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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1세대 포크 대모 양희은 (PART 1)

 

 

1970년대 청년 음악을 상징했던 가수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손에 꼽히는 수많은 명반과 명곡들을 발표하였다. 독보적인 보이스 컬러를 바탕으로 포크 음악 외에도 발라드, 재즈, 팝 음악까지 소화하며 세대를 뛰어 넘고 젊은 뮤지션들과 꾸준한 협업을 통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대의 가수 아이유가 갖고 있는 영향력과 위치를 1970년대에는 양희은이 갖고 있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아이유 또한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 중 한 명으로 양희은을 꼽았고,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양희은은 1952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으며, 상당히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육군 대령이던 아버지는 같은 이북 출신 여성과 불륜 관계를 가져 가정을 떠났다가 양희은이 불과 12살(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1964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양장점을 운영하며 집안을 이끌었으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양장점마저 화재로 잃게 된다. 당대 최고 명문인 경기여중고를 다녔지만 본인이 밝히길 중고등학생 때는 학교에도 잘 가지 않고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아버지의 산소에 가 수 시간씩 앉아있다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청소년기 막바지에 여러 귀인들을 만나게 된다. 송창식은 10대 후반부터 노래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양희은을 위해 본인의 공연 시간을 떼어 노래할 자리를 내줬고, 공연을 위해 기타 반주자를 찾다 만난 사람이 바로 양희은의 음악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김민기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반주를 맡아주며 동시에 작곡을 시작했고, 데뷔작 '아침 이슬'을 비롯해 양희은이 부른 많은 노래들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김민기와 양희은은 1970년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홀에서 처음 만났다. 1971년 봄, 대한일보 강당 무대. 공연이 끝날 즈음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동급생 김아영이 양희은에게 '아침이슬'의 악보 조각을 건넸다. 조각난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지금껏 간직할 만큼 '아침이슬'은 양희은을 감동시킨 최초의 노래였다. 재수 끝에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한 양희은은 1971년 6월, 방송인 이해성, 신태성, 김병우의 주선으로 명동 사보이호텔 뒤에 있던 라이브클럽 오비스 캐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청순한 외모, 마음을 사로잡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 탁월한 가창력은 그를 단숨에 명동 다운타운가의 인기 가수로 만들었다. 

소문을 듣고 명동 오비스 캐빈에 찾아온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양희은은 음반 취입 기회를 잡았다. 서울 뚝섬 마장동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 녹음을 위해 김민기, 김광희, 이용복 등 명동 YWCA 청개구리홀 멤버들이 모였다. 
음악적 중심을 이룬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장안의 화제가 된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 파트를 맡아 녹음을 마쳤다. 이용복은 “당시 김민기가 창작한 곡을 잘 몰라 즉흥적인 애드리브로 따라갔다. 양희은의 참신하고 맑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진짜 포크 음반이 탄생한다고 느꼈다”라고 회고했다. 

 

 

아침이슬

 

1971년 9월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을 발표했다. 음반에는 김민기가 창작한 '아침이슬', '엄마! 엄마!', '그날' 3곡과 서울대 작곡과 학생 김광희의 창작곡 '세노야 세노야', 명동 라이브클럽 오비스 캐빈에서 양희은이 주로 불렀던 '일곱 송이 수선화' 등 6곡의 팝송 번안곡까지 총 10곡이 수록되었다. 

1971년 9월, 남산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서 촬영한 재킷 사진에 담긴 포크 대모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인 모습은 순수했고 당당했다. 맑고 청아한 보컬로 들려준 환상적 콤비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노랫말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고운노래 모음>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명반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능가하는 양희은의 순수한 보컬 역시 그의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청년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날

 

타이틀 곡 '아침이슬'은 시적인 가사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1973년 군사정부가 주는 고운 노래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5년 갑자기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 체제 찬반 국민투표 날, 투표 반대 집회에서 학생 시위대가 '아침이슬'을 부르기로 한 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시중에 배포된 양희은의 앨범을 포함해 김민기의 노래가 수록된 모든 앨범은 압수 후 폐기되었다. 당시는 모든 대중가요 음반에 의무적으로 건전가요 한 곡을 넣던 시기였다. 금지곡 '아침이슬'이 건전가요 리스트에도 등재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수록곡 중 김광희 곡 '세노야 세노야'를 제외한 김민기의 모든 창작곡은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의 노래에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금지 사유가 있던 것과 달리 '아침이슬'의 금지엔 아무 이유조차 없었다. 세간에서는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 인사를 암시한다”라는 억지 해석까지 나돌았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왜 못 이루어지냐"는 황당무계한 이유로, '작은 연못'은 "김종필과 이후락의 권력 다툼을 비꼬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1971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양희은의 포크 명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처음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71 폭송 힛트모음 제1집>이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양희은 1집과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는데 통기타를 배우고 가르쳐주는 외국인 연인의 사진을 수록한 해적판 스타일의 앨범 커버도 학생층에 통기타 배우기 열풍을 불러왔다. 

사실 두 앨범을 발매했을 무렵,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양희은의 노래는 '아침이슬'이 아닌 이 앨범의 타이틀곡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 곡은 코드 진행이 쉬워 기타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용 연습곡으로도 애용되었다.
총 12곡을 수록한 음반은 당대의 다른 포크송 음반과는 달리 신중현, 일본의 혼성 그룹 트리오 하파니스 등 의외의 뮤지션들이 노래한 포크송을 수록해 학생층에 꽤 인기를 얻었다. 특히 록의 대부 신중현이 직접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한 '마부타령'을 수록해 이채롭다. 또한 트리오 하파니스가 환상적인 화음으로 리메이크한 정훈희의 '안개', 신중현의 '빗속의 여인'도 수록되었다. 
하지만 앨범 발매 후 학생층 사이에서 히트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 부정적이다”라는 이유로 앨범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바람에 이 음반은 김민기, 한대수, 신중현의 중요 독집들과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금지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앨범은 포크송과 록이 청년문화의 대세였던 1970년대 초, 두 장르가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신중현이 노래한 포크송, 양희은과 트윈폴리오가 부른 신중현의 곡 '나무잎이 떨어져서'와 '떠나야할 그 사람'이 그 사례이다. 또한 이듬해에 신중현이 양희은, 서유석과 함께 국내 최초의 사이키 포크 앨범 제작을 시도하게 한 단초가 된 앨범이란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이키델릭 포크는 포괄적인 개념인 포크 록보다 더 전문적인 장르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 장르는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실험된 진보적인 음악 장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앨범 전까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양희은과 신중현은 국내 최초로 사이키 포크 음악을 시도한 선구자였다. ‘킹박’으로 불렸던 제작자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도 반드시 언급돼야 한다. 그는 신중현의 음반 중 상당수를 제작했고, 양희은과도 데뷔곡 '아침이슬'을 포함한 여러 음반을 제작했다. 

세 사람의 만남은 각자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한국 대중음악의 입장에서 보면 축복이었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사이키 포크 음악을 국내에 소개한 이 앨범은 전혀 대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상업성 없는 음반이었지만, 킹박은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라는 가치를 높이 사서 제작비를 투자했다. 그의 과감한 투자 덕분에 한국 최초의 사이키 포크 앨범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신의 꿈

 

1972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발매한 <당신의 꿈 / 나도 몰래> 앨범은 한국 최초의 사이키델릭 포크 앨범이다. 사이키델릭이라는 음악 장르에 걸맞게 몽환적인 분위기의 재킷 디자인부터 범상치 않았다. 국내 최초로 시도된 사이키델릭 포크의 진수는 1면에서 볼 수 있다. 
타이틀곡 '당신의 꿈'을 비롯해 '풀들의 이야기', '길', '나도 몰래', '고운 마음' 등 5곡은 신중현의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와 어떻게 화학 작용을 일으켰는지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2면은 조동진의 <작은배>,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서유석의 '하늘', 김광희의 '빈자리', '가난한 마음' 등 1970년대 포크 명곡으로 채워졌다. 

이 앨범에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가 최초로 수록됐다. 한대수가 1968년 공연 무대에서 이미 발표한 곡이지만,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음반으로 취입됐다. 한대수는 이 앨범에서 작곡가로 먼저 인지도를 쌓았으며, 정작 자신은 1974년에야 이 곡을 직접 취입했다. 또한 ‘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로 평가받는 김정미의 '나도 몰래' 역시 양희은이 이 앨범에서 먼저 취입했다.

 

 

나도 몰래

 

신중현 사단 여가수들은 창법이 비슷하다. 신중현이 자신이 관리하던 모든 가수에게 창법 지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앨범에 수록된 양희은의 노래에서는 신중현의 색깔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맑은 음색을 지닌 양희은 창법의 원형질에는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앨범에는 기존에 신중현이 발표했던 특유의 환각적인 사이키델릭 음악과는 다른, 맑고 투명한 감성의 사이키 포크가 담겼다. 

시대를 앞서간 음악 장르나 실험이 당대에 대중적 조명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이는 대중음악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장르를 불문하고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시도는 당대에는 혹평과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 일쑤였다. 

록의 대부 신중현과 포크의 대모 양희은 두 사람이 함께 사이키델릭과 포크를 접목하는 음악 실험을 했던 사실을 아는 대중은 많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음악이 담긴 이 앨범은 정당한 재평가를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신중현이 록과 포크를 결합하는 프로젝트로 야심차게 진행한 이 앨범은 뒤이어 발매된 서유석의 앨범과 함께 2003년 CD로 다시 복각됐다. 총 10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의 대표적인 희귀 음반으로 꼽힌다. 

 

백구

 

1972년 12월에 발매한 <고운노래 모음 제2집>에서는 '저부는 바람'과 '등대지기',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빼고 김민기가 '백구'등 대부분의 곡을 만들었다.  

1973년 발매된 <고운노래모음 제3집>은 지난 1,2 집과는 다르게 김민기의 작품이 하나도 없다. 대신 방의경, 조동진, 한대수, 서유석, 신중현, 김광희 등 당대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큰 차이점이다. 타이틀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여대생 김정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로, 당시 대학가에선 이미 유명한 노래였다. 

원래 이 곡은 1971년 1집 때 녹음되었지만 <’71 폭송 힛트 모음 제1집>에 먼저 수록돼 인기를 얻자 이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다시 수록되었다. 고은의 시에 곡을 붙인 '작은 배'는 이후 한국 포크의 거목이 된 조동진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라 할 만하다. '불나무'는 1972년 방의경 1집에 실렸던 곡으로 양희은이 다시 불러 히트시켰다. '행복의 나라'는 창작자인 한대수를 비롯해 많은 가수가 공연에서 불렀지만, 이 앨범을 통해 양희은의 노래로 가장 먼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행복의나라로

 

이밖에 서유석은 박두진의 시에 곡을 붙인 '하늘'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는 '가난한 마음'과 '빈자리'를 만들었다. '빈자리'는 1972년 발매된 옴니버스 라이브 앨범 <맷돌>에, '불나무'와 '가난한 마음' 역시 1972년 발표된 양희은 컴필레이션 앨범 <불나무>에 먼저 실렸다.

이 앨범에서 보이는 양희은 음악의 큰 변화는 신중현에서 비롯됐다. 앨범 수록곡 중 '나도 몰래'와 '길'의 두 곡을 작사 작곡한 신중현은 이전에 발표했던 양희은의 그 어떤 곡과도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신중현은 포크의 영역을 넘어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 곡들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편, 같은 해에 양희은이 <신중현 작편곡집>을 발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앨범의 수록곡과 상당수 겹치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1973년 서유석과도 비슷한 성격의 앨범을 발표하며 포크와 록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확장을 모색해왔다. 그것이 레코드 회사의 상업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든, 신중현의 음악적 시도였든 간에 포크와 록의 협업이 시도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앨범의 대표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보통 통기타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연주하는 노래들 중의 하나였다. 가장 기본적인 슬로우 록 리듬에 운지가 쉽고, 처음 배우는 C-Am-Dm-G7의 코드만으로 이뤄진 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수많은 기타 교본에 첫 번째 연습곡으로 수록됐다. 이밖에 '행복의 나라'도 통기타를 배우면 반드시 연주해보는 곡 중의 하나이니, 이 앨범은 통기타 연주의 교과서 같은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한사람

 

1976년 8월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한 독집 앨범 <한사람 / 세월이가면>은 양희은의 히트곡 '한사람'을 수록했다.
양희은은 이 앨범에서는 새로운 파트너인 싱어송라이터 이주원을 비롯해 여러 작곡가의 노래를 불렀다. 
수록한 총 10곡(건전가요 제외) 중 이주원의 곡이 '한사람'을 비롯해 5곡으로 가장 많고 김광희가 쓴 2곡, 신귀복 곡 '얼굴', 이수만 곡 '세월이 가면', 김기웅 곡 '잃어버린 시간' 등을 담았다. 특히 양희은의 동생 양희경이 코러스로 참여한 '한사람'은 발매 당시 청년층의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로도 꾸준히 사랑받는 히트곡이 되었다. 

양희은과 이주원은 1970년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홀에서 만났다. 이주원은 김민기에 이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양희은과 함께한 음악적 파트너였다. 그가 쓴 곡 '네 꿈을 펼쳐라',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등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주원의 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은 대부분 이미 발표한 노래이거나 리메이크곡이다. 그런 점에서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특별하게 평가할 만한 점은 부족하다. 하지만 양희은이 5명의 작곡가들이 준 전혀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탁월하게 소화해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양희은이 단순한 통기타 가수를 넘어,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를 소화하는 뛰어난 보컬리스트임을 보여준다. 

 

 

네 꿈을 펼쳐라

 

1970년대 금지곡을 거론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뮤지션은 김민기다. 그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늙은 군인의 노래'는 방송이나 검열 기관이 아닌 국방부 장관이 금지한 최초의 대중가요로 기록됐다. 
이 노래를 수록한 양희은 독집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 천릿길>은 1979년 1월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했다.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양희은을 위해 김민기가 졸업 기념으로 만들어준 음반이다. 총 9곡을 수록한 이 음반은 6가지 이상의 변형된 버전이 있다. 

이 음반의 재킷에는 흰 바탕에 양희은의 이름을 음각으로 새겨 빨간색으로 찍은 도장 자국이 있다. 1979년 1월 20일 발매한 이 앨범 뒷면에 노래하는 양희은의 전신 컬러 사진을 장식한 음반은 실체를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희소한 초반이다. 재반은 뒷면의 사진을 양희은의 상반신 흑백 사진으로 교체했다. 여기까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수없이 발매한 재발매 음반은 수록곡은 물론 심지어 음반 번호와 발매한 음반사까지 바뀌는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

 


이 모든 해프닝의 중심에는 1면 4번째 트랙으로 수록한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었다. 김민기는 1974년 10월 카투사로 입대해 AFKN 방송국에 배치되어 나름대로 편안한 군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날, 투표 반대 집회에서 시위대가 그가 만든 노래들을 부르려 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느닷없이 보안부대로 잡혀간 그는 독방 영창생활 후 최전방인 보병 제12사단으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만든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 당시 퇴역을 앞둔 늙은 선임 상사가 김민기에게 막걸리 두 말을 내놓으며 자신의 30년 군인 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1976년 겨울 노병의 애환과 설움을 담아 만든 이 노래는 곧 병영에서 병영으로 구전되며 졸병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1977년 군에서 제대한 김민기는 자기 이름으로는 어떤 노래도 발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만든 '상록수'와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밤뱃놀이' 같은 곡은 서울대 미대 친구 김아영과 양희은, 한규정 등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1979년 1월 발매한 초반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는 김민기가 아닌 양희은 작사, 김아영 작곡으로 발표했다. 앨범 발매 이후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전국의 병영으로 퍼져나가는 파급력을 보였다.
“병영에서 괴상한 노래가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국방부는 ‘사기 저하’를 이유로 전 군에 <늙은 군인의 노래> 금지령을 내렸다. 국방부 장관 지정 1호 금지곡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음반사는 거금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데다 이미 판매에 호조를 보이던 음반 전량을 폐기하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금지곡 '늙은 군인의 노래'를 김지하의 곡 '금관의 예수'로 발 빠르게 교체했다. 그러나 김지하 역시 김민기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에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크레디트를 표기했다. 노래 제목도 찬송가처럼 위장한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바꿔 정치적 검열을 피하고자 했다.

노래 한 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탓에 무려 6번 이상 재발매한 이 음반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비운의 음반이 엄청나게 팔려나간 히트 앨범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 곡으로 김민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로 유명세를 떨치며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1980년대 민주화 항쟁 시기 각종 집회 현장에서 즐겨 부른 대표적인 운동가요가 됐다. 흔히 군인 대신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을 바꿔 발표했던 김지하 작시 '금관의 예수'는 일본 조총련계 단체에서 음반을 발매했을 정도로 국내외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김민기와 김지하는 한국의 반체제 인사로 알려져 한동안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 음반이 받은 모든 수난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정권 당시의 금지 문화와 상업적 환경이 어우러져 빚어낸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었다. 

양희은은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 출신 박인희, 라나에로스포 출신 은희, 최안순 그리고 이연실, 방의경과 함께 1970년대 청년 문화를 주도한 1세대 여성 포크 가수로 평가받았다. 그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항 가수의 상징이 되었다. 

“저항적 의미보다는 그저 아침이슬의 이미지를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작곡자 김민기의 덤덤한 작곡 후기와는 상관없이 1970~1980년대 민중은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이 노래가 지닌 맑고 순수한 이미지가 민주화 운동에 제격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금지곡은 대학생들의 시위 현장, 소외된 노동 현장, 각종 모임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는 생명력을 발휘했다. 

 

 

들길 따라서

 

이 시기 그녀는 당시 유신 정권에서 행하던 물리적 탄압을 받지는 않았으나 김민기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양희은 본인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김민기의 실체를 폭로하라며 협박을 받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70년대 후반 이주원과의 공동작업으로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등을 발표하면서 인기 라디오 DJ로서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 단순히 대학가 운동권에게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70년대 청년 문화의 상징이자 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의 대표 가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활동기에는 노래 부르는 것이 지겹다며 공연 활동을 접고 라디오 DJ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휴학을 반복하다가 입학한 지 8년 만에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70년대 통기타 문화를 대표하는 가수인 양희은은 정작 1979년이 돼서야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