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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음악

1960년대 팝음악에 대하여 3부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은 스키플과 트래디셔널 재즈 정도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스키플(Skiffle)은 1950년대 초 영국에서 유행한 음악 장르로 재즈ㆍ블루스ㆍ포크ㆍ민속 음악의 요소를 더한 대중음악 장르이다.

영국 리버풀 출신의 10대 소년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만나 쿼리맨이란 스키플 밴드를 결성한 그들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개러지밴드에 불과했다. 쿼리맨의 음악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던 수준이었으나 이들은 조지 해리슨을 1958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밴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와 독일 등의 소규모 클럽공연을 통해 스키플밴드에서 로큰롤밴드로 서서히 탈바꿈하게 되는데 이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연하다는 뜻이다. 1962년 그들보다 더 유명했던 드러머 링고 스타를 영입해 실버 비틀즈란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비틀즈란 이름으로 본격적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새로운 매니저로 오면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Love Me Do'(1962)로 대성공을 거둔 후 2년 동안 비틀즈는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Can't Buy Me Love'와 같은 신선하고 경쾌한 곡들을 싱글판으로 선보여 영국의 음반순위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비틀즈 열풍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들의 데뷔앨범 [Please Please Me]는 1963년 영국에서 6달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했다. 미국을 처음 공략한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1964년 초 발매 2주만에 미국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미국에서는 1964년 1/4분기 팝 시장 총 앨범 판매량의 60퍼센트를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1964년 2월엔 미국 JFK 공항에 도착하는 비틀즈의 모습과 그들이 맞이하는 열성 팬들의 모습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비틀즈는 향후 10년 사이에 가장 순식간에 널리 광고된 아티스트가 되었다.

 

 

 

1965년에는 영국의 수상 해럴드 윌슨이 비틀즈에게 MBE(Member of British Empire, 대영제국국민훈장)를 수여하였다. 당시 ‘비틀매니아(Beatlemania)’로 불릴 만큼 비틀즈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비틀매니아는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열광적이었다. 1966년 비틀즈의 열풍이 몰고 온 병적인 흥분상태가 극도로 치닫게 되자 결국 비틀즈는 순회공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틀즈는 그룹으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소울(soul)풍의 ‘Got to Get You into My Life'에서 ’When I'm Sixty Four'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1967년에 비틀즈는 그들의 최고 명작중 하나인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하였다. 이 음반에는 노래 한 곡 한 곡이 다음 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레코드재킷에는 가사 내용이 인쇄되었다. 비틀즈는 마약과 신비주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신곡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인텔리 계층을 사로잡았으며 팝음악이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The Beatles - When I'm Sixty Four

 

 

비틀즈는 척 베리와 버디 홀리, 리틀 리처드의 로큰롤 패턴 그리고 흑인 두웝 그룹들과 에벌리 브라더스, 비치 보이스의 화음을 모범으로 삼았다. 비틀즈는 그러나 거기에 훨씬 더 강력하고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코드 역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즈는 그 단순한 코드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여기에 더해진 게 멤버들의 화음과 코러스였다. 보컬 솔로가 이끌어나가고 그 뒤에 멋진 하모니를 동반한 백 보컬과 코러스가 등장한다. 멤버들의 완벽한 조화가 비틀즈의 특장점이었다. 그들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과 행복해 보이는 텍스트들은 10대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 세대들까지도 로큰롤 그룹을 껴안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스스로 가사와 곡조를 만들 줄 알았다. 그들의 자작곡 능력이 동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월등했기 때문에 그 같은 성공을 가능케 했다.

 

1969년 1월 30일 애플 레코드 사 옥상에서 진행한 마지막 라이브 공연 중

 

 

비틀즈의 성공에 힘입어 많은 영국 밴드들이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른바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 시작된 것이다. 그 중 선봉은 단연 롤링 스톤즈와 머시 비트(Mersey Beat: '머시'는 리버풀에 흐르는 강) 그룹들.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 출신이었던 이들은 실제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주도하에 미국에 진출했다.

 

제리 앤 더 피스 메이커(Gerry & The Pacemakers), 피터 앤 고든(Peter & Gordon), 여성 가수 실라 블랙(Cilla Black) 등이 바로 엡스타인 사단의 뮤지션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피터 앤 고든의 넘버원 히트곡 'World Without Love'은 폴 매카트니의 작품인데, 과연 듀오의 멤버 피터 애셔는 당시 매카트니의 연인이던 제인 애셔의 오빠였다.

 

Searchers - Love Portion No.9

 

그밖에도 서처스(Searchers), 스윙잉 블루 진스(Swinging Blue Jeans), 홀리스(Hollies), 허먼스 허미츠(Herman's Hermits), 데이브 클락 파이브 등의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서 록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국내 영화 [태양은 없다]에 쓰인 'Love Portion No.9'으로 낯익은 서처스는 곧 미국에서 막 태동할 포크 록과도 비슷한 기타 사운드를 들려줬다. 'Needles & Pins' 같은 곡이 그러한 예. 스윙잉 블루 진스는 'Hippy Hippy Shake', 홀리스는 'Bus Stop',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한편 버디 홀리의 추종자들이었던 그룹 홀리스의 그래함 내시(Graham Nash)는 나중 포크 록 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의 멤버가 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들, 특히 머시 비트 그룹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미국의 포크 록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틀즈, 홀리스, 서처스 등 머시 비트 계열의 청명한 기타 리프는 밥 딜런을 비롯한 여러 포크 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으며, 또한 매우 서정적인 멜로디로 서구 팝 음악계에 음악적 낭만성을 제공했다.

 


The Rolling Stones

 

롤링 스톤스는 1962년에 미크 재거(1943년생)가 조직하였다. 재거는 런던대학의 경제학부를 중퇴하고, 곧이어 키스 리처드(나중에 리처즈, 1943년생), 브라이언 존스(1942-69), 빌 위먼(윌리엄 퍼크스, 1936년생), 찰리 와츠(1941년생)와 합류하였다. 한때 비틀즈의 PR을 담당했던 앤드류 루그 올드햄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비틀즈의 음악세계나 그 당시 기타 그룹사운드가 추구했던 보수적인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섹시하며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비틀즈가 써준 곡이자 밴드의 2번째 싱글 곡 "I Wanna Be Your Man"으로, 첫 히트를 기록한 롤링 스톤즈는 이후 척 베리의 "Come On", 버디 홀리의 곡 "Not Fade Away" 두 곡을 커버하여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올리면서, 영국 최고의 인기밴드 중 하나가 된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당시 절정을 달리던 비틀즈와는 상반되는 음악스타일(깔끔한 앵글로색슨적 느낌 - 흑인적인 거친 느낌)과 이미지(터프, 반항, 퇴폐) 역시 인기의 커다란 요인이었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후에 롤링 스톤스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The Rolling Stones - (I Can't Get No) Satisfaction

 

그당시 대부분 팝 그룹들이 언론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반면에 롤링스톤스는 상업적 성공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저버리는 일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기성세대들은 심한 거부감을 보였지만, 신세대 팬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비틀즈처럼 롤링스톤스도 작사,작곡을 했다. 대개 재거가 노랫말을 짓고 리처드가 곡을 붙였다.

1965년에는 롤링스톤스는 ‘(I Can't Get No) Satisfaction'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단번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세계를 뒤흔든 기타리프'라는 평가를 들으며 이후 롤링 스톤스의 대표곡이 된다.

 

 

The Rolling Stones - Paint It Black

 

1966년 롤링 스톤스는 전곡을 모두 자작곡으로 채운 앨범 [Aftermath]를 발표했고 앨범이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Aftermath는 1987년 상영된 영화 풀 메탈 재킷과 미국 드라마인 머나먼 정글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어 유명한 곡이된 "Paint It Black'', 마림바가 주도하는 발랄한 멜로디와는 달리 여성 차별로 얼룩진 가사를 가진 "Under My Thumb", 덜시머의 음색이 매력적인 발라드 "Lady Jane" 등의 명곡으로 채워져있다.

 

1968년에는 ’Jumpin' Jack Flash'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두 곡을 통해 롤링스톤스는 절정에 달한 힘과 음악성으로 이국적인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하며 비틀즈의 아성에 비교할수 있는 유일한 록밴드라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The Rolling Stones - Jumpin’ Jack Flash

 

 

1968년 "Sympathy for the Devil"과 록큰롤 넘버 "Street Fighting Man"이 수록된 [Beggars Banquet], 1969년 말도 안되는 세련된 사운드와 극적인 구성의 명곡 중의 명곡 Gimme Shelter와 롤링 스톤스의 곡 중 가장 깊이있는 곡이라 평가받는 7분짜리 대곡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숨겨진 명곡이라 평가받는 "Monkey Man"이 수록된 1969년 작 [Let It Bleed]등의 명반을 발표한다.

 

 

1960년대 초 런던에서는 미국 흑인과 카리브 흑인의 주요 음악스타일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소울과 자메이카 스카(SKA)가 인기를 누렸다. 이 음악스타일은 강하고 규칙적인 박자가 특징으로 댄스와 잘 어울렸다. 당시에는 라이브로 댄스뮤직을 연주할 수 있는 밴드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클럽들은 레코드 또는 ‘디스크’를 이용하여 음악을 틀었다. 이것이 ‘디스코텍’이 되었다. 1964년에 런던의 워두어 스트리트에 최초의 라 디스코텍(La Discotheque)이 문을 열었다.

당시유행했던 ‘모드(mods)'로 일컫는 패션에 민감한 런던청년들은 한동안 독특한 스타일을 입고 다녔다. 전형적인 남성 복장으로는 단추 3개 달린 가벼운 유럽 정장, 구멍 2개의 재킷, 좁은 바지, 옷깃에 단추가 달린 셔츠, 좁은 넥타이, 자크식 부츠, 단발, 방한용 녹색 스키복(‘파카’) 등이 유행했다. 여성 스타일로는 트위기, 진 쉬림톤, 매리 퀀트와 같은 최고의 모델들이 유행시킨 미니 스커트, 밝고 진한 화장, 진한 마스카라, 단발 직모 등이 특징이었다.

모드족

 

1964년경 런던의 모드족들은 스쿠터를 타고 브라이튼으로 갔다. 브라이튼은 ‘로커’ 그룹들이 경연을 벌이는 장소로 유명해진 해변휴양지였다. ‘로커’들은 노동자계급문화를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특징은 오토바이, 가죽재킷, 데님이 달린 청바지, 장발이었다. 미국 영화 ‘와일드 원’(The Wild One, 1953)과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선보인 1950년대 초반의 폭주족들을 흉내낸 것이었다. 모드 스타일은 후(Who)와 스몰 페이스의 인기에 힘입어 점점 큰 영향력을 갖게되면서 록음악 확산에 일조를 하였다.

‘I Can't Explain'(1965)은 모드족의 상징이라고 불리우는 The Who의 최초 히트곡이다. 로저 달트리의 강렬한 음정, 피트 타운스헨드의 파워풀한 기타사운드, 존 엔트휘슬의 제트엔진 베이스, 키스 문의 우울한 색조를 띤 드럼을 통해 음악적 자신감과 기존질서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이들은 오만하고 예측불허의 행동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공연이 끝나면 자신들의 악기를 때려 부셔 팬들을 즐겁게 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첫 앨범 ’My Generation'(1965)은 구세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신세대에 관한 난폭한 음악적 선언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The Who - I Can't Explain

 

 

1966년, 2집 [A Quick One] 발표 이후 더 후는 기존의 음악스타일에서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선보인다. 키스 문의 드럼 사운드가 돋보이는 "Happy Jack"이나,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 라인과 묵직한 그로울링이 돋보이는 "Boris The Spider"가 싱글로 발매된다. 당시 수많은 비트 밴드들이 명멸하던 시기에 이 앨범으로 인해 더 후는 록스타의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된다.

이후 1967년, 여러 기발한 시도를 하던 타 밴드들의 영향을 받아 여러 시도를 하던 끝에 3집 [The Who Sell Out]이 발매된다. 곡 중 짧게 등장하는 광고음악이나, 라디오 음악을 집어넣어 앨범 전체가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곡들을 구성하는 컨셉트 앨범으로, 수록곡 "I Can't See For Miles"는 빌보드 싱글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더 후의 유일한 10위권 진입 히트곡이 된다.

The Who - I Can See For Miles

 

전작의 성공에 고무받은 피트 타운젠드는 이는 인도의 힌두교 요기 사상가인, 메헤르 바바 (Meher Baba)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예 앨범 하나를 통째로 스토리라인으로 구축해 하나의 뮤지컬처럼 만들 계획을 한다. 이에 구상해 낸 스토리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가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워드 페인팅' (Word-painting) 기법에 의해 곡들이 쓰여지고, 1969년, 록 역사상 최초의 록 오페라로 기록되는 4집 앨범 [Tommy]가 탄생한다. 총 오리지널 24곡으로 구성된 두 장짜리 앨범은 1969년 영국 앨범차트 2위에 오르는 성공을 이루었고, 이러한 록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이후 핑크 플로이드, 예스, 퀸 등의 다른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The Who - Pinball Wizard

 

 


1960년대 중반 대중음악은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뮤지션들은 더 이상 라디오 방송이나 음반순위차트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비틀즈는 이미 Rubber Soul(1965), Revolver (1966), Sergeant Pepper(1967)와 같은 프로그레시브 앨범에서 장편의 가사와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실험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많은 뮤지션들도 기존의 3분 짜리 팝송의 제한규정을 거부하고 장편의 곡들을 LP에 수록하기 시작하였다.

프로그레시브 선두주자로 핑크 플로이드와 소프트 머신에 이어 예스, 제네시스(나중에 필 콜린스 참여)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열성적인 팬들은 대학 및 예술학교 출신의 주로 중산계급이었다. 1970년경부터는 일부 그룹들이 클래식에 기반을 두고 특정 테마를 기초로한 일련의 곡들을 중심으로 컨셉 앨범을 발표하였다. 프로그레시브 뮤지션들은 비록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팝 계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은 유난히 긴 독주곡, 장황한 노래가사, 웅장한 관현악편곡, 화려한 의상 등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YES - Roundabout

 

한편, 처음에 알엔비로 시작한 기타 뮤지션들의 음악은 블루스와 록음악으로 발전하였다. 판타지, 반복적인 기타 ‘리프(riffs)’ 연주,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천둥 같은 베이스와 드럼은 ‘히피족’들을 사로잡았다. 히피족은 인습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대신에 평화와 사랑에 기초한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젊은 미국인들을 가리켰다. 1967년쯤 히피문화가 런던에 보급되면서 유니섹스 스타일의 장발, 샌들, 낡은 청바지가 유행하였다.

 

일부 히피족들은 포크음악이 가지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요소를 모던 록이 가지고 있는 상업적 성격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으로 간주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국에서 포크음악은 좌익 학생들, 보헤미안들, 아일랜드 출신 망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1970년대에 들어 페어포트 컨벤션, 스틸아이 스팬, 알비언 컨트리 밴드와 같은 그룹들이 성공하면서 포크록(folk rock)이 영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발생한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여하면서 반전과함께 수많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회의감을 느낀 청년들 사이에서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후 마약을 하고 환각을 탐미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추구하는 ‘히피 문화’로 번져갔다. 이에 따라 록 음악의 새로운 장르,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이 탄생했다.

Jim Morrison

 

약물이 주는 환상의 세계를 언급하며 실험적이고 과장되고 자유분망한 스타일의 사이키델릭은 현실 도피적인 음악을 추구하며 록 음악에 ‘예술성’을 한층 올려놓는 성과를 거둔다. 거리는 꽃과 청바지, 장발의 사람들로 가득찼고 청년들은 자유와 평화, 사랑을 외치며 활보했다.

 

‘히피문화’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는 도어스(Doors)의 짐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과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있다. 짐 모리슨은 공포와 폭력,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무절제와 광기, 환각, 초현실주의 등을 음악에 녹여냈고, 지미 헨드릭스는 신이 들린 듯한 기타 연주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에 대한 분노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The Doors - Light My Fire

 

격동의 역사가 소용돌이 친 60년대의 끝을 앞둔 1969년 8월 15일. 미국 뉴욕주의 베델 평원에서 ‘3Days of Pease&Music’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3일간의 음악 페스티벌이 막을 올렸다. 이 페스티벌에는 무려 30만 명 이상 참여해 입구가 부서질 만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몰려든 인파로 음식, 물은 물론 화장실조차 부족한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져 거대한 진흙뻘처럼 변해버린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마치 놀이터를 찾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마냥 열광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록 음악의 총 집결지이자, 히피족들의 지상낙원이었기 때문이다.

 

우드스톡 페스티벌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 사흘 동안 사람들은 공연과 마약을 즐기며 고달픈 현실과 복잡하게 얽힌 사회문제로부터 도망쳐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총 32팀의 밴드가 무대에 올랐던 이 축제는 60년대 자유분방함과 시대정신을 지닌 록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음악사에 기록됐다. 또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거대 규모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 전례가 되며 오늘날 록 페스티벌의 시초가 됐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