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과5월은 1972년에 결성되어 1975년까지 3년 남짓 길지 않은 시간 활동하며 3장의 정규 음반을 남겼다.
초창기 국내 포크음악은 번안곡 위주로 활동했던 시기였으나 이들이 1972년 발표한 첫번째 앨범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Vol. 1>은 '4월과 5월 작품집'이라는 앨범의 부제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 불렀던 "싱어송라이터"로서 전곡이 배순진의 작품으로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었던 앨범이다. 이들이 데뷔했던 1970년대 초반은 트윈폴리오의 인기에 힘입은 투에이스,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 에보니스, 쉐그린, 원플러스원, 투코리언스, 어니언스등 포크듀오의 전성시대였으며 이들은 주로 번안곡위주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서라벌예대 작곡과 출신이었던 백순진은 당시로서는 보기힘든 창작곡위주의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작곡하여 히트했던 ‘화’ ‘바다의 여인’ ‘등불’ ‘옛사랑’등의 곡들은 당시 군사정권에 억눌렸던 젊은이의들은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또한 그는 4월과 5월 뿐만 아니라 이수미, 임희숙, 김세환, 쉐그린, 윤연선등 여러 가수들에게 곡을줬던 히트작곡가로서 80년대 초반까지 히트곡을 만들어낸 작곡가이기도 하다.

4월과5월의 리더인 백순진은 1949년 10월 9일 서울 낙원동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업을 했던 부친덕분에 부유하게 성장했던 그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어 어린 시절부터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할수 있었다. 휘문고 1학년 때 기타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그는 오승근, 홍순백(두 사람은 훗날 투에이스라는 듀엣으로 활동한다) 등과 함께 연합 그룹사운드 ‘엔젤스’를 결성해 옛 서울예식장에서 공연을 하기도하였다. 이후 음대 진학을 위해 이교숙, 나운영 교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아 창작의 물꼬를 텄다. 작곡과 진학 후 집에서 기타 레슨을 시작했는데 1971년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대학 그룹 사운드 경연 대회에서 2위를 했던 항공대 런어웨이의 기타 연주를 지도했다. 그는 런웨이의 베이시스트 이수영의 소개로 그의 동생인 이수만을 만났으며 뜻이 맞은 두 사람은 곧바로 남성 듀오 4월과5월을 결성했다.
두 사람은 “만물이 소생하고 활기가 넘치듯 가요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자”는 뜻과 숫자 ‘4’를 터부시하는 세상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으로 팀명을 만들었다. 국내 포크 듀오중에서는 최초로 순수 우리말을 팀 이름에 사용한 이들은 방송과 공연을 통해 인지도를 넓혀 나갔다.
1972년 6월,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살롱에서 시작된 ‘맷돌’ 공연에 참여했다. 이 공연은 우리노래 찾기 일환으로, 포크의 저변을 넓혔던 노래 운동이었다. 참가했던 백순진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포크 가수들은 군사 정권에 의해 억압된 자유와 저항 의식을 포크 송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숨겨진 사실 하나.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맷돌 공연때 ‘딩동댕 지난 여름’가사를 송창식과 백순진이 동시에 다른 곡을 만들어 발표를 했다.
송창식은 대중이 기억하는 히트 곡 버전으로 노래했고, 백순진은 가야금 2대와 통기타 2대가 어우러지는 실험적인 협연 양식으로서 국악 포크를 시도했다. 공식 무대에서 시도된 첫 국악 포크였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한 국악인이 ‘다시는 그런 장난 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웃어넘겼지만 음악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험적인 그의 곡은 방송을 거의 타지 못하고 송창식의 노래가 히트되었지만 지금도 그는 당시의 시도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창균은 당시 보사부장관의 아들. 맷돌 공연이 제약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당시 통기타 가수들의 대부로 알려진 DJ 이종환의 방송에 출연하면서 이종환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통기타 가수의 메카로 떠오른 쉘부르를 운영하며 음반 기획을 시작한 이종환은 새롭게 젊은 세대의 노래로 급부상한 포크송을 소개하는 새로운 시리즈 음반을 구상 중이었다. 대학생이었던 4월과5월은 이 계획의 첫 번째 주자로 내세우기에 적격이었다.
1972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되었던 4월과5월의 데뷔 앨범은 인기 DJ 이종환이 기획한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시리즈 음반의 첫 음반으로 타이틀곡인 '내가 싫어하는 여자', '화(和)' 등 이 수록되었으며 B면의 5곡이 쉐그린, 홍민, 챰스, 이수미, 최병결과 안혜경 등 다른 가수들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수록곡 중 타이틀곡 '내가 싫어하는 여자'와 연작 개념인 여성 듀엣 챰스의 '내가 싫어하는 남자'는 음반 발매 이후 화제를 모았다. ‘4월과5월 작품집’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이들의 데뷔 앨범에 수록한 전곡은 작사, 작곡, 노래는 물론 편곡까지 도맡으며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준 백순진의 창작곡이었다. 대표적인 히트곡 '화'는 백순진이 6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 "화"를 위한 연가였으며 '화'는 훗날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애칭이기도 하다. 이곡의 인트로에서 들려준 기타 리프는 배순진의 연주로 당시로서는 매우 매력적이며 멋진 기타 리프였다. 이수만은 '욕심없는 마음', '절망하지 마라', '작은 섬' 에서 메인 보컬로 노래를 했다.
'내가 싫어하는 여자'와 쉐그린의 '어떤 말씀'도 군사 정권의 장발 단속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를 담은 가사 내용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여자'는 "가사 퇴폐 · 치졸", '어떤 말씀'은 "가사 불건전 · 저항적"이 금지 이유였다.
데뷔 앨범에 수록한 노래들은 오리지널 멤버인 백순진과 이수만의 방송에 출연당시 음원으로 제작이 되었다. 그러나 앨범 재킷 사진은 이수만이 아닌 김태풍으로 교체가 되었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늑막염에 걸려 활동을 일시 중단한 이수만은 팀을 하차할 수 밖에 없었다. 이수만의 중도 하차로 고민에 빠진 백순진은 낙원상가 악기점에서 소개해준 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3학년생 김태풍으로 멤버를 교체했다. 바뀐 멤버로 다시 정식 녹음을 하길 원했지만 제작비 문제로 재녹음은 무산됐다. 그래서 노래는 이수만 버전으로 수록하고 멤버 사진만 김태풍으로 바꿔 발매한 것이다. 김태풍은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영창피아노를 설립했고 집안에서 유니버설레코드도 운영했으며 그의 누나는 한국 최초의 음악 박사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고한다.
이듬해인 1973년 유니버어살 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 <4월과5월 vol.2 사랑의 의지>는 이들의 두 번째 앨범으로 ‘백순진 작편곡집’ 부제가 붙어 있으며 이 앨범에는 ‘사랑의 의지’, ‘어린시절’, ‘필요한 것’, ‘꽃 한송이’, ‘고궁 연못’ 등 총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은 기존의 포크송에서 벗어나 다양하며 실험적인 사운드와 포크록사운드까지 지향했던 리더 백순진의 첫 음악적 도전이다. 타이틀곡 '사랑의 의지'가 크게 히트했는데, 이 노래는 당대의 인기 가수 이수미가 이들보다 앞선 1972년에 이미 발표해 그녀의 노래로도 더 많이 알려졌다.
그 외의 수록곡들은 대중적으로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통기타 연주가 대부분이었던 1970년대 포크송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서정적인 노래들 중에서 '어린시절', '필요한 것', '꽃 한송이', '고궁 연못', '님이란 무엇일까', '우리들의 사랑', '젊음', '사랑은 주는 것' 등 여러 곡이 이 앨범에만 수록한 희귀 버전이다.
1973년 이화여대 강당에서 동료 가수 10여명과 불우 이웃 돕기 공연을 열었던 백순진은 내쉬빌, 르네상스, 르시랑스 등에서 노래와 사회를 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다. 73년 12월, 백순진, 김태풍과 고 김정호가 한 TV프로에 출연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김태풍이 탈퇴를 하고 김정호가 새로운 멤버가 되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당시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김정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타 하나를 메고 비원 옆 꽃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던 처지였다. 백순진은 동생의 소개로 김정호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 단번에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이미 작곡가로서의 김정호의 재능을 인정한 지구레코드는 백순진을 통해 ‘4월과 5월’의 전속을 추진했다.
하지만 ‘작곡가로도 전속하라’는 조항에 김정호가 반발했다. 간섭이 싫었던 김정호는 이종환의 주선으로 유니버샬과 전속 계약을 맺고 2달 만에 팀을 탈퇴했다. 이에 김태풍이 재 합류하면서 이들은 음악적인 변화를 꾀했다.
그건 바로 듀오 활동을 유지하면서 포크 록 그룹 ‘들개들’을 결성하여 활동했던 것이다. 라인 업은 서울의대 본과 2학년 민병진이 키보드, 연세대 불문과 3학년 김찬이 드럼, 백순진이 리드 기타, 김태풍은 세컨 기타, 이수만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멤버들은 리더 백순진의 행촌동 집 지하실에 모여 연습을 했다. 당시 개인 녹음실까지 있었던 백순진의 집은 포크 가수들의 아지트였다. 창립 기념공연은 1974년 7월 13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지만 ‘들개들’은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다.
1974년에 3집 <4월과 5월>을 발표 했는데 따라 부르기 쉽고 서정적인 멜로디의 노래들은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총 10곡을 수록한 이 앨범의 최대 히트곡은 B면 첫 번째 트랙 '등불'로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발라드 스타일의 이 노래는 중반 이후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예전의 통기타 음악과 전혀 다른, 묵직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사운드를 구사했다. 백순진은 한 인터뷰에서 “팀파니도 들어가면서 더 무겁게 갔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회고했다.
이어지는 포크송 '옛사랑'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이 곡은 1973년 2집이자 첫 독집 타이틀곡으로 이미 발표했던 곡이지만, 이 음반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전주로 오리지널 버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특히 강근식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는 불을 뿜는 듯 강렬하다. 대작의 기운이 넘치게 편곡한 이 곡은 백순진 음악이 절정기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듬해인 1975년 1월 김태풍이 가수로서의 회의를 느끼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팀이 해체를 하게 되었다. 백순진은 1974년 말, 오토프러덕션을 만들어 제작자로 변신한후 오정선, 영주와 은주, 서미숙, 박형철등을 영입하였다.
3집 앨범의 커버 사진과 동일한 멤버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 베스트 음반이 1976년 3월과 6월에 연이어 재발매했다.
초반과 재반에서 겹치는 노래는 '사랑의 의지', '우리들 세상' 단 2곡뿐이다. 베스트 음반 형식으로 제작한 재반에는 1972년의 데뷔 음반과 1973년의 첫 독집에서 히트한 '바다의 여인', '옛사랑', '님의 노래', '욕심없는 마음'을 총망라했다.
1979년 백순진은 가수 이영식, 어정식의 듀엣 "하야로비"를 영입하게 되었는데 이 하야로비가 후에 4월과 5월로 팀명을 바꾸고 ‘장미’를 발표하며 동양방송 차트 1위를 기록하는등 히트곡을 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인하여 팀을 해체하게 되었다. 작곡, 작사, 편곡, 판매, 홍보 등 일체를 혼자 도맡았던 백순진은 사기를 당해 부도를 맞으면서 건강이 나빠져 3개월간 입원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그는 퇴원 후에는 부친의 노스웨스트항공 총대리점인 샤프항공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유나이티드 항공 총 대리점인 ㈜샤프의 부회장으로 있으며 코알라프로덕션의 고문으로 심수봉의 뉴욕 공연을 주선하며 음악 비즈니스를 재개하기도 했다.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양희은 등과 동시대 인물인 이들은 대다수 당대 포크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정신, 저항정신 등 민중친화적인 포크송, 지적인 음악을 구사함으로써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듀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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