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에도 한국대중음악은 분단으로 창작자와 가수들 일부의 월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작곡가들이 남한에 남음으로써 1950년대까지는 트로트와 신민요의 주도는 이어졌다. 당시 북으로 넘어간 모든 문인과 대중 문화인들의 작품은 내용과 상관없이 금지의 철퇴가 내려졌다. 이 시기 인기 있던 트로트 작품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와 「유정천리」, 남인수의 「청춘고백」, 신민요인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등은 가사나 음악 모두에서 일제강점기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러나 트로트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경험을 반영하여 절절한 비애를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 발표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전쟁 이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등이 대표적인 노래이다.

1950년에 발표된 「울고넘는 박달재」는 한국전쟁을 목전에 둔 박재홍이 불러 수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랐던 노래이다. 박재홍의 구수한 노래와 김교성의 애절한 멜로디도 훌륭했지만, 이별의 순간과 애달픈 사연을 스케치한 반야월의 가사가 압권인 넘버로서 작은 에피소드를 지니고 있다. 1948년 가을녁 남대문악극단의 지방순회 공연 중에 단원들을 태운 버스가 박달재 정상에서 펑크가 나고 말았다. 버스에서 내린 반야월은 박달재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부둥켜안고서 흐느끼는 젊은 부부의 이별장면을 목격하고 그 장면을 가사로 옮겼다고 한다.
1953년 곡 「굳세어라 금순아」는 6.25 전쟁 당시 상처받은 피난민과 이산가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시대의 송가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당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정확하게 1950년 12월 15일부터 10일간 10여만 명의 피란민이 군용선과 목선, 그리고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에 올라 흥남부두를 철수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강사랑의 가사에 감명을 받은 박시춘은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군용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힘겹게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1953년 곡 「이별의 부산정거장」는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손꼽혔던 곡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발표된 이 노래는 환도하는 피난민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어수선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이 노래는 놀랍게도 10만 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우며 ‘애수의 소야곡’ 이후 남인수에게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줬다. 이 노래는 1958년 LP시대가 개막되면서 10인치, 12인치로 재발매되었고, 이후 음반 미디어가 변화할 때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해 나왔다.
1956년곡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작사가 반야월이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 피난길에서 잃은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미아리고개에서의 이별이라는 주제로 가사를 썼던 곡이다.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한으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기다리는 부인은 남편이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는 내용으로 이해연의 가슴을 헤집는 가창은 특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처녀 뱃사공」은 1959년 황정자가 부른곡으로 한복남의 곡이다. 당시 인기 있던 ‘낙랑악극단’은 혜은이의 아버지 최성택이 단장이었고 6.25 전쟁 이후에 막강한 인기를 구가했던 지방의 쇼단체였다. 낙랑악극단을 대표했던 윤부길은 원맨쇼의 일인자이자, 멀티 플레이어 윤복희와 키보이스의 창립멤버였던 윤항기목사의 아버지이다. 6살의 나이에 손가락에 상처를 내면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당돌한 행동을 했던 윤복희와 함께 윤부길은 ‘윤부길과 천재소녀 윤복희’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전국을 누비여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윤부길은 경남 함안 악양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젓고 있던 처녀뱃사공을 만나게 된다. 강을 건너며 처녀뱃사공이 오빠를 만나기 위해 강을 오가고 있다는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부길은 노랫말로 담아냈고, 한복남에게 곡을 요청해서 국민 애창곡 ‘처녀 뱃사공’이 탄생되었다. 손인호의 ‘짝사랑’과 함께 유성반으로 처음 발표된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은 6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독집LP로 제작되기도 했다. 총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에는 훗날 혼성밴드 들고양이에 의해 리메이크된 ‘오동동 타령’의 오리지널 버전도 수록되어 있다.
1959년 박신자가 부른 「댄서의 순정」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이다. 1950년대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대변되었듯이 여성들의 춤바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던 시기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던 당시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은 고향을 떠나 여급 혹은 댄서로 살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댄서의 순정’은 그 같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성들의 현실을 증언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다. 이 노래의 오리지널 가수 박신자는 주현미의 큰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1959년 유성기 음반으로 발표된 이후 10인치 LP로 재발매되었지만, 1968년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었다. 이후 1970년 김추자에 의해 ‘댄서의 순정’으로 리메이크되면서 빅히트를 기록했다. 빼어난 미모였지만 23살에 요절한 박신자의 노래는 시대적 아픔과 금지의 아픔까지 더해져 유성기 음반과 10인치 LP할 것 없이 전설적인 음반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연예인들은 군예대에 편성되어 전쟁터를 누비며 위문활동을 펼치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휴전과 환도 이후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쇼 무대와 악극공연 그리고 레코드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서울도심과 용산의 미8군 캠프, 여의도, 이태원에는 수많은 미8군 클럽들이 생겨나며 미8군 무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임시수도 부산과 대구에서는 쇼나 악극 공연이 활발했고 도미도, 미도파, 오리엔트, 스타 등 음반사를 통해 음반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6, 25 전쟁 동안 한반도는 포성 소리와 함께 진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전우야 잘 자라(현인)’을 비롯해 실향민들을 위한 망향가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경상도 아가씨(박재홍)’, 그리고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등이 등장했다.
1953년, 휴전 환도 이후 대중음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다. 서구문화가 본격 상륙하면서 ‘춤바람 열풍’과 함께 맘보 등 경쾌한 리듬의 다양한 곡들이 등장했고 전통가요의 현대화가 가속화되었다.
미군문화의 무차별 유입으로 춤바람 열풍과 함께 경쾌한 리듬의 댄스곡들이 대유행했다.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어 가면서 미8군 쇼 가수들의 일반무대 활동이 시작되었고 영화주제가 전성시대도 펼쳐졌다. 트로트는 장세정의 「고향초」, 신세영의 「전선야곡」 등 7음계적 측면이 강해지는 노래, 혹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안정애의 「무정 블루스」에서처럼 블루스 등 새로운 리듬과 결합하는 노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음악과의 결합은 신민요에서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서 황정자의 「오동동타령」, 「노랫가락 차차차」, 백설희의 「도라지 맘보」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음악 중 특히 탱고, 맘보, 부기우기, 블루스 등 춤곡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쓴 현인의 「서울야곡」, 도미의 「비의 탱고」, 김정애의 「닐니리 맘보」, 윤일로의 「기타 부기」, 나애심의 「미사의 종」 등이 대거 출현했고, 특히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인기를 모았다. 또한 일제 말기에 나타났던 아시아적 이국성의 노래들이, 국제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 시기에도 여전히 유지되어 현인의 「신라의 달밤」, 장세정의 「샌프란시스코」,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허민의 「페르샤 왕자」,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 등이 인기를 모았다.
이들 기존 대중가요인들의 활동 영역은 여전히 음반과 악극단이었다. 해방과 함께 생산지가 사라진 음반은 1948년이 되어야만 대중가요 음반 생산이 가능해지고, 악극단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 중 육군 군예대로 종군활동을 하였고 작곡가 박시춘이 이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전쟁이 끝나면서는 미8군 밤무대와 방송국이 새로운 활동의 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기존의 트로트·신민요와는 다른 경향의 대중가요를 만들고 유포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국은 1956년부터 안다성의 「청실홍실」과 「꿈은 사라지고」,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금사향의 「소녀의 꿈」 등, 1960년대에 주류로 등장할 스탠더드팝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유포하면서 새로운 경향을 주도했다. 이후 드라마에서 주제가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고 때마침 1958년부터 악극단이 영화에 밀려 쇠락하면서, 트로트와 신민요의 전성시대는 한 매듭을 향해 나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드라마를 통해 위로받았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멜로 드라마인 조남사 극본, 이상훈 연출의 라디오 주간 연속 드라마 <청실홍실>이 방송되기 시작하면서 주제가 역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대한가수협회가 창립된 1958년에 국내 최초의 LP <KBS레코드 시리즈 NO.1>가 제작되면서 대중음악은 획기적인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앨범은 KBS레코드에서 국내 최초로 제작한 LP 음반이다. 국내 최초의 LP가 제작된 시점은 그동안 1956년, 1957년과 1958년 세 가지 설이 난립했으나 현재로서는 1958년으로 확인된다. KBS의 LP 제작을 기점으로 국산 LP 시대가 만개하면서, 한국 음반 산업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LP는 1948년 미국 콜롬비아레코드에서 1분에 33⅓회전, 12인치 크기로 처음 개발됐으며 이후 주한미군 부대를 통해 국내에 대거 유입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LP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959년도에는 10인치, 12인치 사이즈의 대중가요 LP들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3부로 이어집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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