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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음악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Barclay James Harvest) 스토리

 

 

Barclay James Harvest는 멜로딕하고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과 데뷔때부터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큰 규모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한 사운도로 유명하며 Moody Blues의  'Night in White Satin'을 오마쥬해서 발표한 곡인 'Poor Man's Moody Blues'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그룹이다 

1966년 9월, 영국 랭커셔주 올드햄(Oldham)에서 결성한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Barclay James Harvest)는 올드햄 지방의 두 팀의 블루스 소울 그룹인 블루스 키퍼스(Blues Keepers)와 히트 앤 소울 앤 디 윅키드(Heat & Soul & The Wicked)가 한데 뭉치면서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B. J. H)가 결성되었다. 그 후 1967년, 이들에게 리허설과 생활을 겸할 수 있는 농장 한 채를 그 지방의 실업가에게 제공받으면서 실력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블루스 키퍼스에 재적했던 John Lees(기타, 보컬)와 Woolly Wolstenholme(키보드, 보컬), 히트 앤 소울 앤 디 윅키드에 Les Holroyd(베이스, 보컬), Melvin Pritchard(드럼) 등  4명으로 구성된 B. J. H.는 1968년에 자신들의 첫 싱글 'Early Morning/Mr. Sunshine'을 팰로폰(Parlophone) 레이블에서 발매했다. 그러나 1969년에 EMI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가, EMI에서 뉴 프로그레시브 취향의 레이블 Harvest를 개설하자, 같은 이름이 인연이 되어 그곳으로 옮겨갔다. 

밴드의 작명방법은 독특했는데, 밴드 멤버들은 종이에 단어를 하나씩 적은뒤 모자에 넣고 하나씩 꺼내서 마음에 드는 단어를 뽑았는데 결국 세개의 단어만이 남았다. 당시 가장 흔한 이름이자 그들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남자의 이름었던 James, 그들이 농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Harvest, 그리고 돈을 벌고 싶다는 의미로 Barclays 은행의 이름을 따서 Barclay였다. 이들은 이 단어를 조합해서  Barclay James Harvest라는 가장 듣기 좋은 이름으로 지었다.  

 

1집 Barclay James Harvest


1970년, 이들은 하베스트 레이블에서 첫 데뷔 앨범 <Barclay James Harvest>를 발표하고, 초기에는 목관악기, 현악기, 금관악기의 사운드를 Mellotrone으로 구현하다가 Royal Academy of Music 출신의 로버트 갓프레이(Robert Godfrey)가 지휘하는 New Symphonie Orchestra를 이끌고 영국 순회 공연을 개시했다. 이 공연으로 해서 록 뮤직 공연에서도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는 일종의 전통을 계승시키게 되었다.

 

 

Mocking Bird

 

1971년에 이들은 두 번째 자신들의 앨범 <Once Again>을 발매하며 반등을 도모했으나 히트곡 'Mocking Bird'의 작곡과 관련된 갈등으로 Robert Godfrey가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The Enid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밴드를 떠난 Robert Godfrey의 후임으로 Martyn Ford를 영업하여 같은 해 1971년 세 번째 앨범 <Other Short Stories> 를 내놓고, 이번에도 역시 오케스트라와 함께 Wheeley에서 콘서트를 벌였다. 그러나 앨범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1972년에 발표한 4집 앨범 <Baby James Harvest>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프로듀스하여 오케스트라 중심의 Progressive Rock을 벗어나 좀더 록적인 색채를 띠게되면서 영국의 대학가 학생들 사이에서부터 서서히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Medicine Man

 

1973년에는 폴리돌(Polydor) 레이블에서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Everyone Is Everbody Else>와, 연주 실황을 담은 <Barclay James Harvest Live> 등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더블 라이브 앨범은 B. J. H. 의 고전적인 싱글이라고 할 수 있는 'Mockingbird' 와 'Medicine Man' 같은 싱글이 실려 있으며, 처음으로 영국 차트 40위에 오른 앨범이 되었다. 

1975년, 미국으로 넘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녹음한 <Time Honoured Ghosts>는 새 프로듀스 일리오트 메이저(Elliot Mazer)이 제작을 맡았으며, 앨범을 발표한 뒤 영국 순회 공연에 나섰다. 이 앨범은 좀더 세련된 팝 적인 요소까지 추가된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영국 챠트 32위에 오르며 여전히 성공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1976년 발매한 앨범 <Octoberon>은 남에게 프로듀서를 의뢰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프로듀스하였으며 영국 챠트 19위를 기록했다. 

 

 

Poor Man's Moody Blues

 

그룹 결성 10년을 넘긴 이들이 1977년에 발표한 앨범 <Gone To Earth>는, 'Poor Man's Moody Blues'와 'Hymn'이 수록되어 있는 그들의 대표 앨범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앨범으로 영국챠트30위를 기록하면서 처음 유럽 전역에 걸쳐 성공적인 판매고를 보여 주었으며, 기독교적 메시지가 담긴 곡 'Hymn' 이 유럽 일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Poor Man's Moody Blues'라는 곡을 쓰게된 이유는 영국의 음악 잡지인 '사운즈(Sounds)'의 기자가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를 무디블루스의 아류 밴드로 혹평하면서 Poor Man's Moody Blues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런 표현 때문에 그룹 맴버들은 엄청 심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1976년 어느 날 밴드는 옥토베론(Octoberon) 투어 중 브리스톨의 콜스턴 홀에서 그 기자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고,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사로 인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밴드 멤버들은 그 기자의 또 한 번의 무시와 조롱으로 인해 화가 단단히 나게 되었고 이에 키보디스트인 울리 볼스텐홈은 "그 친구의 가장 나쁜 점은 우리 팬들을 계속 비난했다는 거예요. 또한 밴드를 비난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음반을 사주고 보러 온 사람들까지 모욕하는 건 지나친 행동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영국의 어떤 음악 잡지와도 아예 연락을 끊어버렸지요."라고 말했다. 
더불어 기타리스트인 존 리스(John Lees)는 특히나 화가 더 나서 이에 대한 화답으로 곡을 쓰게 되는데, 바로 기자가 자신들을 아류 밴드라고 놀렸던 대상인 즉 무디 블루스의 대표곡인 'Nights In White Satin'의 코드와 내용을 그대로 따와서 전혀 다른 노래가 되게 만들기 시작하다 하룻밤 만에 'Poor Man's Moody Blues'를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혐오 표현은 피하고 오히려 그 기자의 표현을 제목으로 곡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렇게 분위기를 비슷하게 하되 다른 음악을 만들어서 우회적으로 기자에게 항의하고  Poor Man's Moody Blues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결과론적으로 이곡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가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의 슬픔과 처절함을 노래하고 있다. 

 

hymn

 

 

1978년 6월에는 두 번째 라이브 앨범 <Live Tapes>를 내놓았고, 그 해 9월에는 스튜디오 편집 앨범 <XII>를 선보였다. 브리티쉬 록계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꾸준한 성장을 보아 온 이들은 1979년 6월에 밴드 사운드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멜로트론 연주로 유명한 볼스텐홀름(Woolly Wolstenholme)이 우울증을 겪기 시작하면서 탈퇴 의사를 밝혔다. Woolly는 B. J. H.에서 중추적인 중심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탈퇴의사는 나머지 세 명의 멤버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세 명의 잔류 멤버들은 1979년 새로운 앨범 <Eyes of The Universe>를 발매해 자신들의 건재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들은 거대한 콘서트를 계획하면서 팝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Play To The World' 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Play To The World


1980년 8월, 동서 베를린을 가로 지르는 철의 장벽에서 몇 야드 떨어진 리치스테그(Reichstag) 기념관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어, 공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추산 관객은 약 25만명이었다. 이 공연에서는 테마 송인 'Berlin'과 'Life Is For Living', 'In Memory of The Martyrs' 같은 곡들을 준비해 연주했으며, 이 실황 공연을 BBC 방송에서 기록 영화로 찍어 유럽과 미국, 호주 등 각국에서 동시에 방영되었다. 이 공연 실황은 1980년 <Berlin A Concert For The People>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81년에 이들은 또다시 독일 공연에 나서서 모두 40회의 콘서트를 열었으며, 40만의 관객 동원과 250만 파운드에 달하는 공연 수익금으로, 독일의 록 뮤직 공연 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연으로 기록되어, 흥행 성적이 뛰어난 연예인에게 수여하는 플래티늄 티켓 어워드(Platinum Ticket Award) 를 수상했다.  20세기 특유의 비극인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징하는 벽 앞에서 항거의 시위를 벌였다고 할 수 있는 베를린 공연은, 록 역사에 길이 보존될 것이다.  

 

Berlin

 

 1981년 초에 발매된 앨범인 <Tum of The Tide>는 유럽 전역에 걸쳐 대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스위스에서는 플래티늄을 기록했다. 

1987년 7월 14일 동베를린의 트렙타워 공원 에서 17만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공연했다. 이들은 동독에서 야외 콘서트를 한 최초의 서구 록 밴드였다. 이후 Barclay James Harvest는 계속해서 3인조로 운영이 되며 AOR 밴드로 완전히 정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1998년 변화된 Barclay James Harvest의 음악적 성향으로 밴드를 탈퇴했던 초기 2명의 핵심 멤버 John Lees와 Woolly Wolstenholme가 초기 프로그레시브 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Barclay James Harvest Through the Eyes of John Lees라는 밴드를 출범시켰다. 이 밴드는 2006년 John Lee's Barclay James Harvest로 밴드명을 변경하여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