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호(裵湖)(1942년 4월 24일 ~ 1971년 11월 7일)의 본명은 배신웅(裵信雄), 호적상 이름은 배만금 이다.
배호의 아버지는 평북 철산군 출신으로 도쿄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1930년대 말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 본토로 넘어가 운수 사업을 했고 훗날 대한광복군 제3지대의 대민 사업을 지원하는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일제 시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지만 뜻을 펴지 못한 채 타국 땅으로 피신해 운수업에, 광복군에 참여하다가 졸지에 해방을 맞아 귀국했지만 1955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배호는 부산에 있는 이모의 집에 내려가 살다가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자 부산 삼성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1956년 서울에 있는 외삼촌 김광빈의 집으로 상경하였다. 배호의 어머니는 동경 유학생이었던 남편을 맞을 정도로 신의주 선천의 미션 스쿨인 보성여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녀 집안은 당시 국내 최고의 음악가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식구들이 클래식에서 경음악, 재즈 계열의 열렬한 애호가이자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배호의 네 외삼촌 중 경찰이었던 첫째만 빼고 나머지 세 명의 외삼촌은 모두 음악으로 유명했다. 둘째 외삼촌(김광옥, 일본 무사시노 음대 졸)은 피아니스트로 첼리스트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연주 활동 후 대만의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셋째(김광수, 일본 메이지대 문예과 졸)는 바이얼리니스트로 해방후 한국의 경음악단을 주도하며 KBS 초기 악단장을 역임했다. 또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작곡하기도 했다. '김광빈 악단'을 이끈 넷째 외삼촌(김광빈,중국 제남대 졸)은 배호에게 음악 스승과 아버지 같은 존재였는데, 피아니스트, 아코디언의 명인, 작곡가에 MBC 초기 악단장을 역임했다. 이처럼 배호의 천재적 음악성은 양친의 막강한 유전적 배경에 그의 무서운 집념과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오로지 드럼을 배우겠다는 열정에 사로 잡혀 외삼촌에게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음악에의 꿈과 돈을 벌기 위해 홀로 상경한 배호는 회현동 남산 3호터널 근처의 김광빈 집에 머물고 있던 그는 가까운 곳(현 충무로 대연각 빌딩 자리)에 있던, 셋째 외삼촌(김광수)이 악단을 가지고 운영하던 "무학성" 이라는 유명한 카바레에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시작했다. 그곳은 생생한 카바레 음악과 연주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어린 배호가 그토록 동경하던 황홀한 전문 음악 세계였다. 진작 배호의 음악 천재성을 꿰뚫어 본 외삼촌 김광빈의 배려였을 것이다. 배호는 김광수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부터 본격적인 드럼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타고난 음악성과 열정으로 점심도 거르며 연습에 몰두한 배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외삼촌에 의해 1년 여의 지도와 연습으로 기본을 익히고 어느 정도 연주력을 갖춘 배호의 첫 연주 무대는 외삼촌 김광빈 악단의 아마추어 보조 드러머였다. 천부적 소질에 피나는 노력, 그리고 외삼촌의 배려로 짧은 기간에 배호는 대중음악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1958년 경 배호는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삼촌 김광수와 김광빈의 악단, 미군부대, 캬바레,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1964년 6~7인조 캄보 밴드인 <배호와 그 악단> 을 결성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김광빈 악단에서 실력을 쌓은 배호는 이제 활동 무대를 넓혔다. 타 야간 업소뿐 아니라 미8군 내의 클럽에도 진출했다. 부평의 애스컴(ASCOM)이란 곳이었다. 당시 부평에는 6.25전쟁 때 철수했다가 1951년 봄부터 본격 주둔한 미 제24군단 예하의 제24군수지원사령부가 있었는데, 부대 규모가 확대되며 애스컴시티(ASCOM City)라고도 불리었다. 배호의 애스컴 시절은 1960-61년이었다.
부평 애스컴의 영내에는 12개 미군 클럽이 있었고, 부대 밖 신촌(지금의 부평3동) 지역에는 23개 영외 클럽이 성업했다. 영내에서는 재즈와 팝 연주곡들이 대세를 이뤘고 영외에서는 컨트리와 로큰롤이 성행했다고 한다. 배호가 활동한 영내 클럽에는 한명숙, 현미, 윤항기, 신중현, 김홍탁 등의 가수들도 배호 전후 시기에 활동했다. 배호는 이곳에서 2년 정도 드러머로 활동하며 실력과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모친과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수입은 여전히 보잘 게 없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연주자들이 받는 대가라고는 물론 약간의 돈도 받았겠지만 술이나 담배 같은 물품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애스컴에서 일을 그만 둔뒤 1962년 가을 무렵 배호는 서울 시내의 유명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등 국내 무대로 본격 진출했다. 배호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살기 위해 이맘때 쯤 청량리에 단칸 셋방을 마련했다고 한다. 배호는 우선 외삼촌 김광빈이 밴드마스터로 있는 김광빈 7인조악단에 합류했다. 을지로 5가의 천지카뱌레(천지호텔 1-2층)였다. 그가 활약했던 당시의 천지호텔은 다행히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현미, 송민도 등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던 서울 장안의 유명 업소인 천지카바레에서 배호는 막간을 이용해 간간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후 배호는 김광수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던 김인배가 천지호텔 3층의 나이트클럽에서 악단을 이끌게 되자 여기에 합류했고, 악단의 쇼 MC와 가수, 드러머 등 1인 3역을 소화해 내기도 했다. 당시 서울 을지로5가에 소재했던 천지호텔 카바레는 ‘왼손잡이 드러머’, ‘핸섬보이’로 불렸던 배호를 보기 위해 늘 북적거렸다. 22세의 어린 나이에 밴드 마스터가 되었던 배호는 ‘드럼을 치면서 노래하는 멋쟁이 가수’로 유명했다. 실제로 배호는 드럼을 치다가 신명이 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며 연주를 했고, 드럼 스틱을 공중으로 던지는 묘기를 선보였다. 김광빈에 의해 배신웅이란 이름에서 배호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
1963년에 총 8곡이 수록되어 10인치 LP로 발매된 <김광빈작곡집>은 ‘불세출의 가수’로 평가받는 배호의 데뷔 음반이다. 음반의 재킷 사진과 타이틀을 장식한 작곡가 김광빈은 가수의 길로 인도했던 외삼촌이다. 이 음반에는 배호의 데뷔곡이라 할 수 있는 '굳바이', '사랑의 화살'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가수가 참여한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배호를 비롯해 김해광, 최정, 라운, 이미나 등 총 5명의 가수의 노래가 수록되었다.
배호의 데뷔곡 '굳바이'는 발표 당시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노래에 애착이 강했던 배호는 '굳바이'를 꾸준하게 취입했다. 음반 기록으로 보면 총 5번이 넘게 새롭게 녹음해 취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맘보, 차차차 등 여러 버전이 혼재한다. 이 음반에 수록된 첫 버전은 그의 트레이드인 매력적인 저음 창법이 아직 덜 영글어 풋풋한 느낌을 준다. 트럼펫을 연주한 최상룡과 김광빈의 아코디언 연주 실력은 상당한 실력을 보여준다.
배호의 10인치 데뷔 음반은 실물을 접하기 힘든 희귀 음반이다. 이 음반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의 데뷔곡은 영화 주제가 '황금의 눈', '두메산골'로 잘못 알려졌다. '황금의 눈'은 배호의 이름을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노래다. 이 곡은 배호가 식중독에 걸렸다가 급성신장염으로 악화되어 투병을 시작했을 때 발표한 노래다.
또한 경기도 양주 장흥 묘소에 첫 노래비로 탄생한 '두메산골'에 대한 비밀도 이 음반에 숨겨져 있다. '두메산골'을 최초로 부른 가수는 배호가 아니라 김해광이라는 가수라는 점이다.
배호는 1964년 톱히트레코드에서 '두메산골'을 첫 취입 했다. 생전의 김광빈은 “처음 조카에게 곡을 취입시키려 했지만 촌스럽다고 외면당한 바람에 김해광이란 무명가수에게 넘어갔다”라고 증언했다. 음반에 수록된 오리지널 버전에서 들리는 김해광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소박하다.
김광빈에게서 받은 '굳바이', '두메산골' 등의 곡은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했고 여전히 가수를 부업으로 하는 드러머 생활을 이어갔다.
'굳바이', '사랑의 화살' 등 생애 최초로 노래 취입을 한 전해에 이어 1964년은 배호에게 의미 있는 해였다.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 주던 막내 외삼촌의 그늘에서 비켜서며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배호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악단(배호와 그 악단)을 만들었다. 외삼촌과 주변의 도움으로 유흥업소가 많은 낙원동 쪽의 맥주홀 '프린스클럽'이 둥지였다. 그의 악단은 A급 풀악단 12인조에 피아노, 더블베이스, 전기기타, 배호의 드럼, 트럼팻 2개, 트롬본, 색스폰 2개의 악기 편성으로 발전했고 나이트클럽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무명가수지만 실력있는 악단 드럼연주인이자 노래하는 드러머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장안의 유명세를 탔다. 김광빈은 에스컴 분위기에 2년 동안 젖어있던 배호가 처음에 촌스럽다며 불평했던 '두메산골'을 다시 권했고, 배호는 이 곡을 포함한 여섯 곡을 불러 옴니버스 음반<두메산골>을 발매했다.
1964년 이후 약 2년 여 동안 배호는 비록 무명 가수였지만 서울의 밤무대에서 최고 인기인이었다. 간혹 <KBS위문열차> 등의 라디오 프로에도 출연했다. 그는 점심을 노상 건너 뛰어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일에 열중했다. 술,담배와도 친했다. 결국 그의 몸에 이상이 왔다. 1966년 2월, 업소 공연을 마치고 지기들과 돼지고기를 먹은 것이 체해 식중독 증세를 일으키며 급성신장염으로 발전했다. 단칸 셋방살이의 배호로선 제대로 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한약으로 일시적 효험을 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한 병세는 서서히 깊어져 갔다.
"8년(1958-1965) 가까이 점심을 거의 먹어보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업소에서 일하고 기진해 집에 들어가면 식은 땀을 둘러쓰고 의식불명의 수면상태를 계속했습니다. 그것이 아마 건강을 해친 원인 같아요" 배호가 병상에서 자주하던 말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기 8년이라면 대략 청량리의 단칸 셋방살이 시절과 겹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나갔고, 노래하는 즐거움과 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삶의 모든 것을 대체한 듯 보인다. 그 당시 밤무대 시간은 보통 오후 6시 전후의 해질녁부터 밤 11시까지로 온몸을 사용해서 연주하는 드럼은 어느 악기보다 체력 소모가 많았다.
1966년 신장염 발병 이후 배호의 음악 인생은 병마와의 긴 사투였다. 힘들어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렀고 끝내 부를 힘이 안될 땐 판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짓말 같이 병이 다 나은 것처럼 몸이 가쁜해지기도 했다. 배호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케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려는 집념을 보였다. 그 집념 속엔 그의 음악에 대한 무서운 열정과 함께 일찍 홀로 된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어린 가장의 의무감이 자리했다. 그리고 '노래 부르다 무대에서 쓰러져야 진정한 가수다' 라는 가요계의 과장된 신화도 그의 뒷목을 붙들고 있는 듯했다.
배호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함께 공연하러 다녔던 가수 정훈희는 “병이 든 상태에서 음반 취입을 하고 자기 생명이 얼마 남은 지 모르는 채로 노래를 하느라 특유의 절절하고도 애끊는 창법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데뷔 초기 배호는 팝이나 재즈풍 노래를 즐겨 불렀지만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면서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누가 울어'가 수록된 앨범 <누가 울어 / 검은 나비 / 찾아온 고향>은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 공원'이 수록된 앨범 중 가장 앞선 1966년 발매됐지만, 히트한 시기는 가장 늦다.
1966년은 배호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신장염이 그에게 처음 발병했던 해다. 그래서 그는 병상에서 이 앨범을 발표해야 했다. 재킷 앞면에는 '누가 울어', '검은 나비', '찾아온 고향' 등 세 곡의 제목 아래에 한자로 매혹의 인기가수 배호 가요특집이라고 적혀 있다.
총 12곡이 수록된 앨범 A면에는 '누가 울어'와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이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곡으로 실렸고, B면 타이틀곡은 '검은 나비'였다. 이 세 곡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누가 울어'가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배호의 대표 히트곡으로 남았다.
'누가 울어',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을 비롯해 '나그네 목동'과 '망부석', '해당화 피는 마을'까지 A면 6곡 중 5곡은 작사가 전우, 작곡가 나규호 콤비가 만들었다. B면 히트곡 '검은 나비'는 김다실 작사, 고수마 작곡의 노래다.
1966년 배호는 신장염이 발병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수로서는 절정기를 맞았다. 병상에서 발표한 이 앨범의 히트는 그가 앞으로 달리게 될 인기 가도를 예고했다. 배호는 1967년, 1968년 2년 연속 MBC 10대가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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