙이 인기상을 받았는데, 이 소녀가 바로 정수라였다. 그녀는 작곡자로 참여한 함중아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인기상을 받았다. 행사 후에 대도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음반은 국내 가요제의 최초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1976년 11월 발매한 <기다리는 사람/그런거지뭐>에 이어 1977년 제1회 서울가요제에 '나그네'라는곡으로 참여하였다. 1978년 2월 윤항기 제 1집 <내가 왜 이럴까 / 복순이>를 발표하여 '내가 왜 이럴까'가 히트하였다. 1979년 3월 윤항기와 윤복희가 함께한 <이거야 정말/왜일까>를 발매하였다.
1979년 6월 MBC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가요제의 실황 앨범 <’79 서울 국제가요제>는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하였으며 이 음반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먼저 본선 진출 7팀 선발을 위한 11팀의 국내 대회 입상곡을 모은 싱글 재킷 음반을 먼저 발매했다. 이어 양면으로 펼쳐지는 게이트폴더 재킷으로, 세계 12개국을 대표하는 18명의 가수들이 치열한 경연 실황을 2장의 음반에 수록했다.
이 앨범은 화려한 오프닝 팡파레에 이어 그랑프리를 수상한 윤복희의 인사와 노래로 시작했다. 제2회 서울국제가요제의 주인공은 한국 대표 윤복희였다. 오빠 윤항기가 작사 작곡한 '여러분'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남매가 부둥켜안고 오열했던 모습은 불후의 명장면이다.
“윤복희가 외로울 때면 위로해줄 사람은 누구? 바로 여러분!”이란 윤항기의 인사와 눈물로 범벅된 윤복희의 앵콜송은 객석과 전국 시청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여러분'은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이겨낸 아름다움을 보여준 명곡이다. 대중가요의 가장 위대한 기능인 위로의 미덕을 증명한 결정판이라 해도 좋다.
’79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음반은 국내 대회, 본선 실황에 이어 윤복희의 대상 수상을 기념하는 형식으로 그의 히트곡을 모은 앨범을 추가로 발매했다.
1978년 폐결핵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윤항기와 더불어 1979년 초 윤복희도 이혼의 아픔을 겪고 두문불출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동생의 가슴앓이를 지켜보기 힘들었던 윤항기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말자’는 취지로 '여러분'을 만들었다. 이들 남매는 극한 절망에서 건져낸 노래 '여러분'이 자신들처럼 어려움을 겪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했다. 애절한 이 노래에 대중이 감동한 것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당대 대중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는 윤복희, 윤항기 남매의 따뜻한 진심 덕분이었다.
윤복희의 '여러분'은 대중 문화인을 ‘딴따라’로 비하해온 사회적 편견에 놀라운 반전을 가져온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3월 윤항기와 윤복희가 함께한 <Hang Ki Bok Hee>를 발매하였으며 1986년 6월 발매 앨범 <남자의 눈물/ 웰컴투코리아>의 86서울아시안게임 홍보곡인 '웰컴투코리아'를 마지막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2014년 3월, 목회자에서 은퇴한 뒤 그해 신곡 '걱정을 말아요'를 담은 데뷔 55주년 골든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 윤부길은 코메디언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연기인이었는데 이는 1940년에 창단되어 수준 높은 래퍼토리를 보여주었던 콜롬비아 가극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현재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하고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였다. 1912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온 후 박용구·황문평 등과 함께 콜롬비아 가극단에 입단, 타고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가극단은 서항성·설의식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민족색 짙은 예술단체였다. 그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도 원정공연을 가 한국의 혼을 알림으로써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윤부길은 이 가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콩쥐팥쥐>와 <견우직녀>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오페레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코미디적인 요소를 띠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복화술(腹話術)을 배워 보여주면서부터였다. 윤부길의 그런 재능은 학식을 바탕으로 한 본인의 꾸준한 자기계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성악뿐이 아니라 시나리오도 썼고, 작곡·반주·의상·무대장치에도 능했다. 황문평은 <가요 50년사>에서 본격적인 오페레타 형식의 무대가 윤부길에 의해 시도되었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무대는 윤부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부모로부터 뛰어난 자질을 이어받은 가수 윤항기는 그룹에서 호소력 짙은 보컬과 뛰어난 작곡-작사 능력으로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별이 빛나는 밤에', '장미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등 솔로 활동까지 탄탄대로를 달리며 당대 최고의 가수로 기억되고있다.
윤항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원조 남매 뮤지션으로 명성을 크게 얻었던 가수 윤복희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5살이란 어린 나이에 데뷔했던 그는 가족의 자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힘든 시간이 찾아온 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었다. 이후 전업가수로서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해야 했던 동생 윤복희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오빠 윤항기는 덩달아 가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동생 윤복희 영향으로 가수 꿈을 키웠던 그는 “제가 처음 미8군 들어어 간게 공연을 하러 간 게 아니라 동생 윤복희를 보러 간 거였다. 동생이 오산 미군 부대 공연장에서 하우스 밴드의 전속 가수로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거길 가끔 따라갔는데 그때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너무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동생 쇼 하는 거 보러 놀러갔다가 주저 앉았다. 심부름하고 하면서 드럼, 노래를 배웠다”라고 떠올렸다.
윤항기의 히트곡중 하나인 ‘장밋빛 스카프’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닌 윤향기와 아내의 실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윤항기는 키보이스 시절 무교동의 한 클럽에서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뮤지션과 부유한 집안의 여대생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윤항기는 “처가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만날 수조차 없었다.
윤향기는 겨울에 아내가 스카프를 두르고 나타났는데, 스카프를 벗기 전까지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회상했다. 알고 보니 가족의 반대 과정에서 머리카락까지 잘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윤향기의 마음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윤향기는 당시 아내의 모습을 보고 상당히 속상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훨씬 거셌고, 아내는 머리카락까지 잘려야 했다" 고 하는데 결국 두 사람은 모든 반대를 뒤로하고 결국 결심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같이 살자”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한 것이다.
이후 윤향기와 아내는 집을 나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졌다.
과거 연이은 히트곡으로 남부럽지 않은 연예계 생활을 했던 윤항기는 당시엔 가족과 아내보단 바깥일에 더 집중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그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기까지 크나큰 시련 앞에 놓여야 했다고 고백했다. 활동 중 몸에 이상을 느껴 찾은 병원에서 폐결핵 말기 판정을 받고, 시한부가 선고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집에서 살뜰히 자신을 보살펴준 아내 덕분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땐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을 등한시했고, 그렇게 아내한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라고 말하며 돌이켜봐도 미안할 만큼 젊은 시절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해, 지금은 오직 아내를 위해서만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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