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VOl.2
1960년대는 대중가요계를 좌우할 여러 제도들이 정돈되고 매체와 기술의 발전도 이룩된 시기였다. 1961년 5·16 이후 한국연예협회가 발족했고 1962년 한국방송윤리위원회, 19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활동 개시로 대중가요에 대한 심의를 주도했다. 1960년대 후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많은 트로트 가요들이 ‘왜색’을 이유로 금지될 수 있었던 법적 근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또한 1968년 음반법이 시행되어 설비 기준이 적용되면서, 1960년대 중반에 40, 50여 개에 달하던 음반사의 수가 10여 개로 축소되었다. 음반의 콘텐츠를 담당한 것은 편곡자, 프로듀서, 악단장의 역할을 모두 맡은 작곡자였는데, 적지 않은 음반들이 이들 이름을 내세운 ‘작곡집’의 모습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음반은 에스피(SP)에서 엘피(LP)로 바뀌었고,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모노음향에서 스테레오 음향으로 바뀌는 등 음반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1961년 말에 개국한 KBS TV를 필두로 1964년 TBC, 1969년 MBC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유지된 3채널 시대를 열었고, 대중가요 역시 이들을 매체로 한 새로운 활동의 시대를 시작했다.
최연소 가수로 데뷔한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8개월 동안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이후 데뷔곡 「효녀 심청 되오리다」(오종하 작사/형석기 작곡)가 수록된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당시 그녀는 불과 만 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서 최연소로 데뷔한 것이였고 당시 기준 세계 최연소 음반 출반 가수로 추정된다. 하춘화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줄곧 따라다니면서 매니저 역할을 하며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도왔고 데뷔한지 5년 만인 1966년에 「아빠는 마도로스」가 처음으로 히트하였다.
최초로 민간음반사에서 제작한 12인치 LP인 김치켓의 <검은 상처의 부루스> 앨범은 1962년 발매되었다. 1960년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여성듀엣 김치켓(Kimchi Kats)은 작곡가 박춘석에 의해 픽업되어 10인치 독집 LP <김치켓 히트집>을 발표하며 공식 데뷔했다. 이들은 1959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김시스터즈에 이어 1963년 일본, 홍콩, 필리핀, 대만을 거쳐서 미국에 진출했다.
당시 라스베가스 최고의 무대였던 스타 더스트 호텔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이들은 ‘동양에서 온 매혹적인 스타일과 용모의 여성그룹’으로 칭해지며 커다란 이슈를 이끌었다. 소개하는 앨범은 김치켓이 해외 진출을 앞두고 1962년에 발표한 독집음반 <검은 상처의 부루스>이다. 이 음반은 한국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음반으로 민간 레이블에서 최초로 제작한 12인치 LP라는 점에서 가치와 역사성을 지닌다.
1960년대 대중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오디오의 급성장을 들 수 있다. 유성반 시대에서 본격적인 LP 레코드 시대로 전환하는 새로운 물결이 1958년부터 시작되었다. 라디오 전파 역시 AM에서 FM이라는 보다 좋은 음질로 전환했다.
남성중창단의 등장은 멜로디보다 화성을 중시하는 당시의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1960년대 대중가요는 21세기 현재의 대중음악계의 모습과 여러 부분에서 닮은 점이 많다. 특히 해외 진출과 남성 중창단의 활약적인 면에서 이 점은 분명하다.
1960년대에는 남성 사중창단의 최대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최희준과 위키리 등이 모여서 결성된 포 클로버스와 같이 대형 가수들이 하나의 그룹 안에서 공존하거나, 활동 이후에는 대표적인 솔로 가수로 진화하는 등의 비슷한 사례가 꽤 된다.
1960년대 남성 사중창단은 블루벨즈와 멜로톤쿼텟, 쟈니 브라더스, 봉봉 사중창단, 아리랑 브라더스, 마일스톤즈 순으로 연이어 등장했으며, 이들은 모두 어김없이 히트와 큰 인기를 동시에 누렸다. 특히 블루벨즈와 쟈니 브라더스, 봉봉 사중창단의 삼각 인기경쟁은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치열했다.
포 클로버스는 1963년에 결성된 4인조 보컬 합창단이자 최초의 노래 동아리였다.

이팀은 최초 보컬 그룹의 결성을 염두에 두고 모였지만, 멤버 모두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중창단 결성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노래모임으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최희준과 유주용, 박형준, 위키리로 구성되었던 포 클로버스는 멤버 전원이 학사 출신이라는 포인트를 지닌 매력적인 조합으로 60년대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부여하는데 큰 공헌을 남겼다.
1963년 대한극장에서 펼쳐졌던 패티 페이지의 내한공연 당시에는 한국가수를 대표해서 찬조 출연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던 포 클로버스는 2장의 음반을 남겼다. 신세기 레코드에서 발매된 1964년 <포 클로버스와 본본 사중창단> 과 1967년 <별빛 속의 러브레터>다. 이 음반들은 모두 구하기 힘든 희귀음반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성을 담보한 명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1집 앨범은 동시대의 남성중창단의 인기를 함께 이끌었던 봉봉사중창단과의 스플릿 음반으로 총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위키리가 부른 「저녁 한 때의 목장 풍경」이다.
쟈니 브라더스는 예그린 악단의 멤버를 중심으로 결성된 그룹으로 1962년 새롭게 개국한 동아방송 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룹 이름이 없던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해준 전석환의 별명 ‘쟈니’를 따서 쟈니 브라더스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1962년 MBC가 주최한 동대문운동장의 ‘5ㆍ16혁명 1주년 기념 콩쿠르대회’는 ‘쟈니 브라더스’라는 공식이름으로 대중들 앞에, 선 첫 무대였다.
이후 1963년 동아방송 중창 콩쿠르에서도 최우수상의 영예를 얻어냈다. 쟈니 브라더스의 전속무대는 워커힐 호텔 무대로, 무대가 돌아가는 회전기능이 있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했다. 이하 내용은 멤버들의 회고에 의한 당시 무대의 풍경이다.
“워커힐 무대에 처음 선 날, 미처 노래 가사를 외우질 못했어요. 가사를 쪽지에 써서 마이크 앞에 붙여놓고 컨닝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조종실에서 뭘 잘못했는지 갑자기 마이크가 밑으로 슬슬 내려가더군요. 그래서 저희 4명도 마이크를 따라 내려가면서 결국 바닥에 엎드려서 노래를 하게 됐죠. 관객들은 저희가 웃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박장대소 하더라고요.” 쟈니 브라더스의 인기는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 사는 황부자」에 이어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정상의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었는데 서울 명보극장에서만 25만 명을 동원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와 더불어 쟈니 브라더스가 부른 주제가「빨간 마후라」는 동남아 및 일본에까지 소개된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로 평가된다. 이 노래는 공군의 요청으로 반나절 만에 급조되어 완성된 노래지만, 여전히 공군을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1962년 7월 7일에 결성된 봉봉 사중창단의 오리지널 멤버는 예그린 악단이 해체되면서 한국민속가극단에 함께 입단한 김성진, 이계현, 김유생, 현삼열 등 4명이다. 봉봉 사중창단의 초기 음악은 가난과 전쟁의 잿더미에서 우울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보다 도시 젊은이의 밝은 삶을 담은「꽃집의 아가씨」,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와 같은 노래처럼 박력있고 명랑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이후 봉봉 사중창단은 노래는 물론 직접 연주하는 보컬그룹으로 거듭나면서 ‘한국의 밀즈 브라더스(Mills Brothers)’ 로 불리기도 했다. 밝고 건전한 노래들로 유독 상복이 많았던 봉봉 사충단은 공보부의 무궁화가요대상, 동양방송의 방송가요대상, KBS의 고운노래대상, 서울신문의 한국문화대상 등 숱한 가요 관련 상들을 모조리 휩쓸며 최고 인기 보컬 그룹으로 군림했었다.
특히 봉봉 사중창단을 히트 퍼레이드로 이끈 신호탄은 1966년에 발표했던 「등대지기」로 밝고 경쾌한 풍의 노래를 많이 부른 봉봉 사중창단 특유의 스타일과는 달리 포크송에 가까운 편안한 노래였다. 인기는 있었지만 특별히 큰 히트곡이 없었던 봉봉 사중창단은 「 등대지기」를 시작으로 점차 히트곡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게 된다.
「등대지기」와 「육군 김일병」이 수록된 봉봉사중창단의 앨범의 B면은 「울릉도 트위스트」는 물론 「제니의 추억」,「남성금지구역」 등 이씨스터즈의 6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씨스터즈에게 1966년은 「울릉도 트위스」,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목석같은 사나이」, 「남성금지구역」을 연달아 히트시킨 해였으며, 이들의 최대 전성기로 기억되고 있다.
「울릉도 트위스트」는 이들이 60년대를 대표하는 걸그룹으로 각인시킨 최고의 명곡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요의 고전이다. 맑고 발랄한 고음역의 화음을 구사했던 이씨스터즈는 1966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중창단상을 수상한 것을 이어서 제1회 KBS 고운노래대상 시상식에서도 금상을 차지했다.
이후 멤버들의 결혼과 더불어 리드보컬 이정자가 팀을 탈퇴해 새로운 멤버 김상미를 영입하는 침체기를 겪은 후, 봉봉 사중창단과 함께 스필릿 음반을 발표했다.
남성 중창단의 흐름은 이후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트윈폴리오와 코코 브라더스, 투에이스 등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남성 그룹과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처럼 혼성 듀엣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번져갔다.
일반적으로 한국대중가요 역사에서 포크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뮤지션은 트윈폴리오와 한대수를 손꼽는다. 그러나 이보다 4년 앞서 발표된 국내 최초의 통기타 음반이 존재한다. 1962년 ‘5ㆍ16 군사혁명 1주년기념 콩쿨대회’ 에서 만난 한양대생 서수남과 중앙대생 하청일을 주축으로 성악가 석우장과 천정팔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아리랑 브라더스가 그 주인공이다.
대도레코드의 녹음기사 이청은 모든 직원이 퇴근한 밤에 아리랑 브라더스의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몰래 불러서 약 한 달간 도둑 녹음을 강행했다. 그리고 1964년 라 스카라(LA SCALA) 레코드사를 창립해서 초반으로 200장을 제작해서 언론과 음악 관계자들에게 배포해서 반응을 살폈다. 타이틀곡이었던 「우리 애인은 미쓰 얌체」보다 「동물농장」과 「웃어주세요(도미니크)」가 의외로 더 큰 반응을 보이면서 타이틀곡을 ‘동물농장’으로 변경해서 추가로 제작했다.
이 앨범의 자켓 디자인은 수작업으로 그린 의자가 다소 조악하게 담겨져 있는데, 이는 자켓 디자인 파일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서수남은 아리랑 브라더스와 함께 8군 그랜드 올 오프리쇼에서 활동한 직후인 1968년 현인의 친딸인 한혜정과 함께 혼성 컨트리 보컬 듀오 앨범을 내고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이 앨범 역시 아리랑 브라더스의 앨범과 함께 희귀 앨범으로 손꼽힌다.
5부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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