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렸던 가수 차중락

 

 

차중락은 1942년 3월 2일 경성부에서 8남 3녀 중 셋째아들(3남)로 태어났다. 차중락의 부친은 해방 이전에 서울시청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경성부 공무과장직 일을 하였는데 출신학교 경성 보성전문학교 마라톤 선수이자 건설,토목 관련일을 보았던 공무원 출신이었다. 해방 후 개인사업가로 변신하여 신흥인쇄소를 경영하였는데 중구로 변경되기전 성동구갑부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집안은 매우 부유하였고, 모친은 경성여자고등상업학교 시절 단거리 선수였으며, 시인 김수영은 차중락 큰이모의 아들이었으니 차중락 그와는 이종사촌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차중락과 김수영은 모두 1968년 같은 해에 타계한다.  
차중락도 부모의 건강한 운동 체질을 타고 났는데 경복고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고, 대학 시절에는 보디빌더로 1961년도 미스터 코리아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1등한 사람이 바로 2002년 간암으로 별세한 <수사반장> 의 탤런트 조경환으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후배였다. 비단 체육뿐 아니라 여러 예체능 분야들에 다재다능했던 그는 원래 장래 희망이 영화감독이었으며 회화적 감성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특히 차중락은 초등학교 시절 포스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거리마다 붙어 있을 정도여서 나중에 화가가 돼도 성공하겠다는 어른들의 칭찬도 들었다.  

차중락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4층 음악 감상실에서 팝송과 재즈 음악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동경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이 차중락의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을 듣고 가수 데뷔를 권유했다. 이에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어 영화감독 수업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1963년 대학을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그룹 키보이스 멤버였던 사촌형 차도균을 따라 1963년에 그룹 키보이스에 합류한다. 미8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는데, 이미지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가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모창하며 첫 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장안의 화제였다. 부산극장무대에 섰을때에는 극장입구는 물론 부근의 건물의 유리창이 부셔지고 담벼락이 무너졌을 정도로 인산인해의 인파들이 붐볐다고 베이스기타를 치며 노래했던 차도균이 얘기 하였다.  
오빠부대 원조는 바로 한국의 비틀즈란 닉네임을 얻었던 키보이스였다. 차중락이 활동했던 당시 가요계 남자가수 중심에는 가수 최희준, 오기택, 정원, 남진,  나훈아 등 히트곡들의 음악템포가 느릿 느릿한 슬로우락이나 트로트가 주였지만 차중락은 본디 엘비스플레슬리나 폴앵커, 냇킹콜 또는 남미 라틴곡은 물론 이태리 칸쵸네까지 소화해내는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된 건장한 체격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랑의 종말

 

 

 

솔로 가수로 독립한 차중락은 1967년 신세기레코드에서 솔로 데뷔 음반 <사랑의 종말 / 안개>을 발매했다. 이봉조 작곡집으로 발매한 이 컴필레이션 음반에는 총 10곡을 수록했으며 차장락이 부른곡은 모두 3곡이었다. 최대 히트곡은 TBC 동양방송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던 앨범의 타이틀곡 '사랑의 종말' 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곡은 신인 가수 차중락에게 1967년 TBC 동양방송의 방송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남자 최고신인가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이를 계기로 방송가요대상 트로피를 뒷면에 장식한 재반을 시상식 이후 발매했다. 

1966년 스물 네살의 가을, 그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인 애인 옥주라는 여성이 미국으로 떠나버리는 일을 겪는다. 그리고 1967년 발표된 컴필레이션 앨범 <그대는 가고 /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편곡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는 그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는 계기가 된다 이후 같은해 12월 TBC 남자 최고신인가수상의 영예를 안고 음악 인생의 정점을 내달렸다.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솔로 가수로 데뷔한 차중락은 발표하는 노래마다 연이어 히트해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차중락의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젊음도 과도한 인기의 압박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연예 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25일 유니버샬레코드에서 차중락의 신곡을 수록한 앨범 <차중락의 새노래>를 발매했다. 앨범에 수록한 12곡 모두 작곡가 여대영의 작품이다. 이 음반은 차중락의 독집이 아닌, 여가수 여이주와 함께한 스플릿 음반이다.
A면은 차중락의 '낙엽의 눈물', '뚱보가 좋아요' 등 6곡을, B면은 여이주의 '딱딱하면 싫어요' 등 6곡을 각각 수록한 것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실제로 음반을 들어보면 A면 마지막 곡 '미스터 왈가닥'은 차중락이 아닌 여이주의 노래이다. 또한 B면 마지막 곡 '남남끼리 만났어도'는 여이주가 아닌 서승일의 노래이다. 고로 이 음반은 차중락의 노래 5곡, 여이주의 노래 6곡에 서승일의 노래 1곡을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에 가깝다. 이 음반이 차중락의 유작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초반 재킷은 앞면에 차중락의 사진을, 뒷면에는 여이주의 사진을 양면에 장식해 여느 신보와 다를 바 없이 발매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자 차중락의 '낙엽의 눈물' 이 예상대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낙엽의 눈물

 

 

1968년 10월 결국 본인의 건강을 돌볼 새도 없어질 만큼 바쁜 연예 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을 동반한 뇌수막염으로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3주간 입원 끝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미 8군 공연 시절부터 열성 팬이던 "알렌"이란 여성과 모친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결국 전신마비로 11월10일 젊은 나이인 27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신보로 발매한 이 음반은 졸지에 차중락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차중락의 신보를 발매했던 신세기레코드는 갑작스러운 요절 소식을 접하자, 이 음반을 유작으로 포장한 재반을 급히 발매했다. 
초반의 재킷 타이틀 <차중락의 새노래>」는 재반에서 <마지막 남기고 간 차중락의 새노래!>로 변경했고, 타이틀곡도 '낙엽의 눈물'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바꿨다. 앨범 뒷면을 장식했던 여이주의 사진은 삭제했다. 또한 초반의 검정색 음반은 낙엽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재반을 제작해 완벽한 추모 앨범으로 둔갑시켰다. 그런데 급하게 수정 작업을 해서인지, 1면 세 번째 트랙으로 표기한 박일남의 '남남끼리 만났어도'는 실제 수록하지도 않은 노래였건만 잘못 넣었다. 그 바람에 마지막 트랙인 여이주의 '미스터 왈가닥'도 실제로는 음반에 수록했으나 재킷 뒷면에는 누락된 상태로 인쇄했다. 

 

 

그대는 가고

 

 

1968년 11월 2일 발매한 앨범 <차중락 스테레오 힛트 앨범>은 사실상 차중락의 히트곡을 모은 첫 베스트 음반이다.
그의 사망 이전에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음반은 차중락의 요절 덕분에 화제에 오르며 엄청난 판매 기록을 세운 히트 앨범이다. 당대의 인기 가수답게 이봉조, 서영은, 정민섭 등 인기 작곡가 6명이 작곡과 편곡에 참여한 총 12곡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사랑의 종말', '철없는 아내' 등 차중락의 모든 히트곡들을 망라했다. 

차도균, 김수희, 조영남 등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한 '철없는 아내' 는 1970년대 후반 박경애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또다시 히트했다. 하지만 2004년 박경애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차중락의 요절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철없는 아내'를 취입해 히트시킨 가수는 일찍 사망한다”는 슬픈 징크스를 남겼다. 

이 앨범의 초반은 음반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게이트 폴드 재킷이고, 음반 라벨은 검은색과 주황색 두 가지였다. 검은색 라벨에는 발매일자를 표기했고, 주황색 라벨에는 발매일자가 없다. 이 앨범은 1973년 신세계레코드에서 수록곡이 같은 싱글 재킷으로 재반을 발매했다. 1978년에는 현대음향에서 '한숨을 삼키며', '사랑한다고 전해주오' 2곡을 뺀 10곡만 수록한 음반을 추가 제작했다. 

 

 

철없는 아내

 

차중락의 짧은 가수 생활과 요절을 아쉬워하는 대중의 요구는 뜨거웠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1969년 1주기를 기념해 그를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매년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한 남녀 신인 가수들에게 주어졌다. 1회 낙엽상 수상자는 남자 가수 나훈아와 여자 가수 이영숙이었다. 1972년 4회 시상식에서는 남자 가수 김세환과 여자 가수 이수미가 수상했다.  
차중락 사후에 유작 앨범을 포함해 그의 노래를 수록한 레코드가 불티나게 팔렸다. 이에 1969년 그의 대표곡 제목을 따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이름 붙인, 차중락의 일대기를 담은 동명의 영화가 2편이나 기획되어 제작자들 간에 충돌을 빚었다. 이는 사후에도 여전히 뜨거웠던 그의 인기를 보여준다. 

현재 그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의 글 <낙엽의 뜻>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썼다. 그가 잠든 망우리공원 묘지엔 사후 20년이 지나도록 이름 모를 팬이 눈물로 씌어진 팬레터와 정기적 행사처럼 갖다 바친 꽂바구니는 장장 20년간 지속되었고, 극성스런 팬들의 절절한 성원은 시대적 애잔한 슬픔을 전래해 주는 전설의 가수로 남었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 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 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특히 차중락과 배호는 1942년 동갑내기이며, 같은 시기인 1963년에 데뷔하였으며, 그룹 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 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고 어린 미혼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배호와 차중락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같은 달(11월)에 사망하였다. 한국 가요계에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 또한 둘의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