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등장한 6인조 록 그룹 영사운드는 대표곡인 ‘등불’과 ‘달무리’로 오랜 세월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한국 록의 불멸의 히트 넘버로 자리 잡고 있다. 외국곡 연주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 영사운드는 록 발라드 계열의 창작곡을 위주로 활동을 했던 중요 그룹이다.
영사운드는 리더였던 안치행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최헌, 윤수일, 주현미, 문희옥, 박남정 등의 가수들을 스타로 키워낸 음반 제작자 겸 작곡가이기도하다.
안치행은 1942년 전라남도 진도 옆의 작은 섬 가사도에서 태어났는데 이리농고 2학년 때 황해악극단이 단원 실습생을 모집하자, 그는 대범하게도 집에서 운영했던 제과점에서 돈을 훔쳐 악극단을 따라 가출하기도 했을 정도로 문제아였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들은 '타향살이'의 가락에 마음을 빼앗겨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이후 7개월간 기타를 끌어안고 잘 정도로 연습을 하자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방 하나를 얻어 악기점에서 기타를 빌려다 기타 학원을 차렸다. 그는 이 때부터 타고난 사업적 수완을 발휘했다. 전북 이리, 군산을 비롯해 각 읍면에서 노래 자랑 대회를 개최하며 다녔다. 대회에 참가하는 가수들에게 참가비로 5백환을 받고 입상을 하면 기타 한대를 주는 식이었다. 추석때는 읍대항 노래 자랑 대회를 열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학비를 모아 김제에 천막 극장을 차린 뒤 영화 <홀쭉이와 뚱뚱이>의 필름을 걸어 상영했지만 쫄딱 망하기도 했다.
1966년 기타를 정식으로 배워볼 생각에 서울 을지로에 있던 이인성음악학원을 찾아갔다. 그는 테스트를 받은 후 "서영춘과 그 일행"이 활약하던 악극단 "20세기 컨츄리 쇼"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악극단 기타리스트가 되어 태평, 노벨극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스타 뒤에 가려져 기타만 치는 현실이 싫어 그만 두고 고교생 최헌, 펄씨스터즈 자매가 노래를 배우고 있던 이인성학원의 조교가 되었다.
별명이 ‘조로’인 친구가 록 밴드 결성을 제안하자, 안치행은 베이스 기타를 맡은 오덕기와 함께 3인조로 서울 남산 팔각정 근처에 방을 얻어 2달간 연습했다. 보컬 조로가 그만두자 드러머와 히파이브 출신의 보컬 유영춘, 오르간 장현종 3명을 영입, 5인조 록 밴드 "실버코인스"를 결성했다.
1967년 미8군 쇼 업체 화양프로덕션과 9만 원에 계약한 실버코인즈는 인기 가수 김계자와 무용수를 영입해 45분짜리 패키지 쇼 팀을 구성하고 전국 미군 기지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당시 안치행은 기타 솔로 패키지 쇼에서 터키행진곡을 연주해 미군들에게 “웨스 몽고메리 스타일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불리며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1967년 12월 30일 동두천 캠프 송년회 합동 공연 후 서울로 귀경길에 그들이 타고 있던 미군 트럭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음주운전을 한 미군 운전병이 눈길에 차단기를 들이받아 미군트럭이 전복을 한 것이다. 안치행과 유영춘은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베이스 오덕기는 손을, 드럼 김용호는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미군은 보상비로 450만원과 별도로 악기보상까지 해줬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덕분에 악기를 국산에서 외산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6개월이라는 장기 유급휴가를 해야 했기에 팀은 해체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5년 정도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1970년 조선호텔 옥상에 생긴 나이트클럽 출연이 성사되자, 밴드 이름을 젊은 소리란 뜻의 "영사운드"로 변경했다. 영사운드는 리드 기타 안치행, 보컬 유영춘, 키보드 장현종, 올갠 장성현, 그리고 탈퇴한 베이스 기타 오덕기를 대신해 장대현과 드럼 박동수를 영입하면서 6인조 밴드가 되었다.
밴드 영사운드의 대표곡 '달무리'는 당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던 TBC 동양방송의 음악프로그램 <신가요 박람회>의 입상곡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응모로 당선된 작사가 김주명의 가사에 작곡가 3명이 경합해 입상곡을 결정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1971년 라이브클럽 포시즌에서 사회자로 활동한 박광희 동양방송 PD의 소개로, 안치행은 자신이 최초로 작곡한 데뷔곡 '달무리'로 <신가요 박람회>에 출연했다. 이후 안치행은 이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고향의 벗', '등불'을 연이어 작곡했다. 1972년에는 명동장 연예 상무 이종범과 인연을 맺고 서울 명동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생음악 살롱 포시즌 양쪽을 주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방송과 클럽 무대를 통해 청년층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들에게 데뷔 음반을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1972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밴드 영사운드의 데뷔 음반 <영싸운드 히트 퍼레이드>를 발매했다. 라틴 계열의 조용한 음악을 추구했던 이들의 노래는 앨범 발매 이후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수록곡들은 TBC 동양방송의 음악 프로그램 <신가요 박람회>에서 이미 알려진 밴드 영사운드의 리더 안치행의 창작곡 5곡, 당시 이들이 라이브클럽에서 즐겨 부른 팝송 레퍼토리 4곡, 그리고 작곡가 정풍송의 '파도의 추억'까지 총 10곡으로 구성했다.
구성진 느낌의 잔잔한 수록곡 중 타이틀곡 '달무리'와 '등불' 이 청년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보였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TBC 신인 여가수상을 수상했던 인기 가수 장미리와 함께 스플릿 앨범을 발매했다. 또한 쇼 연출의 귀재였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한 동양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 밴드가 되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이 프로그램의 MC는 포크가수 서유석과 양희은이었다.
영사운드의 대표곡 '등불'과 '달무리'는 1970년대에 대중적으로 가장 각광받은 밴드 음악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영사운드는 외국 곡 연주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 록 발라드 계열의 창작 레퍼토리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들은 딕패밀리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1970년대 밴드였다.
1집을 성공시킨 밴드 영사운드는 1974년 플루트 주자 왕준기가 가세하면서 한층 풍성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밴드 영사운드의 히트곡 '등불'과 '달무리'는 7080세대의 낭만과 향수를 자극하는 히트 곡들이다. 1972년 1집부터 인기를 얻었던 이들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 밴드가 된 것은 모든 히트곡을 총집결한 베스트 음반 격인 3집 음반부터였다. 다운타운에서 인기 밴드로 성장한 이들은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과 만나 2집에 이어 1975년 발매한 3집으로 인기 정점을 찍었다.
서라벌레코드에서 1975년 발매한 3집 음반은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멤버들의 캐리커처를 담은 재킷으로 유명하다. 베스트 앨범 형식으로 앨범에 수록한 총 12곡(군가 포함)은 이미 히트했던 '등불', '달무리' 등과 신곡 '대학가의 찻집'등을 섞어 구성했다. 이 앨범을 계기로 기존 히트곡들도 비로소 세대를 초월해 애창되는 진정한 히트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음반은 당대 젊은이라면 1장쯤 소장했던 밀리언셀러였는데 이는 주류 음악이 아닌 장르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밴드 앨범으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초반 발매 후 10년이 지난 1984년에도 이 음반의 인기는 여전해서 3판까지 제작했다. 이 앨범은 한국 록 밴드 역사에 남을 대형 히트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앨범이 한창 판매에 호조를 보였던 1975년 9월 멤버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치행과 박동수, 김희조는 그대로 밴드에 남았고 유영춘, 장성현, 왕준기는 밴드 여섯마당을 결성해 독립했다.
당시는 대마초사건으로 공윤의 곡 심사가 강화되어 금지곡이 남발되던 침체기였다. 1967년 창단 이래 끈끈한 우애를 다져 왔던 영사운드가 양분되자, 록 밴드계는 체질 개선 바람에 휩싸였다. 이미 정성조와 메신저스는 멤버를 교체했고, 검은나비, 조갑출과 25시 등도 멤버 교체의 진통을 겪었다. 결국 1970년부터 활동을 이어온 영사운드도 활동을 중단했다.
영사운드 리더 안치행은 팀 해체 후 퍼시픽호텔의 무겐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어느 날 보사부 직원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퍼시픽호텔에 숨어 있던 이태현을 잡으러 왔는데 그때 킹박이 찾아와 이태현에게 월급 6만원 중 3만 원을 집어던지듯 주었다. 그 사건에 자존심이 상한 안치행은 당시 500만 원을 투자해 더멘과 검은나비를 거친 김기표, 이태현과 함께 안타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밴드 출신 음악인이 창립한 최초의 프로덕션 탄생이었다. 최헌과 호랑나비의 음반은 제작자로 변신한 안치행의 첫 작품이었다.
안치행이 제작자겸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가수 최헌과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내가 신설동에 있는 음악학원에서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고등학생이던 최헌이 노래를 배우러 와서 처음 만났어요”. 안치행은 최헌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나중에 보니 학원에서 눈여겨보았던 최헌이 ‘히식스’, ‘검은나비’로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공교롭게도 내 친구 이태현이 그들의 매니저를 하고 있었는데 내게 이들이 연주할 일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부탁을 받은 안치행은 당시 자신이 일하고 있던 ‘무겐’이라는 나이트 클럽을 소개해 주었고 최헌은 이곳에서 ‘최헌과 호랑나비’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최헌의 가능성을 보고 직접 음반 제작을 결심하게 되었다고한다. 최헌 음반을 제작하기로 마음먹은 안치행은 하루라도 빨리 만들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우선 최헌에게 줄 노래가 필요했다. 기왕이면 최고의 작곡가를 섭외하기로 하고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작곡가 정풍송(조용필 ‘허공’, 조영남의 ‘옛 생각’ 등 작곡), 안길웅(김추자 ‘빗속을 거닐며’, ‘첫사랑 눈물’ 등 작곡)에게 곡을 부탁했다. 하지만 워낙 인기 있던 작곡가라서 짬이 안 났는지, 관심이 없었는지 생각처럼 곡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직접 만든 곡이 그 유명한 ‘오동잎’, ‘세월’ 등 이었다. 후에 김기표의 편곡을 거친 이 곡들은 큰 히트를 하면서 작곡가 안치행의 시대가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이후 안치행은 ‘구름 나그네’, ‘앵두’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최헌을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창립자 안치행 외에도 작곡과 편곡은 김기표, 홍보는 이태현이 담당하는 등 안타기획을 구성했던 주축 멤버들은 더멘이나 검은나비 출신의 국내 밴드 1세대 뮤지션들이었다. 이러한 제작 시스템 아래에서 안타기획은 최헌과 윤수일이라는 스타를 만들어내며 소위 ‘트로트 고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또한 김트리오, 희자매와 같은 스타를 발굴하며 레이블 이름처럼 연속적인 안타를 기록, 1970년대 중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70년대 안타기획의 성공 비결은 복고풍의 트로트 취향을 공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안타기획의 이름으로 발표된 음반은 아니지만, 1976년 조용필과 록밴드 영사운드의 스플릿 음반은 안타프로덕션의 등장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앨범의 1면은 조용필, 2면은 영사운드의 노래들로 구성됐는데, 조용필이 부른 곡은 모두 안치행이 편곡을 담당했다. 1972년 조용필의 첫 독집에 트로트 버전으로 발표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재수록했는데 이 노래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조용필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황선우가 만든 곡으로 처음엔 ‘돌아와요 충무항에(1970)’ , ’돌아와요 해운대에’ 등 개작을 거쳐 밤무대(고고클럽) 등에서 불리던 곡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발매된 조용필의 첫 독집앨범에도 수록된 곡이었다. 이때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 ‘조갑출과 25시’에서 보컬로 활동했던 조용필도 가끔 부르던 곡이었다. 군제대하고 쉬고 있던 조용필의 재능이 아까웠던 조갑출은 조용필의 앨범을 내기로 했다. 안치행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편곡을 부탁을 받았다. 편곡을 끝내고 보니 앨범에 채울 신곡이 부족했던 안치행은 ‘영사운드의 다른 곡들을 뒷면에 채우게되었고 결국 스플릿 앨범으로 만들게 되었다.
당시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고국 방문이 허용되던 시기였었는데 가사를 ‘그리운 내님아’를 ‘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꾸어 교포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부산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앨범은 1980년까지 단일 앨범 최초로 100만 장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1978년은 그야말로 안타 기획 소속 가수들이 가요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최헌이 MBC, TBC에서 가수왕을, 윤수일은 신인가수상을, 희자매가 중창부문상을 휩쓴 데다 안치행 본인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작곡상을 수상하는 경사를 맞은 해였다.
이렇게 안치행은 기획사로서 승승장구하는 사이 밴드를 뛰쳐나간 유영춘 등은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안치행은 이들을 설득해서 유영춘을 리더로 한 영사운드를 재건하게 하는데, 이때부터 그룹명이 유영춘과 영사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영춘과 영사운드라는 밴드명으로 1979년 10월에 발표한 앨범이 있는데, 이 앨범은 번안곡인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를 타이틀로 하고 ‘아름다운 계절’, ‘상록수’ 등의 신곡과 '등불'과 ‘옛 추억’ 등 기존 히트곡을 적절히 섞어서 발매한 앨범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번안 히트곡으로서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는 이때 크게 인기를 모은 곡이다.
원래 발표는 1972년 영사운드 데뷔 앨범에 수록한 곡이었지만 크게 사랑받은 것은 이시기여서 뒤늦게 인기를 얻었다.

안타기획의 추진력은 1980년대를 넘어서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시대와 음악이 바뀐 만큼 안타기획도 변화가 필연적이었다.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면서도 트로트는 언제나 안타기획 발표 작품의 핵심 소재가 됐다. PD 메이커 전성시대를 몰고 온 안타기획의 변화는 1981년 솔개트리오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데뷔곡도 록, 트로트를 비롯해 레게, 리듬 앤드 블루스, 컨트리, 포크, 프로그레시브 등 모든 가요 형식을 망라했다. 분명한 것은 다양한 음악을 수용하며 변화를 시도했던 안타기획 작품의 근간에는 트로트 장르가 꾸준하게 유지된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규석, 박남정, 문희옥에 이르기까지 유효하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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