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7월 13일 영화 "엘비스" 가 개봉되었습니다만 예상보다는 인기가 높지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이 영화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영화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50~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록큰롤의 황제라고 불렸을 정도로 록큰롤과는 떼놓을수 없는 가수입니다. 그래서 당시 시대를 대표했던 록큰롤은 과연 어떤 음악인지 시대별로 알아보겠습니다.
1. 로큰롤의 발단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베이비 붐(Baby Boom)이 불면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가기 시작하고 대중음악은 여전히 재즈와 가벼운 스탠다드팝 위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시기는 자연스럽게 평화가 찾아오고 점점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하에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대부분의 가정에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이 자연스럽게 보급되었고, 음악과 영화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라디오와 TV등의 매체들을 통해 대중의 호응을 얻고, 나름의 영향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트렌드의 추구로 나타난다.

당시 재즈 외에도 스탠더드 팝(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등)은 사실 성인취향의 음악이었기때문에 10대 젊은이들에게는 좀 더 자극적이고 단순하며 경쾌한 가사의 음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도시의 젊은이들은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나 하드 밥 음악을 들었다. 이는 폭력교실(원제:The Blackboard Jungle), The Wild One을 비롯한 195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나 소설에 잘 나와있다.
1950년대 중반쯤 되면 흑인음악은 이미 미국의 10대들에게 퍼질만큼 퍼진 상태였다. 이미 젊은 세대는 새로운 음악의 출현을 목말라 하고 있었고 레코드회사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10대들에게 자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못마땅한 음악일수 밖에 없었다.

1940년대 후반까지 흑인의 정서가 반영된 재즈와 블루스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백인들에게 인종주의적인 의미를 가진 레이스 뮤직(Race Music)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후, 미국 대중음악 잡지 빌보드(Billboard)의 기자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블루스 음악에 리듬을 더한 음악들을 ‘리듬 앤 블루스’라고 불렀으며, 포크와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블루스 음악을 컨트리와 결합한 로커빌리는 록큰롤의 기본적인 양식이되었다.
록큰롤은 미국 남부 흑인들의 독특한 대중음악 형태인 블루스에 강한 비트가 가미된 리듬 앤드 블루스(Rhythm & Blues : R&B)에다 미국 남서부의 카우보이·광부·농부 등 백인 육체노동자들의 통속적인 대중가요 컨트리뮤직이 적당히 뒤섞여 젊은이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대중가요 형태이다.
당시, 미국 클리브랜드에 위치한 WJW 방송국의 인기 DJ였던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Rock’ Rock’ Rock’]에서 이렇게 말했다.
“록큰롤은 많은 시냇물이 모여 만들어진 강이다. 재즈, 래그타임(ragtime), 카우보이송, 컨트리, 포크, 이 모두가 록큰롤의 강한 비트에 기여했다.”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이런 음악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틀 때마다 종종 ‘Rock and Roll’이라고 얘기했다. 사실 록큰롤이란 단어 자체는 "rocking and rolling"(배가 흔들리다)는 오래된 관용구에서 유래한 것이며,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 당시 기준으로 매우 격렬했기에 나온 표현이다.

록(Rock)의 사전적 의미는 ‘흔들다’, ‘요동시키다’, ‘춤추다’ 등이 있지만, 피아노 블루스에서 묵직하고, 리듬감 있는 베이스 연주 양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구르다’, ‘둥글다’를 뜻하는 롤(Roll)은 속어로 흑인들이 술에 취한 후 갖는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로큰롤이란 단어 자체가 지니는 동적이면서도, 육감적인 뉘앙스는 두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는다.
로큰롤의 음악적 성격은 흑인들의 우울한 ‘블루스’가 ‘리듬 앤 블루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특히, 1950년대 유행했던 로큰롤 뮤지션들이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던 컨트리와 재즈 가 이들에게 록큰롤 뮤직을 특유의 리듬감과 사운드로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이전에는 블루스와 재즈는 흑인들의 음악이며, 컨트리는 백인들의 음악 이란 생각이 당시 사람들에게 근간으로 깔려있었다. 사실 흑인과 백인이 한 울타리에서 음악을 하는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이 라디오의 전파를 타면서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무는 풍토를 조성했다.
흑인 아티스트 중에서 척 베리(Chuck Berry)는 일렉트릭 기타로 강렬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면서도 <Maybellene>, <Thirty Days> 같은 곡들에서 컨트리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백인 아티스트 빌 헤일리(Bill Haley)는 <Rock a Bet Boogie>, <Two Hound Dogs>에서 리듬 앤 블루스와 스윙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하여 연주했다.

록큰롤이란 단어를 대중화시킨 인물로 앞서 언급한 앨런 프리드를 꼽는다. 그는 미국 미시시피주 클리브랜드 소재 WJW 라디오에 심야 프로그램 ‘더 문독 하우스 록큰롤 파티(The Moondog House Rock And Roll Party)’를 새롭게 편성하고, DJ를 맡는다. 당시 앨런 프리드는 클리브랜드에 음반점 랑데부(Rendezvous)를 경영하던 리오 민츠(Leo Mintz)와 평소에 친분을 쌓아오면서, 백인 고객들의 흑인 음반 구매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위축된 소비 탓도 있었지만, 백인들의 감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컨트리 음악이 음반 시장에 주를 이룬 것도 한몫 했다. 앨런 프리드는 이런 현상에 착안하여, 백인들이 어느 정도 컨트리 음악에 싫증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의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그는 1951년 7월 11일 첫 방송부터 백인들에게 흑인 음악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파격적인 기획과 편성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이런 과감한 시도는 컨트리로만 채워지지 않던 대중들의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고, 록큰롤의 인기와 함께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라디오 DJ 이외에도 매체의 힘을 등에 업고, ‘문독 쇼(Moondog Show)’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록큰롤 전도사로서 활약해 팝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1958년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페이올라(Payola)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자신이 쌓아온 인기와 명성을 한 순간에 무너트리게 된다. 페이올라(Payola) 스캔들은 DJ가 방송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대가로 가수와 매니저들에게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된 사건으로 앨런 프리드 외에도 많은 인기 DJ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앨런 프리드는 레코드사들에게서 3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판결 난 지 5년 후 앨런 프리드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비록, 앨런 프리드의 말년은 허망했지만, 그가 록큰롤을 포함한 팝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페이올라 사건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쌓은 명성과 업적이 가려졌지만, 1986년 록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And Museum)에 그의 이름이 헌액되면서 록큰롤 아버지로서 명예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대개, 블루스의 W.C 핸디(W.C. Handy)나 컨트리의 지미 로저스(Jimmie Rodgers)처럼 장르마다 음악적으로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아티스트들에게 아버지란 호칭이 붙는다. 하지만, 앨런 프리드는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아니었음에도, 록큰롤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점을 기리는 뜻에서 사람들은 앨런 프리드를 록큰롤의 아버지로 명명한다.
2. 로큰롤의 탄생
로큰롤 이전의 시대인 50년대 초반까지도 재즈와 블루스가 대중음악인 시대였다. 하지만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재즈는 점차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았으며 블루스는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더 나아가 록큰롤에 이르기까지 기본 베이스 음악으로써 발전하였다.

블루스에서 발전한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은 우후죽순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록 기타주법을 최초로 완성시킨 척 베리라든가, 반항과 불량과 기괴함을 최초로 시도했던 리틀 리처드라든가, "폼 나는" 남자 인생을 주로 소재로 삼았던 칼 퍼킨스, 무법자 이미지로 유명했던 쟈니 캐쉬, 록큰롤 피아니스트로서 훌륭한 주법을 완성해낸 제리 리 루이스등이 모두 1954년~1955년 사이에 등장한 뮤지션들이다.
이 시기에는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서서히 로커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커빌리의 상대적으로 촌스러운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당시 10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인 속어인 "록 앤 롤"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록큰롤은 로커빌리에서 분화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시간상으로 따져보자면 빌 헤일리가 새로운 리듬 앤 블루스를 1950년대 전반 내내 선보여 오다가 1954년 전국적인 붐을 일으키게 되고, 1955년 척 베리가 기타주법을 선보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리틀 리처드가 격동적인 피아노 주법을 도입한다.
이시기에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흑인처럼 노래하는 백인 가수가 나오면 대박을 칠거라는"는 것이었다. 이미 빌 헤일리가 "백인의 흑인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미국 각지의 다양한 레코드 회사들은 이러한 아티스트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이때 선 레코드에서 발굴해낸 불세출의 아티스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다. 이때가 1955년이었다.

1955년부터 쟈니 캐쉬, 칼 퍼킨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함께 전미 투어에 나서게 되고, 이때부터 이들이 명성은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게 된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1956년을 로커빌리의 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1956년 칼 퍼킨스의 "블루 스웨이드 슈즈"와 쟈니 캐쉬의 "폴섬 프리즌 블루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 브레이크 호텔"이 발매되고, 로커빌리는 전국적인 음악이 된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인종에 관계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로커빌리가 좀 더 블루스의 부기우기 셔플리듬에 컨트리적 감성이 가미된 것이라면, 록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의 스트레이트한 리듬을 잘 계승했다. 이러한 스트레이트한 음악은 전 미국을 강타하게 되고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2편에서 계속>
'팝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이 들려주는 Scarborough fair 에 대한 이야기 (0) | 2024.03.12 |
---|---|
본격적인 팝 음악 시대를 연 로큰롤(Rock'n Roll),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part.2 (2) | 2024.03.06 |
패티 페이지(Patti Page) 1950년대 미국 스탠다드팝의 대표 디바 (0) | 2024.03.06 |
강력한 매직파워의 3인조 락큰롤머신 트라이엄프(Triumph)!! part. 4 (0) | 2023.08.06 |
강력한 매직파워의 3인조 락큰롤머신 트라이엄프(Triumph)!! part. 3 (0) | 202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