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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대중가요의 역사 1부

 

 

 

한국 최초의 상업적 음반은 1907년 3월 미국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한 <Korean Song> 음반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기록이다.  국악(경기 명창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 등)의 민요, 가사, 시조 등을 담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녹음된 원반을 미국 본사에서 음반으로 제작하여 한국에 판매했으며, 총 30곡이 녹음되었고 10인치 평원반 형태로 발매되었다. 미국 빅터레코드도 1908년  한국인의 소리를 담은 음반제작을 시작했는데, 이동백의 판소리 '적벽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국내에서 초창기 음반에 참여한 이들은 권번 기생들이나 국악을 하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국악 장르가 주를 이뤘다. 
또한 초창기 음반 제작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했으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일미축음기제조회사(日米蓄音機製造會社)를 발족한 일본은 1910년 ‘일본축음기상회’로 사명을 바꾼 1911년 9월부터 한국인의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으며, 1913년 ‘NIPPONOPHONE’ 라벨을 사용해서 [조선 신음보 1호]라는 타이틀로 판소리와 속요, 찬송가 등의 양면 반을 발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이 창작해서 만든 가사로 부른 창가로서 음반에 수록된 최초의 노래는 1923년 박채선·이류색이 부른 「이 풍진 세월」이다. 일축축음기 동경지부장 이세기가 종로에 조선축음기상사를 차린 뒤 일본에서 제작한 음악으로 4분의 3박자의 왈츠 풍에 따라 부르기가 매우 편안한 노래이다. 원곡은 제레미아 잉갈스(Jeremiah Ingals)가 작곡한 찬송가 ‘When We Arrive At Home’이다. 당시 창가집에 「탕자자탄가」, 「청년경계가」 등의 제목으로 악보가 수록되어 있고, 해방 후에는 「희망가」라 불린 이 노래는, 미국의 노래가 일본으로 넘어가 불려지고,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새롭게 가사가 붙여져 불리웠다. 이 시기에 일본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불려졌으며 「카추샤의 노래」, 「장한몽가」, 「시드른 방초」 등이 우리말 가사로 번역되었거나 단순하게 번역해 붙인 번안가사이다.

 

 

 

 

그에 비해 「이 풍진 세월」, 「자라메라」, 「사의 찬미」 등은 외국 악곡에 우리나라 사람이 창작한 새로운 가사가 붙여져 있다는 점에서 한국대중가요사의 첫 자리에 놓일 만하다. 이 중 음반 취입으로는 「이 풍진 세월」이 가장 이르며, 1926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vanovici)의 관현악 왈츠인 ‘다뉴브 강의 잔물결(Danube Waltz)’의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번안곡으로 취입 후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 사건이 센세이션을 일으켜 조선어 대중가요 음반의 생산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윤심덕 - 사의찬미

 

삶에 대한 짙은 허무와 원망이 절절히 배인 이 노래가 발표되기 직전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연인이자 극작가인 김우진과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작(遺作)이 된 <사의 찬미>는 음반 한 면에 노래 한곡이 수록된 ‘쪽판(싱글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초판 500장이 며칠 만에 매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신여성의 패션 아이콘으로 신문, 잡지를 장식했던 전성기의 윤심덕
처자식까지 있는 유부남과의 스캔들이었던 데다 한때 경성(京城)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그녀의 유명세를 감안해도 기대치를 웃도는 반응이었다. 음반이 품귀현상을 보이자 뒷면에 찬송가 ‘부활의 기쁨’이 추가된 정식 앨범이 재발매되었고, 한 달 사이에 생전에 그녀가 녹음해 둔 24곡의 노래를 담은 12장의 앨범이 쏟아져 나올 만큼 <사의 찬미>가 일으킨 사회적 신드롬은 대단했다.

 

 

 

 

 

작사뿐 아니라 작곡까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노래로 음반에 수록된 첫 작품은 단성사에서 1927년 개봉되었던 이구영 감독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삽입되었고, 1929년에 음반으로 발매된 이정숙의 「낙화유수(강남달)」와 같은 해 트로트 양식을 보여준 「세 동무」가 김서정의 작곡으로 출반되고, 전래의 민요 어법에 서양음악이 적극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신민요의 출발로 볼 수 있는 창작자 미상의 영화주제가 「아리랑」(1929)이 출반되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창작으로 이루어진 대중가요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 음반에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 부르자’로 데뷔했던 채규엽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로 알려져있다. 채규엽은 함흥 출생으로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고 1년 뒤에 돌아와 귀국독창회를 열었으며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극단 토월회와 취성좌의 공연에서 막간가수로 출연하기도 했다. 

채규엽이 불렀던 ‘ 봄노래 부르자 ’는 빼앗긴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을 꿈에 가만히 그려보는 설렘과 아련함으로 포근한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  그의 음색과 창법에서는 가늘고 잔잔한 미성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여운 효과를 느낄수 있었다.다. 하지만 인기가 높아지자 일제는 이 곡을 수상쩍게 판단했고, 곧 발매금지를 시켰다. 이 밖에도 채규엽은 ‘서울노래’, ‘눈물의 부두’, ‘북국 오천키로’ 등의 대표곡을 비롯해 80여곡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1920년대 말에 형성되어 1930년대에 확립된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당시 성립한 음반산업(혹은 레코드산업)에 의해 유행가(流行歌)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사의 찬미>가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1920년대 후반부터는 유성기의 확산과 함께 일본의 엔카를 우리 고유의 3박자로 편곡한 ‘트로트’가 대중적인 장르로 정착되었다. <오빠는 풍각쟁이>, <이 풍진 세상에>, <황성옛터> 등이 초창기 트로트의 인기를 견인했던 대중가요들이다.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는, 일본 대중가요의 음악을 받아들여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와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이나 ‘라’의 비중이 높은 트로트 양식(당시에는 유행가, 유행소곡이라 불린)과, 민요의 어법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외래적 음악언어와 혼용한 신민요가 양대 축을 형성하였고, 재즈나 블루스, 탱고 등 서양의 음악언어를 좀 더 본격적으로 사용한 재즈송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이외에 가사에서 희극성이 강조된 노래는 따로 만요(漫謠)라 지칭했다.

 

 

 

 

트로트 양식의 노래는 이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1932, 일명, 「황성 옛 터」), 고복수의 「타향」(1934, 일명 「타향살이」)을 거쳐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서 양식적 관습이 대체로 정돈되었고, 이후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알뜰한 당신」의 황금심 등의 인기 가수들을 낳으며 오랫동안 한국대중가요사의 주도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작곡가로는 전수린,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재호 등이 인기를 얻었으며, 작사가로는 왕평, 박영호, 조명암, 박노홍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고복수 - 타향살이

 

 

 

장세정 - 연락선은 떠난다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를 서양 악기의 반주에 맞춰 부른 ‘신민요’ 역시 인기 있는 장르였다. 신민요는 전문교육을 받은 가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권번(券番, 일제가 만든 일종의 기생조합) 출신의 기생들이 녹음할 수 노래인 데다 대부분 현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능숙한 기량을 가진 덕분에 해방 이후까지도 크게 성행했다.

 

신민요는 창작자 미상의 영화주제가 「아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1931, 32년 강석연이 부른 「오동나무」와 「방아타령」을 거쳐, 1934년에 이르러 강홍식의 「처녀총각」과 「개나리고개」,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 박부용의 「노들강변」 등 다양한 경향의 신민요가 대거 인기를 얻으며 등장하면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이은파의 「관서천리」, 선우일선의 「조선팔경가」, 이화자의 「꼴망태 목동」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신민요 여자가수는 전통적 가창을 배운 기생 출신들의 약진이 돋보였다는 특징이 있으며, 신민요의 작곡가로는 문호월, 형석기, 김준영, 전기현 등이 활약했고 본격음악 작곡가라 할 수 있는 안기영과 이면상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강석연 -오동나무

 

 

박부용 노들강변

 

트로트와 신민요는 가사와 정서적 내용에서도 그 차이가 컸다. 트로트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비애스러운 탄식,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처지에 대한 한스러움 등을 드러내는 진지한 태도의 노래라면, 신민요는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 삶을 즐겁게 표현하는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가 대도시에서 신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방식과 감정을 드러내는 양식이었다면, 신민요는 이보다 좀 더 익숙하고 즐거우며 편안한 대중적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수적으로 소수인 재즈송은, 김해송의 「청춘삘딩」,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등에서 보이듯, 주로 근대적 대도시의 삶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노래들로 가사에서 외래어·외국어의 과시적 사용이나 대도시의 생활풍속의 언급이 상대적으로 많은 노래였다. 작곡자이자 가수인 김해송과 발랄한 목소리의 박향림이 재즈송을 많이 불렀다.

 

박향림 - 오빠는 풍각쟁이

 

 

유성기의 보급이 불러온 변화는 무엇보다도 가수(歌手)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음반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빅터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 등 산업자본의 진출은 필연적으로 우리말로 노래를 부를 가수를 필요로 했다. 레코드사가 주관하는 가수선발대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부와 인기가 따르는 가수라는 직업은 1930년대에 이미 대중들이 우러러보는 특별한 존재로 대접 받았다.

 

조선악극단

 

또한, 식민지 시대의 대중음악은 유성기 음반(SP음반)과 더불어 악극(樂劇)이나 가극(歌劇) 등의 무대예술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생산, 매개, 소비되었다. 악극 혹은 가극은 연출가, 작곡가, 가수, 악단, 무용수, 코미디언 등이 어우러져 무대에 올린 악극은 오페라·뮤지컬·신파극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종합무대예술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랑랑악극단, 백조가극단, 라미라가극단, 남대문악극단 등으로 전성기를 누린 악극은 1945년 이후에도 KPK악단, CMC악단, OMC악단, 장미악극단, 남대문악극단, 뉴코리아 악단 등이 활동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무대가요’라는 용어가 실존했던 점은 초기의 대중음악이 무대에서의 실연을 매개로 대중에게 전파되었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유행가’ 혹은 ‘대중가요’, 혹은 ‘가요’는 유성기 음반뿐만 아니라 악극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는 음악을 의미했다.

 

 

직업가수들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그 즈음 일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다방 문화"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공간에서 커피와 음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은 1923년 명동에 문을 연 ‘후다미( 二見)’와 충무로 2가의 ‘금강산’으로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을 위한 사교클럽처럼 운영되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구 관철동에 개업한 ‘카카듀’가 시초였고 1929년 종로2가에 영화배우 김인규와 화가 심영이 동업으로 문을 연 ‘멕시코’가 뒤를 이었다.

 

충무로1가


이밖에도 1930년 소공동에 문을 연 ‘낙랑파라’를 비롯해 엘리자, 다이나, 프린스, 백룡, 성림, 본아미, 파르콘, 돌체 등 많은 수의 다방들이 생겨났다. 이 당시만 해도 다방 주인들은 대부분 예술인들이 많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성의 인텔리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레코드 콜렉션이 풍부한’ 다방일수록 많은 이들이 일삼아 들리는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신문물의 하나인 다방 풍경을 소개한 당시 신문기사는 ‘이곳에는 축음기에서 쟈즈(재즈)를 비롯한 서구의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이 흘러나오고 가베(커피)와 카루삐스(칼피스) 같은 음료를 맛볼 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쓰인 ‘쟈즈’라는 용어는 당시 조선에서 ‘서양의 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오늘날의 재즈(Jazz)와는 차이가 있다. 쟈즈와 함께 이 곳에서 즐겨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말로 부른 유행가, 즉 대중가요들이었다.

이처럼 당시 인구 30만 명에 불과한 경성에 우후죽순처럼 다방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향유하게 된 대중가요는 서민들에게 보다 친숙한 대중문화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939년 발표된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예술과 사랑을 논하던 그 옛날 서울 거리의 어느 다방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난영 - 다방의 푸른꿈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트로트에서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에 ‘라’의 비중이 높은 노래들이 새롭게 인기를 얻으며, 만주, 중국과 동남아 등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상상력을 담은 이국적인 노래들과 노골적인 친일가요들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43년 발매된 한복남의 빈대떡신사는 해학적인 가사와 특유의 창법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47년 현인은 신라의 달밤으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한복남 - 빈대떡신사

 

 

이 시기 대중가요의 중요한 장은 음반과 공연이었으며 라디오뿐인 방송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음반을 생산하는 오케, 빅타, 콜롬비아, 태평 등의 음반사는 모두 일본 회사였고, 식민지 조선에는 회사는 물론 녹음 스튜디오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악극단, 반도악극단 등 음반회사를 중심으로 한 악극단들이, 노래와 연주, 춤을 결합한 버라이어티쇼와 악극 등을 결합하여 종합적인 대중예술 공연물을 공연하는 방식으로 많은 대중을 만났다.

 

현인

 

 

현인 - 신라의 달밤

 

 

1941년 조선연극협회와 연예협회가 통합,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창설되었고 연예인들에게는 ‘기예증’이 발급되었다. 같은해 ‘라미라가극단’이 ‘견우와 직녀’를 초연, 이것이 우리나라 뮤지컬의 효시로 보고있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음반 제작이 중단되었고 오로지 군국가요만이 울려 퍼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되었으나 당시 음반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1946년 조선레코드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장비와 물자 부족으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이 무렵 대중음악을 이끈 것은 결국 무대공연이었다. 1946년 8월 악극협회가 결성되었고 1947년 전국가극협회가 결성되었다. 1947년 고려레코드사가 설립되어 ‘가거라 38선(남인수)’을 발표한 데 이어 ‘달도 하나 해도 하나(남인수, 아세아)’, ‘울어라 은방울(장세정, 오케)’ 등이 발표된다. 

 


1948년 작곡가 박시춘에 의해 본격적으로 녹음시설을 갖추고 설립된 럭키레코드사는 ‘신라의 달밤(현인)’을 1호 음반으로 출시했고 이어 서울, 오리엔트, 코로나 등 군소 음반사들이 설립되어 음반의 명맥을 이어갔다. 

남북 분단의 혼란기를 전후해 강홍식, 박영호, 이면상, 조명암 등이 월북하고 계수남, 김동진, 전오승, 한정무, 한복남 등이 남하하는 등 가요계 또한 남북으로 갈라지며 이후 월북작가의 곡들은 한동안 금지곡에 묶여 남한 가요사에서 묻혔다. 1947년 6월, 서울중앙방송국이 전속 경음악단(박시춘, 손목인 등 지휘)을 결성한 데 이어 전속가수 제도를 시행했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구 문물 유입과 함께 댄스홀이 등장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편으로 분단을 고착시키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부족하나마 어느 정도 사회 안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1949년에 들어서는 음반산업이 조금씩 재흥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악극단 중심의 무대 공연은 이때에도 여전히 활황을 누리고 있었고 전체 대중음악의 무게중심 역시 공연 쪽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음반의 부활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려레코드가 처음으로 국산 음반을 발매한 지 2년이 지나지 않아 많은 신생 음반회사들이 서울은 물론 대구, 부산 등 지방에도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럭키레코드는 현인의 <신라의 달밤>으로 시작된 경이로운 히트의 연속으로 단연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된 남북 분단은 대중음악의 내용에도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소극적으로 분단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린 경우가 있고, 그와 다르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 수용하여 결과적으로 분단의 고착화에 기여한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로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 같은 경우는 여순사건에 대해 남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른 시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광복 이후 처음으로 공식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반면, 1949년에 상연된 ‘반공악극’ <육탄 십용사>는 정부와 군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무대에 오른 후자의 예이다.

 

 

2부로 이어집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중음악(大衆音樂))』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한국문화재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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