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vol.2

포크송의 기세에 기성세대들을 대변하는 트로트의 아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에 다니는 어른들과 청소년들까지 통기타 배우기 열풍이 뜨거워졌다. 이에 학생들의 MT, 소풍, 캠프는 물론이고 여름휴가철에 전국의 산과 바다 등 “청년들이 있는 곳에 통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자, 나훈아 등 기성 트로트가수들도 포크송을 취입했을 정도로 통기타 음악은 70년대 청춘을 상징하는 노래로 각광받았다.

1970년 서울 종로2가의 YMCA 강당에서는 제1회 포크 페스티발이 개최되어 관심을 끌었다.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 공간이 부족했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도 적었다. 외국 번안곡이 넘쳐났던 그 시절, 젊은 포크송 가수들은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우리의 얼을 담자”며 우리 노래 창작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명동 서울 YWCA는 젊은이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급한 대로 직원식당을 개조해 개방한 단층 건물은 ‘청개구리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0년 6월 29일 서울 명동 서울 YWCA 청개구리 홀 공연에 젊은 포크가수들이 모이면서 명동 포크송 노래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청개구리홀은 의자도 없는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모두들 아무 불평 없이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연극과 영화를 즐겼다. 이곳을 통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이용복, 김도향, 은희, 방의경, 김광희, 이주원 등 한국 포크의 1세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개관 이후 매일 같이 엄청난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군사정권에 의해 공연은 1년 만에 문을 닫게 된다.

맷돌공연 음반은 국내 초창기 포크 신의 소중한 흔적을 기록한 음반으로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1970년대 명동 노래운동의 실체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맷돌공연은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시작되었다. 공연의 단골관객이었던 평론가 이백천의 사회로 1972년 9월 26일 명동 시공관(현 명동예술회관)에서 특별공연이 열렸는데, 그 실황을 담은 음반이 <맷돌 밝은 노래모음>이다. 이 앨범은 한국 포크 음악의 최전성기에 당대의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해 만든 실황 음반으로서 ‘맷돌 공연’의 실험성과 대중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앨범이다. 이 앨범은 19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4월과5월, 송창식, 김민기, 서유석, 양희은, 신창균 등 포크 가수들의 공연을 녹음한 최초의 음반이자 김민기, 양희은의 '아침이슬' 최초 라이브버전이 수록된 한국 포크의 명반이다.
1971년 서울대 미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회화과 대표로 노래를 부르겠다고 손을 든 2명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화 여중고를 나온 대구 출신의 이현경과 숙명여증고를 나온 박영애였다. 이 두 사람은 이렇게 팀을 결성하고 같은 미대 선배 김민기의 주선으로 당시 동아방송 라디오 인기 프로인 '3시의 다이얼'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며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자신들의 노래가 없던 이들에게 미술대 동기 김덕년이 방송 출연용 노래를 만들어줬다. 데뷔곡이 된 ‘얘기나 하지’이다. 1974년 졸업 기념으로 첫 독집 앨범을 발매하였는데 이 앨범은 이 듀엣의 은퇴 기념 음반이자 데뷔 음반이었다.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라' 등이 수록된 기교없이 맑고 순수한 목소리를 담은 현경과 영애의 유일한 독집은 70년대의 답답한 사회분위기를 정화시켰던 세레나데였다. 제작자인 오리엔트레코드의 나현구 대표의 제안으로 화음 창법이 아닌 번갈아 노래하고, 때로는 같이 호흡하는 방식으로 노래했다. 연주도 포크 질감을 살리는 클래식 기타 세션을 원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락밴드 동방의 빛이 세션을 맡았다.
1973년 해바라기란 이름의 무료 노래 공연이 매주 토요일 가톨릭 여학생회관을 주 무대로 하여 열렸다. 청개구리 공연이 기성 포크 가수들도 같이 참여하면서 포크의 저변을 확대했다면 해바라기 공연은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 청년 저항문화의 산실이었다. 오리지널 멤버는 ‘한국의 피터, 폴&메리’라 불렸던 강성학, 장상태, 배화순이었다. 외국 곡만을 불렀던 이들에 여학생회관 담당 꼴레드 모아 프랑스 수녀가 실망하자 김의철의 주도로 창작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에 젊은 관객들이 북적거리자 김의철은 상주 정보원들에게 목탁으로 머리를 얻어맞기도 하며 사퇴 협박을 받았다. 이에 김의철은 1975년 선배 이정선에게 공연의 진행을 넘겼다.

김의철의 뒤를 이어 해바라기 공연을 이끈 이정선은 한영애, 이광조, 김영미, 이주호 등과 그룹을 결성해 자연을 소재로 한 포크송으로 혼탁했던 7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정화시켰다. 1977년 발매된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 이 앨범에는 1970년대 후반 청년들이 즐겨 듣고 함께 화음을 넣어 불렀던 주옥같은 포크 명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음반은 참여했던 멤버 대부분에게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김정호는 1973년 남성듀오 사월과 오월의 3기 멤버로 잠시간 활동한 이후, 솔로로 독립해서 1974년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김정호를 단숨에 대형가수로 만들어버린 이 앨범에는 김정호가 창작한 9곡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리메이크한 트랙까지 총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김정호의 노래는 학생층에 한정되었던 포크송을 온 국민이 사랑하는 장르이자 음악으로 영역을 넓힌 의미를 지닌다.
대표곡 ‘이름 모를 소녀’는 총각시절에 아내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사랑앓이의 감정을 스케치한 곡으로 음울하지만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특히 사랑을 받았던 명곡이다.
1974년 김수영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주인공 정애정은 노래 제목에서 착안해 예명을 ‘정소녀’로 정했을 정도로 영화 역시 히트를 기록했다.
대부분 사회 풍자적인 노랫말과 어두운 곡이 포진한 양병집의 첫 독집 <넋두리> 는 발매 1년 만에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고 판매 금지되었다. 시작부터 활동에 제약을 받은 양병집은 금지 조치 이후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1970년대의 대표적인 3대 저항 포크 가수로 회자됐다.
1980년대 이후 한국 포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정태춘은 1978년 6월 제대 후 평소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군 복무 당시 습작했던 여러 곡을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에 데뷔 음반< 시인의 마을 >을 발표하게 된다. 앨범 발매 당시는 긴급조치 9호 이후 음반에 대해 여전히 사전검열이 진행되던 때였다. 앨범의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은 정권의 서슬 퍼런 검열의 칼날에 의해 가사 내용이 우울하고 방랑적이라는 이유로 가사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수록되었다.
정태춘은 추후 베스트 앨범에서 '시인의 마을'을 원래 가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시인의 마을'을 선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태춘은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사전검열제도의 폐지를 위해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결국 정태춘은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사전검열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앨범은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56위를 차지했던 작품으로 12인치 LP 발표되기 이전에 7인치 싱글이 먼저 제작되었다.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 외에도 낭만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매력적인 '촛불'이 크게 히트하면서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하며 한국 포크의 새로운 기수로 급부상했다. 정태춘은 1집 앨범의 반향에 의해 정태춘하면 뒤따르는 이름을 탄생시킨다. 바로 박은옥이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1980년 결혼해서 주옥같은 앨범을 발표해 나오며, 한국 포크 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왔다.
조동진은 진공관 앰프를 직접 만들만큼 오디오광이었던 큰형 조동완 덕분에 음악을 쉽게 접하며 동생 조동익과 함께 성장했다. 조동진의 가족은 이처럼 문화예술과 연관이 깊은 구조를 띄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 출신 영화감독인 조긍하였다. 조동진의 실질적인 음악 인생은 1966년 미8군 무대에서 재즈락 밴드인 쉐그린 (The Shagreen)과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며 시작되었다. 1996년까지 5장의 앨범을 발표해 나온 조동진의 1집 앨범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뒤늦게 제작된 음반이다. 엄밀히 그의 무명 생활은 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릴 정도로 조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그의 음악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8군 활동 이후에 이장희와 윤형주 등과 음악적 교류를 나눴으며, 시인 고은과도 문화예술을 함께 공감해 나왔다.
이 시기를 전후에서 조동진은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3집]에 수록된 '작은배'와 김세환이 부른 '그림자 따라', 그리고 최헌과 투 코리언스의 '들리지 않네', 윤형주의 ‘작은 불 밝히고’ 등을 작곡해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데뷔 이전에 오랫동안 실연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져나왔다고 볼 수 있다.
전곡을 작사·작곡한 조동진의 데뷔앨범의 완성도는 오랜 무대 경험과 음악적 경륜에 걸맞게 매우 높게 담겨져 있다.
수록곡 대부분은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이영림 등과 함께 했던 동방의 빛 당시에 완성된 노래였다.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조동진의 데뷔 앨범은 동방의 빛이 연주를 담당하고 있다.
타이틀곡 '행복한 사람'은 김세환에게 준곡으로 녹음까지 마쳤으나 76년 대마초파동 당시 활동 금지로 발매가 되지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곡으로 조동진의 가창으로 제대로 된 히트를 기록하게 되었다. 꾸준하게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이 앨범은 1986년까지 재반과 재녹음반 등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며 3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상업적인 성공 외에도 이 앨범은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명반’에 선정되는 등 뮤지션과 평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동진은 냉소적인 외모와 연결되는 저항적인 음악보다는 삶 속에 묻어나는 여러 서정적인 감성과 정교한 감성의 울림을 노래하는 가수이다. 이는 조동진의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행복한 사람’에서 분명히 전달된다. 이 앨범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모든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친 음반으로 신중현 이후 최고의 계보라 할 수 있는 '조동진 사단'의 시작을 알린 앨범이기도 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대마초 파동이 일어나면서 대마초 흡연 혐의로 수많은 연예인이 체포되고 구금되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 12월 4일 경향일보에서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이 3명의 가수가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보도된 것을 시작으로 이틀 뒤에는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신중현과 가수 김추자도 구속되고 이수미, 김세환, 김정호, 장현, 정훈희, 임창제, 임희숙 등 다수의 연예인들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거나 출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197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대마초 흡연은 망국적 행위이며 대마초 흡연자에 대해서 현행법상 최고형을 적용하여 엄벌하라고 검경에 지시를 내렸고 동년 4월에는 대마관리법을 제정하여 대마초 흡연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근거를 만들었다.
1960년대말 이후로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대마초를 피웠는데 당시에는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에서 예고 없이 대마초 단속을 시작하여 대마초 흡연 혐의를 받는 연예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6년까지 단속이 이뤄져 코미디언 이상해, 이상한, 배우 정미하, 영화감독 이장호도 체포되었는데 이렇게 붙잡힌 연예인의 수만 137명에 달했다. 1977년에는 조용필도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구타를 비롯한 고문을 당했는데 채혈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아 풀려났지만 신중현과 함께 10.26 사건이 터질 때까지 출연 정지를 당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종식되고 나서도 1980년 보컬 그룹 사랑과 평화와 국악인 5명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됐고 1983년에는 연예인 17명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던 포크 음악과 록 음악 장르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몰락하면서 대중음악계가 엄청나게 후퇴하고 말았다. 특히 외국에 비해 한국 대중음악 계보의 역사에서 록 음악 장르가 유독 상대적으로 빈약한 이유가 바로 이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한국 록 음악의 흐름이 크게 단절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평론가와 학자들이 많다.
포크 장르와 록 장르가 몰락하자, 반대로 트로트 장르가 이후 오랫동안 크게 융성하게 된다. 이런 영향으로 70년대까지 록 음악 장르를 하던 밴드 뮤지션들이 이후 대거 트로트 장르로 전향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조용필, 윤수일, 최헌 등이다. 이들은 태생이 록 밴드였던 터라, 밴드의 형태와 악기 구성은 록 음악 기반이면서도, 부르는 곡 자체는 트로트에 가까운 '트로트 록', 또는 '트로트 고고' 장르를 정립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조용필은 활동기간 내내 트로트와 록 음악을 오가는 음악적 실험을 꾸준히 하게 된다.
대마초 파동 이전에 성행하던 자생적 청년 음악 문화는 이후 텔레비전의 폭발적 보급, 유신 독재의 심화, 군사 정권의 연장 등과 맞물려, 다분히 관제 기획형 성격을 지닌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문화로 전환된다. 이때부터 지상파 방송국 가요제 출신의 뮤지션들이 대중음악계에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련의 사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이 바로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었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독보적인 스타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겸 싱어송라이터였던 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대로 찍혀서 다른 뮤지션들 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억압을 당했고, 이 때문에 이후에도 전성기 때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7부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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