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기(金敏基, 1951년 3월 31일~2024년 7월 21일)는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이자 탁월한 예술가로 찬사받는 인물이다. 전라북도 이리시에서 5남 5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태어나 중앙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동 삼산의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의사였고 1940년대 말 중앙동에 삼펜사이다 공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퇴각하던 북한군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뱃속에 있던 김민기를 두고 살해 당하고 만다.
어머니 김하련(1907-1996)은 함경도 원산 출신으로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 1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4학년 때 기숙사내 조선인 차별에 맞서다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땄고, 남부지방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삼산의원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난 후 조산원 일을 하면서 남편이 생전 운영하던 간장공장과 사이다공장을 운영해 자식들을 키웠다. 훗날 한국여전도회(기독교) 회장을 맡아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하기도 했다.
사망한 남편 대신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늘 바빴고 형제들은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어린 김민기는 서너 살 때부터 늘 집을 혼자 지켜야 했다. 텅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있어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6.25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년 시절의 체험은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잡게 된다.
그가 이리중앙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상경하였고 김민기는 서울재동초등학교로 전학 가 졸업 후 당시로서는 전교권 성적의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었던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이었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마침 그가 있던 보이스카우트 활동실에 버려져 있던 우쿨렐레가 있었는데 재미삼아 연주하다 보니 이는 곧 그의 첫 악기가 되었고 캠핑을 가면 늘 그가 반주를 도맡게 되었다.
1966년 김민기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로부터 입학선물로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받게 된다. 가르쳐줄 사람이나 교재가 딱히 없어 그는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보고 연주하여 독학하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그는 학교 내에서 소문난 기타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196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가세'(미발표곡)라는 곡을 작사, 작곡하게 된다. 이후 그는 동해로 간 보이스카우트 야영 중에 절친한 후배를 잃는 사고를 겪게 되고 이를 학생 대표로서 후배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참혹한 심경과 무책임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을 담아 기차 안에서 즉석으로 '친구'라는 곡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기도 하였다.

1969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입문자에 가깝게 맞춰져 있었던 교과 과정의 미술 수업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고 흥미롭지도 않았다. 따라서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고 결국 그는 1학기 낙제를 한 뒤 2학기 휴학계를 제출하게 된다.
휴학 후 집안 사정이 어려워 그림 물감을 살 형편조차 되지 않아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에게 같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고교 시절 친구인 김영세로부터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기타를 잘 쳤던 김민기는 김영세와 듀엣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곧 관객이었던 여학생들로부터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그룹 이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작곡 활동과, 음악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1970년 연말에 김인배의 음반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에 참여해 '친구', '세 노야' 두 곡을 수록한다. '친구'는 김민기의 자작곡이었고, 이 음반은 김민기의 목소리가 담긴 첫 음반이었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 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 활동을 시작하며 기타를 잘 치기로 소문나 있던 그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해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가 이때 만들어졌다. 양희은의 첫 번째 앨범의 통기타 반주 또한 그가 맡았다.

이후 같이 활동하던 김영세가 군에 입대한 후 김민기의 재능을 아끼던 당시 CBS PD이던 김진성과 최경식의 주선으로 김민기는 자신의 1집이자 인생을 바꿔놓은 앨범인 <김민기>를 내게 된다. 이 앨범에는 미국 민요를 번안한 '저 부는 바람'과 한대수가 준 곡인 '바람과 나'를 제외하면 전부 김민기 본인의 자작곡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꽃 피우는 아이', '길', '아침이슬', '그날', '종이연'등으로 되어 있어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음반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음반은 발매된 지 얼마 안 가 압수조치를 당하는데, 그것은 김민기가 1972년 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부른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와 같은 노래들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 있던 그의 음반들은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는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미성은 아니었지만, 김민기의 보컬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아우르는 진지한 성찰이 돋보인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한국 포크 음악은 창작곡을 통해 포크 음악 본연의 순수함과 삶의 고갱이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본격화한 그의 앨범은 지적이고 비판적인 고뇌와 사유를 높은 완성도의 음악으로 담아냈다.
김민기 1집은 한국 포크 음악과 대중음악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당시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다.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정점을 보여준 이 음반은, 1970년대 후반 대학 노래패와 1980년대 노래운동을 비롯한 한국 대중음악의 강물 속으로 면면히 흘러갔다.
김민기 1집은 단지 통기타 음악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대표곡인 '아침이슬'은 클래시컬한 현악 편성의 반주로 편곡되었고, '종이연'에는 색소폰 연주가 가미되었다. 드럼, 베이스 기타, 오르간, 플루트 등의 악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편곡은 재즈 뮤지션 정성조가 디렉팅하면서 정성조 쿼텟이 반주를 맡았기 때문이다. 음반 출시 과정에서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과 CBS 라디오 김진성 PD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71년 무렵,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를 처음으로 만나고 그가 만든 문화 연합회 폰트라(Poem ON TRAsh)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에 대해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인 초중고 동창 이도성과 신정동에 <신정야학>을 열어 가난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신정야학의 교사이자 김민기의 동료였던 인물들 면면이 꽤 화려한데 앞서 언급했던 이도성은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지냈고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 김한 전 광주은행 은행장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하루는 서울대학교 미대 수업의 일환으로 창경궁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을 수정하기 위해 캔버스를 칼로 긁어내다가 뚫린 구멍 사이로 나무를 보고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김민기는 서양화 붓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학교도 더 이상 출석하지 않게 된다. 그와 함께 그 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대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단소와 장구를 배우고 전통음악을 접한 후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 김민기는 카투사로 입대하게 된다. AFKN에 배치돼 그가 비교적 편한 군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은 전국이 소위 유신 찬반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신찬반투표 거부 집회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고,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국군방첩부대에 소환되게 된다. 그 곳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은 그에게 "유신에 찬성하는 노래를 만들라"라고 지시했지만, 김민기는 도리어 사회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는 내용의 노래인 '식구생각'을 만들어 제출했고, 결국 괘씸죄로 사단 영창으로 보내진 뒤 최전방으로 전출되었다.
김민기는 강원도 원통에 있었던 그 곳에서 나머지 군 생활을 보내며 본인이 복무 중이던 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고등학교 선배의 부탁으로 '수색중대가'와 그곳의 정년 퇴임을 앞뒀던 하사의 부탁으로 막걸리 서 말을 대가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김민기'란 이름 석자는 이미 금기시되었기에 김민기는 서울 미대 후배 '김아영'의 이름을 빌려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양희은의 앨범에 '김아영 작사, 작곡'으로 수록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군인들 사이에서 노래가 널리 퍼져버린 통에 금방 들통나 버렸고, 결국 처음으로 국방부장관이 직접 '군 사기저하' 사유의 명목으로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군에서 제대했을 때 김민기는 자신이 이미 운동권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음과 본인의 노래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고난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다. 김민기는 여기저기 소환되며 조사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고문까지 당하게 된다.
"눈에 수건을 가리고 시내를 한참 돌아다녔기 때문에 어떤 기관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이제 들어가니까 연행된 이유는 그 당시에 각 대학에 노래 서클들이 많이 생겨날 때였습니다. (중략) 좀 넘기다 보니까 아침이슬이 나왔어요. 노래에 전체적인 주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긴 유신 시대를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주석을 열렬히 환영하자' 그런 것이 노래의 개요다, 이렇게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공식적으로 음반으로 출반된 것이 1970년도였습니다. 그럼 10월 유신은 몇 년도입니까?" 그렇게 제가 반문을 해봤죠."
KBS 다큐멘터리 '유신시대 3부, 아침이슬의 수난' 인터뷰 중
이미 볼온한 자로 정권에 찍혀버린 김민기는 당시 소위 'KS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게 되었고, 어딜 가든 형사들과 기관원들이 따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친한 친구나 선후배나 지인이나 친인척을 만나도 일부러 모른 척해야 했으며, 그의 지인들인 양희은, 임진택 등도 김민기에 대해 불라는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방문을 걷어차며 집으로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놀라 심장병까지 앓기도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일할 곳을 도통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실상 백수로 떠돌면서도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보던 김민기는 가까스로 부평의 한 봉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던 그는 김세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의 배려로 중등교사 자격증과 함께 9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비로소 학사 취득자가 된다. 그는 공장 제품에 붙어 있는 라벨의 기초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는 공장의 어린 여공들과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출근하기 전 회사에 그들을 가르치는 조학을 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공장의 앞뜰에서 기타를 치며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자신보다 어린 노동자들에게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 "꿈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당시 공장에는 형편이 안 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사는 부부가 많았는데, 그들을 위한 합동 결혼식의 축가로 김민기는 '상록수'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지고 공장 사측에서도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것을 소위 의식화 교육으로 여기며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얼마 안 가 결국 김민기는 공장에서 퇴직하게 된다.
정말로 갈 데가 없어진 김민기가 선택한 일터는 막노동판이었다. 여러 공사판들을 전전하며 막노동꾼으로 살던 그에게 선배 한 명이 찾아온다. 그 선배는 그에게 "노래 안 만드냐, 공장 다닐 때 생각 안 나느냐"고 물었고 그는 다시 노래를 한두 곡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들다 보니 노래들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결국 그는 두 달 만에 하나의 작품, <공장의 불빛>의 수록곡들을 모두 작곡하였다. 김민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공장의 불빛>을 녹음하고 배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으로는 약자 중의 약자인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비추고 이들에게 노동조합을 설립할 것을 말하는 내용의 <공장의 불빛>은 발매가 허가되지 않을 것임을 넘어서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고초를 겪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민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이골이 나있던 상태였고 또 자신이 직접 봐온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나아갈 희망을 주기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민중가요 동아리 메아리 등 여러 대학교의 민중가요 동아리들을 모아 송창식의 배려로 그의 녹음실에서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녹음해 배포하였다. <공장의 불빛>은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극으로 담았을 뿐 아니라 노래굿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민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감옥 아니라 그보다 더한 처지에 놓이건 말건 달려들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필요도 없는 이 명백한 불법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이름 석자를 떳떳이 밝힐 수 있었고 내용과 형식면에 있어서도 기존의 상업 가요의 틀을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었다."
김민기의 친필메모 중(1994년 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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