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vol.3
1970년대초반 외국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록 음악이 대세인 시기였는데 록밴드인 그룹사운드의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크게 부상했다. 「해변으로 가요」의 키보이스, 「초원의 빛」의 히식스, , 「달무리」의 영사운드 등이 대표적이며, 그룹 출신으로 솔로로 활동하는 가수로 「마른 잎」의 장현, 「무지개빛」의 윤항기 등이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아직 이 시기 록의 대부분은 기존 작곡가들의 곡에 의존해 스탠더드팝의 선율에 록사운드의 편곡이 결합된 양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 못하는 곡이 많았다. 록밴드의 무대 연주 레퍼토리 대부분은 신작이 아닌 외국 곡의 연주였다. 1974년 청년문화의 기운이 최고조에 오른 시기에 록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이 발표한 「미인」은 1970년대 전반기 가장 파격적인 록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신중현까지 포함하여 이 시기 록은 여전히 익숙한 가사의 사랑 노래였고, 포크송처럼 독자적인 세계인식과 태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신중현은 많은 가수들을 발굴하여 곡을주고 음반을 제작하였으며, 크게 히트한 수많은곡들을 작사작곡하면서 이렇게 초창기 국내 대중음악 자체를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또는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기도 한다. 신중현이 발굴하여 히트시킨 아티스트을 신중현 사단이라고하는데 사단의 대표적인 스타들에는 김추자, 펄시스터즈, 김정미, 장현, 박인수, 이정화 등이 있다.
1964년에 미8군 연예단을 나와서 록밴드 애드 훠를 결성하고 1집 <비속의 여인>을 발매하며 데뷔했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비속의 여인'은 이후 수십년간 신중현이 만들어 발표하게 되는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의 기념비적인 첫 시작이었다. 애드 훠는 당시 한국에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최초의 밴드 중 하나였고,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록큰롤 밴드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키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단지 서양 록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서양 록음악과 구별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화된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로큰롤은 너무나 생소한 음악이었고 스탠더드 팝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당시 한국 대중음악 토양의 한계로 인해 애드 훠의 데뷔 앨범 <비속의 여인>은 그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대중음악의 판도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임팩트는 없었다.
신중현의 걸작 '미인'이 수록된 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은 말이 필요 없는 한국대중음악사 최대의 명반이다. 1973년 5인조로 출발했던 신중현과 엽전들은 1974년 신중현(기타), 이남이(베이스), 김호식(드럼)의 3인조로 재편되었다. 6개월 간에 걸쳐서 합숙을 하며 작업된 레코딩 과정 속에서 이 음반은 전체적으로 싸이키델릭에 주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녹음되었다.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빅히트를 기록하며 흥행과 작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며 1970년대 중반 한국대중음악계를 강타하고 말았다. 빅히트가 터진 ‘미인’은 동명의 영화로 1975년 8월 30일 개봉되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서 신중현은 주연배우로 직접 출연했고 음악감독까지 담당했다. 그러나 이 음반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신중현으로 인해 판매금지와 더불어 무려 7곡이 방송금지 처분을 당했다.
3공 시절 청와대에서 신중현에게 박정희 찬양가를 만들라고 강권을 하나 신중현은 거절한다. 그 뒤 박정희 정권에 완전히 찍힌 신중현은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고난을 겪었고, 방송 출연 금지 및 업소 출연마저 막히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 찬양곡 요구를 거절한 이후 얼마 후에 발표한 곡이 그 유명한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노래는 처음에 "신중현과 더 멘"의 곡으로 박광수가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처음 녹음되었다(1972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파동 이후 '아름다운 강산'은 한동안 본 의미와는 한참 다른 건전가요로 소개되었다. 후에 이선희가 커버해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신중현은 자신의 소속 가수 외에도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주어 히트를 시켰고, 또 프로듀싱을 하여 데뷔시키기도 했는데, 이정화에게 준 '꽃잎'이라는 곡은 후에 영화 <꽃잎>(1996) 주제가로도 쓰였다. '안녕하세요'로 인기를 끌었던 장미화에게도 곡을 주었고,. 김추자 이전에 김상희 음반도 만들었다. 윤수일과 함중아가 몸담은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도 신중현이 제작했다. 이문세의 2집 전체도 신중현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훗날 김완선이 1987년에 불러서 히트한 일렉트로닉 댄스 곡인 '리듬 속의 그 춤을'도 신중현의 곡이다.
키보이스는 1963년 미8군 무대와 일반 무대를 오가면서 활동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기타),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로 구성된 이들은 활동 초기 ‘한국의 비틀스’라는 별명에서 보듯 당시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던 비틀스의 이미지와 컨셉을 차용하여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주로 영미 팝 음악의 번안곡을 노래, 연주했으며 애드 훠, 코끼리 브라더스와 더불어 한국 록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다. 1969년 5월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고상’과 ‘연주상’을 차지하면서 인기 그룹으로 부상했고, 그 후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들의 대표곡인 '해변으로 가요'가 일본의 밴드 더 아스트로 제트의 곡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 판결이 났다.
히파이브는 조용남(기타리스트)이 1968년 키보이스에서 활동했던 김홍탁과 한웅(키보드), 유영춘(보컬), 김용호(드럼)와 함께 히파이브를 결성했다. 1970년 해체될 때까지 '초원', '꿈꾸는 사랑', '헤이 쥬드' 등을 히트시켰다. 유영춘은 이후 영사운드에서 '등불', '달무리'라는 히트곡을 냈다.
히식스는 김홍탁이 1969년 조용남, 유상윤, 권용남, 이영덕, 김용중과 함께 히식스를 결성했다. 1970년 1집 타이틀곡 '초원의 사랑'을 히트시켰고, 1970년 제2회 플레이보이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키보이스를 누르고 우승했다. 이후 김용중 대신 명지대 3학년이었던 보컬 최헌을 영입했다. 최헌 영입 이후 '물새의 노래' '당신은 몰라' '사랑의 상처'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히식스는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등 김홍탁 자작곡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72년 김홍탁의 도미 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정훈희의 오빠 정희택을 영입해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2011년 재결합 공연을 하기도 했다.
데블스는 한국 최초의 소울(Soul) 그룹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8년 결성된 6인조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잘났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을 담은 악마들’이란 뜻의 ‘데블스(Devils)’로 밴드 이름을 짓고 경기도 파주의 기지촌 클럽으로 갔다. 1970년 초 이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동아방송 라디오 PD 이해성의 주선으로 데블스는 임희숙과 함께 「밤의 그룹사운드」에 처음 출연했다. 이후 김상희가 진행한 TBC TV 「백화가요 쇼」에 출연하면서 이들의 존재가 방송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MBC 라디오 「젊음을 가득히」의 전속 밴드가 된 데블스는 이수만이 진행했던 TBC 라디오 「비바 팝스」 등 여러 방송에서 인지도를 쌓아갔다.
1968년부터 시작해 화제를 모은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는 신인 뮤지션의 등용문이자 각 레코드사의 가수 픽업장이었다. 1970년 7월 제2회 플레이보이 배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대상은 히식스, 금상은 라스트찬스가 차지했다. 그러나 화제를 모은 밴드는 단연 데블스였다. 야광 해골을 그린 의상을 입고, 시체로 분장한 쇼걸을 담은 관을 연석원이 끌고 등장한 데블스의 무대 매너는 충격적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이 대회에서 구성상을 수상했다. 리드 싱어 연석원은 제임스 브라운의 'Goodbye My Love'를 불러 가수왕상을 받았다. 이에 「주간경향」에서는 1970년 9월 30일자 음악 살롱 실버타운 코너에 데블스를 클럽의 대표 주자로 소개했다.
닐바나ㆍ마이하우스 등 당대 최고의 ‘고고 클럽’에서 활동한 데블스는 맨발로 무대를 누비고 잠옷ㆍ망토 복장으로 등장하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1974년 발표한 ‘그리운 건 너’가 대표곡이다. 데블스는 가수 이은하의 기타 세션으로도 활동했고, 고인은 이은하의 ‘밤차’ ‘아리송해’와 정난이의 ‘제7광구’를 편곡에도 참여했다.
1970년대 데블스의 활약상은 2008년 조승우ㆍ신민아 주연의 영화 <고고 70>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개봉 이후 데블스는 부활을 시도, 작곡과 보컬을 맡은 고인을 주축으로 현역 뮤지션들이 뭉치기도 했다.
영사운드는 5년 정도 미8군 무대에서 실버코인즈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 조선호텔 옥상에 생긴 나이트클럽 출연이 성사되자, 밴드 이름을 젊은 소리란 뜻의 영사운드로 변경했다. 영사운드는 리드 기타 안치행, 보컬 유영춘, 키보드 장현종, 올갠 장성현, 그리고 탈퇴한 베이스 기타 오덕기를 대신해 장대현과 드럼 박동수를 영입하면서 6인조 밴드가 되었다. 밴드 영사운드의 대표곡 <달무리>는 당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던 TBC 동양방송의 음악프로그램 「신가요 박람회」의 입상곡이었다. 1971년 라이브클럽 포시즌에서 사회자로 활동한 박광희 동양방송 PD의 소개로, 안치행은 자신이 최초로 작곡한 데뷔곡 '달무리'로 「신가요 박람회」에 출연했다. 이후 안치행은 이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고향의 벗', '등불'을 연이어 작곡했다. 1972년에는 서울 명동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생음악 살롱 포시즌 양쪽을 주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1972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밴드 영사운드의 데뷔 음반 「영싸운드 히트 퍼레이드」를 발매했다. 라틴 계열의 조용한 음악을 추구했던 이들의 노래는 앨범 발매 이후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구성진 느낌의 잔잔한 수록곡 중 타이틀곡 '달무리'와 '등불 이 청년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보였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TBC 신인 여가수상을 수상했던 인기 가수 장미리와 함께 스플릿 앨범을 발매했다. 또한 쇼 연출의 귀재였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한 동양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 밴드가 되었다. 영사운드의 리더인 안치행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조용필, 윤수일, 최헌, 주현미, 문희옥, 박남정 등 스타 가수들을 키워낸 음반 제작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장계현은 1970년 키 브라더스에 가입하게 되고, 키 브라더스의 멤버로 닐바나 등에서 활동하던 도중 함께 출연했던 밴드의 리더 유상봉의 제안으로 그 밴드에 합류하며 결성되었다. 1971년 번안곡을 위주로 담은 데뷔앨범 <템페스트 힛트곡 제1집>을 발표하고, 닐바나, 풍전, 타워, 센트럴 등 고고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이며 순식간에 ‘고고클럽의 왕자’로 스스로의 위치를 자리매김한다. 1973년 발표한 두번째 앨범에서 '잊게 해주오'라는 곡으로 큰인기를 얻었으며, 그 해 록그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록 가수상을 수상했다. 장계현은 1977년 솔로로 독립하여 '나의 20년'이 수록된 <장계현 골든앨범 77>을 발매하며 ‘인기 가수’의 위치로 등극하여 당시 방송 가요상을 휩쓸었다.
최헌은 1967년 록 밴드 차밍 가이스(Charming Guys)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음악 분야(가요계)에 첫 데뷔하였으며, 1971년 록 밴드 히식스(He.6)의 기타 연주가 겸 보컬리스트로 스카우트되었고, 1974년 최헌은 새로운 멤버 7명으로 검은 나비를 결성하였다. 최헌은 허스키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조용남(베이스 기타리스트)이 작사하였으며, 김홍탁(기타리스트)이 작곡한 '당신은 몰라'라는 곡을 발표해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1976년에 새로운 그룹 호랑나비를 결성하여 안치행 프로듀서가 작사 및 작곡한 '오동잎'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이는 국민적 애창곡 중 하나가 되었다. 솔로전향 1년만인 1978년에 '앵두'라는 곡과 1979년 '가을비 우산속'이라는 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결국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서울 종로구 단성사 극장에서 최초의 리사이틀을 한 가수가 되었다. 대표곡으로 '오동잎', '구름 나그네', '가을비 우산 속', '당신은 몰라', '순아!(사랑!)', '앵두' 등이 있다.
함중아는 1972년 형인 함정필과 함께 고아원 친구들과 그룹사운드 골든 그레이프스를 결성한다. 결성 후 무작정 신중현 사무실을 찾아간 이들을 신중현은 악기 제공은 물론 거처까지 제공해주었다. 한국 록 음악의 대부라고 불리는 신중현과의 만남은 함중아의 음악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골든 그레이프스는 1972년 음반 데뷔를 했는데, 이 앨범은 신중현이 모든 곡을 만들고 리드기타 연주 및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전형적인 신중현 사운드의 앨범이었다. 함정필의 넘실대는 키보드 사운드를 위주로 한 사이키델릭 록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를 통해 함중아는 신중현으로부터 기타를 사사받으며 본격적인 음악적 기초를 다져나갔다.
음반 발표 이후 신중현이 밴드에서 빠지면서 팀의 주축은 함정필과 함중아 형제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나이트클럽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하지만 함중아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골든 그레이프스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게 된다.
1978년 함중아는 자신의 밴드 '함중아와 양키스'를 결성하여 '안개속의 두 그림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 그룹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5인조 혼혈 그룹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혼혈아들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상황에서, 이들의 등장은 매우 파격적이고 화제성이 높았다.
함중아와 양키스는 1979년 이후 유행하던 뽕락(트로트+락)으로 인기가수의 대열에 올랐다. 대표곡으로는 '풍문으로 들었소', '조용한 이별', '내게도 사랑이', '안개속의 두 그림자', '카스바의 여인' 등이 있다. 이들의 음악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내게도 사랑이'는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제작사는 부족한 곡 수를 채우기 위해 가요제와 무관한 곡을 삽입한것이라고 한다. 이 곡을 통해 함중아와 양키스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록과 트로트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당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윤수일은 1976년 신중현 사단의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혼혈아 중심의(멤버 6명 중 4명이 혼혈 출신) 밴드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함중아가 탈퇴하며 그 자리에 윤수일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 1977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발탁되었고 당시 안타프로덕션의 사장이자 작곡가인 안치행의 눈에 띄어 음반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 밴드명 대신 가장 스타성이 돋보였던 윤수일을 전면에 내세운 '윤수일과 솜사탕'이라는 이름을 썼다. 전 수록곡 9곡 중 8곡이 밴드의 리더인 건반주자 함정필의 곡들이었는데 나머지 한곡이 바로 안치행이 작곡한 트로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였고 이 곡이 대히트를 친다. 앨범 전체적으로 골든 그레이프스 시절의 싸이키델릭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윤수일의 보컬이 전면에 나선 가요 앨범으로 느껴진다. 이 때문에 밴드는 트로트 풍이 좀 가미되더라도 대중적이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고자 했던 윤수일과 정통 록 사운드를 지키고자 했던 나머지 멤버들 사이에 내분이 생겨 해체되고 그는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안치행의 프로듀스 하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 공식적으로 5장의 트로트 풍이 가미된 가요 앨범을 더 내면서 인기 가수 대열에 올랐다. 가요 프로그램은 물론 공개 코미디 등 TV 예능에도 자주 모습을 비추면서, 매력적인 보이스와 잘생긴 얼굴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던 1981년 윤수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윤수일밴드를 이끌고 록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윤수일밴드 1집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인생의 정점을 달리는 시기가 시작되는데, 번안곡 2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모두 윤수일의 자작곡이었다. 윤수일의 자작곡이 대부분이지만 솔로 가수의 백밴드가 아닌 밴드 지향적인 음악으로 지금 들어도 근사한 기타 리프를 선보이는 '떠나지 마'와 '제2의 고향' 그리고 '비' 같은 넘버에서는 블루지한 긴 기타 솔로가 들어있다.
이듬해 1982년 '아파트'가 담겨있는 2집이 발매되었고 이 노래가 전국적인 대히트를 치면서 시대를 넘어선 최고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는 막 잠실에 우후죽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 노래 역시 윤수일 본인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며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군대에 갔던 친구가 돌아와 보니 여자친구 가족은 그에게 연락도 없이 외국으로 이민 간 상태였고 아파트 초인종만 누르다 결국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국적이고 수려한 외모로 1980년대 당시 몹시 큰 인기를 끌었고 '떠나지마', '제2의 고향', '유랑자', '아파트', '황홀한 고백', '아름다워', '환상의 섬' 등등 수많은 히트곡 및 명곡들을 남겼다.
김정미는 1971년 신중현사단에 들어와 영화 <대합실의 여인>, <늑대와 고양이들>의 OST를 불러, 국내에선 특이한 경력으로 사이키델릭 록 보컬리스트로 데뷔한다. 이 후 신중현의 록 밴드 The Men과 엽전의 록 보컬리스트로 활약했으며, 신중현과 실험적인 한국 사이키델릭 록의 기념비적인 음반 <바람>과 <NOW>를 발표했다. 1973년 발매된 정규 5집 <NOW> 에 수록된 '봄'은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인트로에 쓰였다. 1974년말 MBC-TV의 히트드라마 주제곡 '갈대'(신중현곡)를 부르면서 톱가수의 대열에 올랐는데 이 곡은 1974년 9월 <이건 너무 하잖아요/갈대>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이곡의 히트로 당시 밀려드는 방송과 밤무대 요청은 한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마초 파동이후 당시 정부에 의한 창법 저속과 금지곡 판정 등이 계속되어 결국 6년 간의 음악 활동을 마치고 1977년에 음악계를 떠났다.
산울림은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의 삼형제로 구성되어 1977년 <산울림 새노래 모음>로 데뷔했다. '아니벌써'의 히트로 1집 레코드는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1집의 대박에 흥분한 음반사는 2집부터 최고의 장비를 구입해 주며 다음 앨범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작된 산울림의 2집 앨범은 사운드적으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적인 시도 등 여러 실험적인 요소가 녹아내린 앨범이다. 그럼에도 발매 이후 1주일 만에 1만장, 한 달 만에 3만장이 판매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는 김창완의 대학 졸업으로 1977년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지 못했지마, 샌드페블즈에게 선사해서 대상을 수상한 '나 어떡해'의 산울림 버전이 수록되면서 더 큰 판매를 올릴 수 있었다. 타이틀 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2분 여의 긴 전중도 불구하고 빅히트를 기록했고, 서정적인 발라드 넘버 '둘이서'도 학생층에 각광 받았다. 그리고 전통 가락을 현대화시킨 트랙 '떠나는 우리님'의 음악적 정서는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외에도 '안개 속에 핀 꽃'과 '이 기쁨'과 같은 노래들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성적인 연주가 더해지며 산울림의 음악성 역시 높게 평가되었다. 또한 이 앨범에서 다양한 감성을 주입시킨 김창완의 가사는 이후 대중가요 작법에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더해서 산울림은 같은 해에 TBC라디오방송극의 주제가 ‘빨간풍선’을 부르면서 산울림 인기의 파장은 더욱 커져갔다.
초기(1~3집)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개구장이>나 <산할아버지>, <외계인 ET>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이는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는 1978년 최이철과 김명곤을 주축으로 결성된 팀으로 대한민국 펑크의 개척자로 여겨지고 있다. 10년여 기간동안 여러 히트곡을 내며 1970-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밴드로 평가받는다.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뮤지션들인 "서울 나그네"의 코어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로 DJ로 활동하던 이장희가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레코딩 데뷔 당시 멤버는 10대 때부터 천재로 불리던 기타 겸 보컬 최이철, 키보드 겸 보컬 김명곤, 키보드 이근수, 베이스 Sarvo, 드럼 김태홍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극강의 연주력으로 대한민국에 펑키 사운라는걸 최초로 선보인 밴드이다. 1978년 1집 <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하였는데 사르보라는 이탈리아 출신 베이시스트는 무대에서 당시 초퍼 슬랩 주법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사랑과 평화의 펑키한 느낌을 잘 살려주었다 한다.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펑키 장르를 소화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1집 앨범은 지금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그 중에서도 키보디스트 김명곤의 화려한 신디사이저 연주와 작, 편곡 능력은 밴드의 상징이었다. 이어 베이스를 송홍섭으로 교체한 2집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를 발매했고, 타이틀곡인 얘기할 수 없어요와 더불어 B면을 여는 트랙 '장미'가 크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밴드의 두 축인 최이철과 김명곤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에, 드럼을 맡았던 김태홍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밴드 전체가 크게 침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8부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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