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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대중가요의 역사 3부

 

 

1960년대 VOl.1

 

1960년대 대중가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주류였던 트로트를 누르고,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던 스탠더드팝이 국내에서도 주류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이 시기 적잖은 가수들이 미국과 유럽을 향한 해외 진출을 이뤘으며, 월등한 실력을 지닌 솔로 가수와 여러 장르에 걸쳐서 듀엣 이상의 그룹들의 활동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음악적 구성에 있어서도 자연스럽게 이전의 대중가요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시도와 결과물들이 쏟아졌던 시기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미8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미8군 무대’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국의 미군기지에는 수많은 클럽들이 문을 열었고 쇼 무대의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1957년  ‘화양흥업’, ‘유니버설’, ‘삼진’, ‘공영’, ‘대영’ 등 미8군 쇼에 국내 연예인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생겨났고 오디션을 통해 국내 가수와 연주인들이 미8군 무대로 대거 유입되었다. 한명숙, 최희준, 현미, 패티김 등 미8군 무대에 섰던 가수들이 1961년에 이르러 일반무대에도 자연스럽게 진출하게 되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이 대중음악의 즐거움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활동하던 가수들은 대개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노래를 그대로 부르거나 번안하는 수준에 그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점차 뮤지션으로서의 감각을 키워 나온 1960년대 주요 가수들은 1964년 최초의 밴드와 최초의 포크 앨범, 최초의 록 앨범 등을 발표하면서 장르의 다양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촌향도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노래가사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졌고, 도시의 구체적 인물과 공간을 포함한 밝고 명랑한 노래와 군 관련 노래까지 대중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한 편으로 어두웠던 대중음악의 흐름도 나타났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송윤리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윤리위원회를 통해서 발매된 모든 음반은 사전심의를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은 숱한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력을 보여줬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대유행이 그 계기가 되었는데, 이 흐름을 이끈 작곡가 손석우는 1960년대 초 단순하고 명랑한 스탠더드팝의 가장 중요한 창작자로 부상했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에 장안에서는 사람들이 노란색 옷을 즐겨 입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기존의 트로트에서 과감히 탈피해서 스윙, 컨트리와 같은 리듬과 멜로디로 아주 신선한 충격을 줬었던 그런 노래였다.

 

이곡은 대한민국 외, 특히 동남아시아와 미국 지역에서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대중가요로 손꼽히는 노래이다.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남자가 여러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아주 밝고 정직한 내용으로 국내 최초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던 노래가 바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다. 패티 페이지(Patti Page)와 냇 킹 콜(Nat King Cole) 등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보컬리스트와 비슷한 허스키 보이스를 상징했던 한명숙의 이 노래는 8군 음악의 시대를 예고한 곡으로 3차례나 재발매된 노래이다.

 

한명숙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학사 가수라는 타이틀을 지닌 가수 최희준과 남성사중창단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블루벨즈의 데뷔앨범이기도 한 스플릿 앨범에 최초로 수록되었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장르적으로 스윙재즈와 컨트리 앤 웨스턴을 뒤섞은 음악으로 1961년 비너스레코드의 창립 작품을 기획 중이던 작곡가 손석우에 의해 완성되었다. 원곡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트있는 곡이 아닌 느리고 짙은 감성의 블루스 곡이었다. 그래서인지 최초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당시에 음반 도매상들의 반응은 “가수가 부른 노래가 맞느냐? 목소리가 쉰 것처럼 너무 이상하다.”는 반응으로 무더기 반품사태를 빚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커다란 인기를 얻으면서 전국의 남성들이 노란 샤쓰를 즐겨 입는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 1962년 내한공연을 진행했던 세계적인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 역시 이 노래를 한국어로 취입했으며, NHK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에서 한명숙의 공연이 열린 이후 일본 가수 마무라 미츠코도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정식 취입하기도 했다.

 

 

 

 

1964년부터 영화주제가인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과 「하숙생」,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와 「보고 싶은 얼굴」, 패티김의 「초우」와 「빛과 그림자」, 김상국의 「불나비」 등이 히트하며, 초기의 명랑한 분위기를 이어간 이시스터즈의 「서울의 아가씨」, 블루벨즈의 「즐거운 잔칫날」, 봉봉사중창단의 「꽃집 아가씨」 등과 함께 스탠더드팝의 시대를 굳건히 했다.

 

현미`

 

 

현미는 60년대부터 패티김, 이미자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가수로 인기를 얻었다. 57년 미 8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펑크가 난 여가수의 대타로 무대에 오르며 가수의 길을 걷게 됐는데, 1962년 이봉조 작곡의 「밤안개」가 히트되면서 그 뒤 승승장구하게 된다.

 

 

현미 - 밤안개

 

 

이봉조가 애지중지하며 현미에게 전달한 ‘밤안개’는 8군 가수들의 전성시대를 견인한 히트곡이자 그녀의 데뷔곡이며, 한국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자리잡고 있다. 「밤안개」는 1962년 어느 날, 이봉조가 냇 킹 콜의 「It's Lonesome Old Town」을 듣고 휴대용 전자 오르간으로 편곡해서 현미에게 전해 주었던 곡이다.

‘밤안개’라고 번안되어 수록된 10인치 음반에는 각 면마다 4곡씩 8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손석우가 창작한 5곡 외에 일본에서 귀국하며 최초의 창작곡을 선사한 길옥윤의 ‘내 사랑아’, 그리고 이봉조가 편곡한 「밤안개」와 「슬픈 거리를」이 추가되어 있다.

 

앨범 녹음을 마친 현미는 한명숙 등과 함께 제주도 공연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공연비를 사기당하면서 2주일간 현지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의 데뷔앨범은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 곳을 가도 「밤안개」가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

인기를 실감한 소속사는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를 메인 넘버로 내세웠던 기존 초반의 타이틀곡을 「밤안개」로 수정해서 재반을 내놓았고, 이 앨범은 순식간에 5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며 대박을 터트리게 되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후 평범한 가수로 인식되던 이미자는 1964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취입하면서 최고 가수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 「동백아가씨」를 부를 가수로 내정된 가수는 당대의 인기가수였던 최숙자였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막 독립했던 신생회사 지구레코드는 높은 개런티가 부담스러워서 작곡가 백영호에게 긴히 요청을 해서 저렴한 개런티의 이미자를 대타로 나서게 했던 것이다. 1964년 여름,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에는 찜통더위를 피하기 위해 낡은 선풍기 한 대 앞에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현미와 이미자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 현미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이미자는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고, 이 두 곡은 두 사람 모두에게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하고 만다. 현미와 함께 이미자의 노래까지 동반 대박을 터트리자 ‘만삭에 녹음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풍문까지 돌 정도였다.

특히 「동백아가씨」는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하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웠다. 연주비마저 없어서 작곡가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을 마쳤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레코드도 동시에 메이저급 회사로 상승하게 되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생전에 “그땐 술집에서 술값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 구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대단한 열풍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작곡가로는 1950년대에 트로트와 팝을 오갔던 박춘석, 이봉조, 길옥윤의 스타급 작곡가를 비롯하여 김인배, 정민섭, 김호길 등 악단장을 겸한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1966년 박춘석이 최초의 스테레오 음반을 발표했으며, 1968년 신중현은 펄시스터즈의 히트를 시작으로 자신만의 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장발을 휘날리며 한대수가 귀국을 했으며, 트윈폴리오는 달콤한 포크 멜로디로 젊은이들에게 대중가요의 매력을 유감없이 전달했다.

 

또한 1969년 섹시 아이콘 김추자의 등장을 이어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가 내한을 하면서 대중가요계는 보다 풍성한 흐름으로 1970년대를 맞이하고 있었다.이처럼 1960년대 한국대중가요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장르와 대형 가수가 등장했으며, 산업적 규모로까지 성장하면서 기성세대가 주도하던 이전의 판도를 청년세대로 옮기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

 

 

 

 

대중가요에서의 스탠더드팝은 서양근대음악의 7음계와 기능화성을 기초로 하여 5음계로 이루어진 트로트 특유의 신파적으로 과잉된 비애의 미감을 현격하게 감소시켰다. 또한 피아노와 관악·현악기를 고루 배치한 빅밴드·캄보밴드의 편곡 방식, 화성을 중시하는 중창단의 유행 등, 서양근대음악의 어법이 좀 더 깊숙이 자리 잡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가사에서도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최희준의 「내 사랑 쥬리안」,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 등 서양적 근대성을 확연히 갖추어가는 대도시의 삶을 명랑하고 아름답게 그리거나,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김용만 「회전의자」 등 도시 서민들의 삶을 낙관적으로 그렸다. 슬픔의 감정도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 최희준의 「길 잃은 철새」, 정훈희의 「안개」 등에서처럼 신파적으로 흐느끼지 않는 절제된 비극성을 보여주었다.

 

 

 

 

스탠더드팝이 1960년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흐름이기는 했지만 트로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1960년대 초에 급격한 쇠락의 징후를 보였지만 1960년대 중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필두로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이 연달아 인기를 얻으면서 확실하게 부활했다. 이후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남진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의 인기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에 부활한 트로트는, 편곡과 가창에서 스탠더드팝의 특징을 받아들여 다소 담담하고 중후한 가창, 화성이 강화된 빅밴드·캄보밴드의 반주를 특징으로 하였다. 특히 선율에서의 변화는 두드러져 7음계적인 요소가 강화된 작품이 더 늘어났고, 이미자의 「사랑했는데」, 「서울이여 안녕」,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 번」, 「불타는 연가」, 배호의 「마지막 잎새」 등에서 보이듯 트로트를 주도한 사람들이 스탠더드팝의 형태를 지닌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두 양식 사이의 혼융은 활발해졌다.

 

 

 

 

 

 

 

이 시기 트로트의 부활이 가능해진 것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도록 트로트가 계속 확산되며 수용자 층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에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가 시골과 도시 하층민에게까지 보급되어, 대도시 젊은이들이 텔레비전과 음반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스탠더드팝과 달리, 트로트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60년대의 트로트는, 1930년대의 트로트와 달리 시골이나 향토적 이미지가 강하며, 급격히 산업화·서구화되는 대도시와 달리 다소 정체되고 뒤떨어진 시골과 하층민의 소외된 감정과 절망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등이 드러내 보이는 서울을 향한 절망감이나, 조미미의 「먼 데서 오신 손님」,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같은 하층민의 절망을 드러내는 노래들의 유행은, 트로트가 지닌 세상에 대한 소극적이며 비관적인 대응 태도가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한편, 1950년대까지 여전히 굳건하던 신민요는, 1960년대에 김세레나 등의 인기로 마지막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인기 레퍼토리들은 「새타령」,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기존 민요·대중가요의 리메이크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쇠락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반면에 1964년 비틀즈 바람을 타고 키보이스, 에드훠 등이 음반을 내기 시작한 록은 주로 공연에서 기존 곡의 연주에 머물었고, 에드훠와 퀘스천스를 이끈 신중현이 1968년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과 1969년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등 춤추는 여자가수의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1970, 71년 이후의 록 히트곡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대중음악의 활성화가 확실했던 만큼, 최초의 의미를 갖는 음반과 가수들이 넘쳐났다. 장르적으로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은 신중현이 결성했던 록밴드 에드포가 1964년 12월에 발표한 [에드훠의 첫 앨범]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펄시스터즈 최고의 히트곡인「커피 한 잔」은 신중현이 이끌던 애드포가 1964년 발표한 첫 앨범에서 명보컬리스트 서정길의 목소리로 발표되었던 노래 「내 속을 태우는 구려」를 원곡으로 하는 넘버이다.

 

 

 

이처럼 신중현은 자신이 부르거나, 최초 가수가 부른 노래가 제대로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면 시대와 상관없이 다른 가수에게 그들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부르게 하거나 버전을 바꿔 부르게 하면서 기어이 히트를 기록하게 만드는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더해서 신중현과 더 맨, 엽전들, 뮤직파워에서 연달아 연주를 했고, 김정미 역시 불렀던「아름다운 강산」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락 앨범은 신중현이 결성시킨 락밴드 에드포가 1964년 12월에 발표한 앨범으로 KBS TV에 출연한 멤버들의 스튜디오 연주 사진을 자켓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최초 발표 당시 그다지 주목을 이끌지 못했던 이 음반은 리드보컬 서정길의 독집으로 커버가 수정되어서 재발매되는 등 복잡한 절차를 지니고 있다.

 

 

 

 

녹음은 일반 가정집을 이용했던 장충녹음실의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서 진행되었으며, 정식 녹음장비가 아닌 미군의 휴대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길게 연결되어진 한 개의 마이크 주변에 모여서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비속의 여인」등 14곡의 녹음을 하루 만에 끝낸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천사도 사랑할까요」, 「굳나잇 등불을 끕니다」를 통해서 흥미롭게 확인되는 사실은 신중현사단의 1호 여가수는 펄시스터즈나 김추자가 아닌 장미화라는 점이다.

 

 

 

 

에드훠의 첫 앨범보다 5개월 앞서 발표된 키보이스의 데뷔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사실 그룹의 결성 시기가 가장 빠른 밴드는 미8군 장교클럽 하우스밴드로 활동했던 코끼리 브라더스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밴드로 김치스와 바보스도 있지만, 이들은 가수로서 가장 중요한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 논쟁에서 제외된다.

 

발매시기로 보자면 키보이스의 데뷔앨범을 국내 최초의 록밴드 음반으로 인증하는 것이 맞겠지만 에드포의 첫 앨범을 한국 최초의 락 앨범으로 인정하려는 분위기는 수록곡 모두가 신중현의 창작곡이고, 키보이스는 히트 팝송을 번안하거나 트로트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김영광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1963년 결성해서 미8군 무대와 일반 무대를 고르게 오가며 활동했던 키보이스는 많은 뮤지션과 가수를 배출한 그룹이다.

초기 키보이스는 영미 팝 음악을 번안해서 주로 불렀던 이유로 ‘한국의 비틀즈(Beatles)’로 불렸었다. 이들이 현재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을 때는 광화문까지 줄을 설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윤항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키보이스는 미8군 무대에서 송영란과 함께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패키지쇼를 펼치며 초기에 활동했다. 종로의 디쉐너와 무교동의 세시봉, 아카데미 등 음악감상실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처음에 악기를 연주하는 중창단으로 출발했지만, 이전 중창단과 달리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본격적인 밴드로 진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그녀의 입술은 달콤해/캥가루 사냥]이라는 첫 독집 앨범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이 번안곡이었고, 작곡가 김영광의 작품이 창작곡으로 자리했던 사실은 애드포와 함께 후세 평가에서 의견이 갈리는 사유이기도 하다.

 

흔히 1기 키보이스로 분류되는 시절의 멤버는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기타),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었고, 1969년에 코끼리 브라더스 출신의 장영과 박명수, 조영조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고상’과 ‘연주상’을 차지했다.

조용조를 축으로 재정비된 키보이스는 작곡가 김희갑과 김영광의 조력으로 「바닷가의 추억」과 「해변으로 가요」, 「님 떠날 시간」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1969년 탈퇴했던 차중락과 차도균은 솔로가수로, 윤항기와 김홍탁은 각각 키브라더스와 히파이브의 리더로 활동했다.

 

 

 

 

 

 

 

4부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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