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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청년 문화를 노래한 싱어송라이터 김민기(part 2)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 당국의 탄압을 피해 자신의 출생지이자 부친의 묘가 있는 곳인 익산시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김민기는 경찰서에 소환돼 몇 번의 조사를 받는 것 외에는 이땐 별다른 고초를 겪지 않았다. 김민기는 이후 '아예 음악을 잊어버리겠다'라는 생각으로 온건히 농사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익산에서 소작을 하며 농사를 짓던 김민기는 10.26 사건 이후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다.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그는 농사를 더 크게 짓고 싶은 욕심에 인근의 김제시로 가 2년 동안 머무르다가 1981년 경기도 전곡으로 다시 떠나 5000평 규모의 참깨 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 회사에 그 일대를 맡아 액체 비료를 살포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싹들이 모두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김민기는 홀로 원인 조사를 해 결국 비료 회사에서 정량의 5배나 과다 살포한 탓임을 밝혀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에 대해 철저한 데이터를 작성해냈고,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해 겨울, 그에게 약 5000평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 원을 벌어 강원도 연천군 민간인통제선 안의 유촌리 마을의 한 폐가를 매입 후 그곳에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민기는 그 마을에서 단순한 농사꾼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촌지도자'로서 살았다. 동네의 옛 이름을 딴 '두개마을 청년회'를 조직해 마을의 여러 일을 도맡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배달 형식으로 팔아줌으로써 중간 유통 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마을의 농민들로 하여금 큰 이윤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했던 유촌리 생활은 3년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 당시 김민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유촌리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추수 후 겨울에는 전라남도로 내려가 김 양식하는 노동을 하거나 서울로 가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김민기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불이 커져 집 안의 모든 것을 건질 수 없을 때였다. 김민기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불 타는 집 앞에서 밤새도록 막걸리만을 마셨고 그의 수많은 책과 메모들, 악보 뭉치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마을을 떠날 생각이 별로 없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도와 다시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길래 마을에 머물려고 했지만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1984년,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날개만 있다면 (노래극 '개똥이' 중)

 

33살의 나이에 다시금 서울로 돌아온 김민기는 <엄마, 우리 엄마>, <개똥이> 등의 아동용 뮤지컬을 만들어 레코드로 출반하려 했지만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의를 위한 접수 자체가 거부되어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우여곡절 끝에 발매 뒤에도 음반사에 대한 기관원들의 압력 때문에 시중에 배포되지 못해 판매가 거의 안 되는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85년, 김민기는 34살의 나이에 아동극을 함께 만들던 당시 사무실 직원이었던 서강대 영문과 출신 이미영과 서울미술관에서 전통 혼례식을 올렸다. 김민기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이미영과 함께 하던 음반 작업이 엎어진 이후 일자리를 잃게 만든 악덕 사장이 되기 싫어서 결혼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발표된 6.29 선언으로 인해 김민기의 인생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에서 해제되고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 또한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해 그는 창작 활동에 박차를 가해 자신의 탄광 생활과 그곳 아이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아동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와 과거 심의가 거부되었던 <개똥이>의 노래를 담은 음반 <노래일기 「엄마, 우리엄마」 / 노래극 「개똥이」 중에서>를 낸다. 노래일기 형식의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한 후, 아동 뮤지컬 <엄마, 우리 엄마> 수록곡 4곡과 노래극 <개똥이> 수록곡 14곡을 한 음반에 발표했다. 

<엄마, 우리 엄마>는 전 곡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작품이다. 엄마 없이 할아버지와 사는 주인공 옥이가 일 때문에 학교에 못 가게 되지만, 짝궁인 연이 엄마의 도움으로 다시 학교에 간다는 짧은 내용을 담았다. 

 

 

엄마 구름 애기 구름

 

실제 극은 '엄마 생일날', '어젯밤 꿈에 엄마가', '엄마 구름 애기 구름', '학교 가는 길'의 4곡과 연이와 옥이 등의 대사로 구성되었는데, 음반에서는 조원익, 허성욱, 박미선, 김민기가 연주하고 김성민과 조경옥 등이 노래했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와 <엄마, 우리 엄마>는 모두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 연이이며, 일기 형식을 빌렸다. 수록곡 중 '엄마 구름 애기 구름'이 비교적 유명하다. <개똥이> 음반 수록곡 중 '꾸러기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곡은 '제발 제발'이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하며, '날개만 있다면' 역시 사랑받는 민중가요가 됐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1987년 12월 13곡이 수록된 독집으로도 발매되었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는 여전히 김민기의 활동에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빠 얼굴 예쁘네요>에서의 '까맣다'라는 표현도 문제 삼을 정도였다. 탄광이 까맣다라고 묘사하는 것조차 문제 삼는 것에 기가 찬 김민기는 '검다' 라는 표현을 모두 탄광은 하얗다로 전부 바꿔버리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수록곡 몇몇을 빼는 선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 

여전한 공윤의 행태에 의욕을 잃은 김민기는 창작 대신 사회운동에 발을 들이고 1989년 장일순, 김지하 등과 같이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한다. 
1990년에는 한겨례 신문사에서 주최한 <겨레의 노래> 사업의 총감독을 맡아 중국, 프랑스,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민족의 노래를 찾는 활동을 하고 수집한 노래들을 모아 음반 <겨레의 노래 1>을 발매하였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겨레의 노래>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김민기는 이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래를 대중들 앞에서 부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 (송창식,조경옥)

 

1991년 김민기는 드디어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열고 대표를 맡는다. 사실 이 과정에서도 사연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만든 극단인 연우무대가 원래 그 소극장에 입주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연우무대는 그 과정에서 보증금 50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했고 건물주와 연우무대 사이를 중재하던 김민기가 지하 소극장 시설을 다 마련해놓은 건물주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대신 입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민기는 그 50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 음반사를 찾아가 나중에 자신의 음반을 낼 것을 약속하고 선불로 돈을 받았다. 

그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갈 곳을 잃은 포크 뮤지션들에게 선뜻 극장을 빌려줬고 김광석, 들국화, 시인과 촌장, 장필순, 강산에 여행스케치, 윤도현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학전에서 성장해나갔다. 이 중 김광석은 학전에서 단독 콘서트 1000회 돌파 기념공연울 하기도 했다. 

1993년 김민기는 마침내 22년 만에 자신의 모든 작품 39곡을 집대성한 음반 네 장을 발표한다. 이는 학전 보증금을 갚기 위한 것이었으며 <김민기 1집>이후 22년 만에 나오는 솔로 음반이었다. 그는 이 음반 발매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 은퇴를 선언한다. 

김민기는 2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93년 2월 15일 서울음반에서 4장 시리즈 형식으로 구성한 신보 <김민기>를 LP와 카세트테이프로 발매했다. 한 달 뒤인 3월 15일에는 CD 버전도 발매했다. 
당시 각 언론은 “김민기 노래의 제 모습을 찾았다”(동아일보), “시대변화 절감, 김민기 음악 결산전집 나온다”(중앙일보)며 이 음반의 제작을 환영했다. 

“1970~1980년대 내내 정치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퇴폐성에 눌려 있다가 뒤늦게 빛을 보게 된 작품이 이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는 김민기의 감회 어린 소감 뒤에는 쉽지 않았던 앨범 준비 과정이 있었다. 
여전히 냉엄한 경제 논리가 지배했던 대중음악계에서 김민기 음반을 제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시리즈 앨범에 수록한 모든 노래는 대부분 녹음실이 아닌 공간에서 녹음해야 했고, 일부만 진양스튜디오에서 마무리했다. 

힘겨운 제작 과정을 극복하고 앨범을 발매했던 당시 김민기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녹음실이 아닌 음악 친구들의 작업실을 전전하며 24트랙은 엄두도 못 내고 때론 아날로그 4트랙으로 겨우 녹음했다”며 “차 지나가는 소리, 심지어 개 짖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리는 난산 끝에 출산한 음반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녹음 작업에는 고인이 된 김광석 외에 조동익, 김광민, 안치환, 한영애, 이병우, 노영심 등 많은 후배 가수들과 어린이들이 참여했다. 

2년여 동안의 고초 끝에 빛을 본 김민기의 4장 시리즈 음반에는 그간 구전으로만 알려지거나 공륜의 심의 거부로 음반에 수록하지 못한 노래, 작사 작곡자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해야 했거나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알려졌던 40곡(연주곡 포함)을 총망라했다. 

 

 

가을편지

 

총 4장 시리즈 중 첫 번째 음반인 <김민기 1>에는 그가 창작한 총 11곡(연주곡 포함)을 수록했다. 편곡은 김민기와 더불어 기타리스트 이병우, 키보디스트 김광민 등이 참여했다. 이 음반은 김민기가 활동 초기에 만든 노래들로 구성했다. 앞면과 뒷면 타이틀곡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많은 가수들이 부른 '가을편지'와 '아침이슬'이 각각 차지했다. 
유일하게 고은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가을편지'는 최양숙이 가장 먼저 발표했고 '아침이슬'은 양희은이 먼저 취입했던 노래였다. '아름다운 사람'은 여성 듀엣 현경과 영애의 노래로 널리 알려졌다. 1971년 데뷔 음반에서 들려준 음색과 달리 이 음반에 담은 김민기의 목소리는 지독한 저음으로 변한 것이 이채롭다. 

 

 

새벽길

 

<김민기 2>앨범에는 '새벽길', '길', '고향가는 길' 등 여러 곡이 수록되었으며 <김민기 3>앨범에는 '상록수', '기지촌',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이 수록되었다. <김민기 4>앨범에는 '봉우리', '백구', '날개만 있다면' 등이 수록되었다. 

앨범 발매 당시 김민기는 수록곡에 대해 “제 노래를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고, 제 노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신세대에겐 지금의 기성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앨범의 발매 직후, 이에 대한 진보와 보수 진영의 엇갈린 평가가 대립했다. 당시는 1970~1980년대 민중가요를 정식 음반으로 발매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포크의 전설’로 평가받는 김민기가 부른 1970년대 민중가요의 진수를 합법적인 음반으로 발매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큰 의미가 있다. 

대관료를 많이 받지 않았고 좌석 수도 적었기에 학전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곧 극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김민기는 독일문화원으로부터 독일 그립스 극단의 창작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공연 영상을 보게 된다. 이를 우리나라 정서로 번안하여 적용해 보겠다는 결심을 한 김민기는 당시 무명이었던 황정민, 설경구, 나윤선 등을 끌어모아 극단 학전을 설립하고 <지하철 1호선>을 학전 무대에 올린다. 결과는 초대박이었고 이로 인해 학전은 폐관 위기에서 벗어나 1996년 2호 극장인 학전 그린 소극장을 오픈할 수 있었다. 

 

 

지하철 1호선 - 울 때마저도 아름다운 너

 

<지하철 1호선>의 성공에 탄력을 받아 김민기는 그립스 극단의 또 다른 뮤지컬을 번안한 <모스키토>, 영국의 원작 뮤지컬을 6.25 시대의 한국 배경으로 번안한 <의형제>, 창작 뮤지컬 <개똥이> 등을 올릴 수 있었고 이중 <의형제>는 우리나라 정서에 잘 적용시킨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백상예술대상 등 큰 상을 여럿 수상하였다. 

<지하철 1호선>은 1996년 좌석 점유율 100%를 넘고 11개월 동안 연속 공연하는 진기록을 세운 끝에 2000년 2월 6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보다 먼저 1,000회를 돌파했고[이 과정에서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은 원작보다 뛰어나며,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될 정도다"라는 극찬을 했고 2000년부터 <지하철 1호선>에 대한 저작권료를 일절 면제시켜주었다. 2003년에 2,000회, 2006년에 3,000회 돌파 기록을 세우고 원작지인 독일, 일본, 홍콩, 베이징 등 수많은 해외공연을 이뤄낸 끝에 2008년 마침내 4,000회를 달성한다. 그리고 김민기 대표는 독일 최고의 문화 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여받았다. 

 

 

작은 연못

 

그러나 김민기는 승승장구하고 있던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서 과감히 내려버리는 결정을 한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아동청소년극을 하기 위해서, 둘째는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였다. 

김민기는 이후 "우리 모두 어린이이던 시절이 있었고, 결국 미래는 어린이들이다"라는 일념으로 어린이극에 몰두한다. 초기에는 번안 작품인 <우리는 친구다>(2006), <슈퍼맨처럼!>(2008), <그림자소동>(2008), <고추장떡볶이>(2008), <무적의 삼총사>(2009), <복서와 소년>(2012) 를 대부분 무대에 올렸고, 이후에는 본인이 직접 창작하고 연출한 <도도>(2011), <유령놀이>(2014), <연이의 일기>(2016), <아빠 얼굴 예쁘네요>(2016), <진구는 게임 중>(2017) 등을 학전에서 공연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장애아, 광부를 아버지로 둔 탄광의 아이들, 고아, 왕따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한 김민기 대표는 아이들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주력했으며 학전의 어린이극들에서는 전형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은 거의 없었으며 '아이들에게 생 악기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 때문에 학전의 어린이극은 전부 라이브 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린이극은 애초에 돈이 안 되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도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김민기 대표의 신념에 학전 어린이극의 입장료는 시세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고 학전엔 적자가 한없이 늘어 몇 억으로 불어났다. 거기에 2020년에 닥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학전은 직격탄을 맞은 거에 그치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민기는 위암 말기 진단까지 받게 된다. 

결국 학전은 2024년 3월 15일을 끝으로 1991년 3월 15일 개관으로부터 딱 33년 만에 폐관을 하게 된다. 이후 2024년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 그의 일생과 학전의 역사를 다룬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방영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자신이 연출했던 어린이극들을 좀 더 손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항암 치료를 이어갔지만 자신의 인생을 바친 학전이 폐관된 후 불과 약 4개월 만에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4년 7월 21일, 결국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인 2024년 7월 17일에 기존 학전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서 정부 주도로 어린이, 청소년 중심의 공연장인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개관했다.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국내의 세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다. 수상 작품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당시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이기도 했던 루드비히 그립스극단 대표가 "그는 자신의 노래로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대의 양심이 되었고 목소리가 되었습니다."라는 소개 인사말을 읽었다고 한다. 김민기 왈 루드비히 대표가 희곡작가라 글을 잘 쓴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시대의 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부담스럽다고 한다. 상도 땀 뻘뻘 흘리며 받았다고. 참고로 원작자는 지하철 1호선 1000회 공연 이후부턴 이미 많이 벌어줬기도 하고 학전을 배려해 저작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인지 이후에도 지하철 1호선 한국 공연은 4000회가 넘게 공연되었다. 

김민기는 노래를 작곡할 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석에서 작곡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산문을 쓰고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쓴다고 한다. '상록수', '친구', '기지촌',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그렇게 작곡된 노래들이며, 이는 김민기의 지인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즉석곡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민중가요인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작사/작곡한 레전드 민중가수임에도,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턴 다른 상당수 운동권 예술가들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일부 이슈에 성명서라도 동참한 것에 비해,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 않고 본인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