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요

우리나라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봄비'로 기억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1947년 9월 3일 ~ 2025년 8월 18일)는 1970년에 발표한 '나팔바지', '봄비'를 시작으로 '펑키 브로드웨이(Funky Broadway)' (1970년), '의심받는 사랑(Suspicion)' (1971년), '꽃과 나비' (1975년) 그리고 대마초 파동 이후 발표한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 (1980년),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텐데' (1989년), '해 뜨는 집' (1992년)에 이어 마지막 취입곡 '준비된 만남' (2013년 12월)까지. 총 20여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가수 박인수의 인생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자신의 본명이 ‘백병종’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6.25 전쟁 이후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회자되던, 말 그대로 ‘생일 없는 소년’이었다.
그의 최초 기억은 전쟁 당시 피난열차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치고 혼자가 되어 어머니를 찾아 헤매던 일이었다. 그때부터 행여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기차에서 껌을 팔고 다니던 어렴풋한 기억 정도다. 어린 박인수는 노래를 곧 잘 불러 ‘신라의 달밤’ 등을 부르면서 껌을 팔다가 한 미군의 눈에 띄게 되는데, 그의 도움을 받아 보육원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미군을 따라 서울 후암동 미군부대 주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박인수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바로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었다. 미군부대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서구 음악, 특히 흑인음악에 노출된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의 깊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이는 후에 그가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가 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그를 보호해 주던 미 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토마스의 복무기간이 끝나자 그를 따라 미국 켄터키주로 입양된다. 후암동에 있는 삼광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언제 입양되었는지, 몇 살 때였는지 홀트아동복지회 등에도 전혀 기록이 없어요. 본인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고…. 아마 미군이 개인적으로 입양했던 것 같아요.”  부인 곽복화 여사(74)의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때가 아닐까 하는데, 왜냐하면 돌아가실 때까지 한글에 받침이 있는 글자를 못 썼거든요.”
주변에는 지금까지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의 주민등록상 생일은 1947년 9월 3일이다. 이는 후에 임의로 만든 주민등록번호다. 박인수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47년생으로 살았다. 그가 마흔 살에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헤어진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태어난 해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박인수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태어난 곳과 나이를 알게 된다. 그는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 길주, 이름은 한문으로 백병종(白炳鍾)이었다.

박인수의 부친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함경북도 길주로 이주해 살았다. 1.4 후퇴 당시 어머니는 어린 박인수를 데리고 단둘이 피난길에 올라 할아버지가 계시는 김제의 본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본가에서는 아이부터 찾아오라며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인수를 찾아다녔다. 인수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기차를 떠나지 못하고 열차 안에서 껌을 팔며 어머니를 찾아 헤맸듯. 어머니 역시 그러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잃어버리고 몇 년 동안 그 열차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며 행상을 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어떻게 원주까지 오셔서 저희 아버님을 만나 우리 세 남매를 낳고 사셨어요.” 삼 남매 중 막내인 임선식 씨(63)의 말이다. 그렇게 알게 된 나이와 태어난 곳이었지만 박인수는 만년에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또다시 태어난 고향과 나이를 잊어버린 채, 눈을 감는다.  

 

 

아무말도하지말아요

 

미국으로 입양된 박인수는 ‘토머스 조지 에이 리처드슨(Thomas George A Richardson)’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캔터키 중학교에 다닐 당시 별명은 로키(Rocky)였다고 했다. 왜 그렇게 불렸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유년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그를 입양했던 양아버지와 달리 양어머니의 불만은 점점 냉대로 이어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양아버지는 그를 뉴욕으로 보낸다. 그리고 뉴욕 베어모어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결국 그는 가출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는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박인수를 괴롭혔다. 미국에서 접한 흑인음악은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가져다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던 외로움과 향수로 그는 집을 나와 뉴욕 할렘가를 전전하던 중 양아버지가 찾아와 건네준 생활비로 우여곡절 끝에 홀로 귀국한다. 그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3년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무 살인지, 스물한 살 때였다고 했다.  

그의 귀국은 1964, 5년 무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무렵부터 미군부대 주변에서 노래부르던 모습을 기억하는 관계자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인수는 다시 미군부대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미 8군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에게는 더 큰 꿈이 있었다. 미국에서 경험한 음악, 특히 소울과 블루스에 대한 열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한글은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영어는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이러한 언어적 배경은 후에 그가 영어 가사의 소울 음악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고아로, 또 입양아로 그가 겪었을 남다른 고통의 시간을 치유해 주는 건 역시 음악이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은 점차 소문이 나, 운명처럼 음악인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된다.  
“박인수 씨와 같이 미8군쇼 무대에 섰던 곳은 춘천 부근의 한 미군클럽이었어요. 흑인들만 출입하는 사병 클럽이었는데, 인수가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흑인들과 쉽게 친해졌죠”
훗날 ‘아름다운 강산’을 부른 더맨(The Men)의 보컬 박광수(2022년 작고)는, 박인수와 함께 미8군 시절 노래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우리들이 구사하는 음악은 주로 흑인 소울이나 리듬 앤드 블루스였기 때문에 반응이 매우 좋았죠. 특히 인수는 뉴욕 할렘가에서 몸에 밴 흑인 특유의 리듬감으로 절규하듯 토해내는 소울이 압권이었습니다.” 

1967년 어느 날, 박인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만남이 이루어진다. 서울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그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신중현의 회고에 따르면, 키가 훤칠한 한 남자가 찾아와 자신을 한번 테스트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뭐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솔(흑인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답한 박인수의 노래를 들은 신중현은 그날 저녁 바로 무대에 세웠다. 

그 클럽은 백인클럽이었지만, 문 밖에서 박인수의 음악을 듣던 흑인들이 친구들을 몰고 와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심지어 어떤 흑인은 박인수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박인수의 소울 음악이 얼마나 진정성 있고 감동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신중현은 "박인수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소울 가수다.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박인수는 본격적으로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한국 록과 포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신중현과 함께하면서, 박인수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의 음악은 단순히 서구 음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경험과 한국적 정서를 흑인음악의 형식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1970년 초, 당시 신중현은 자신이 이끌던 그룹 ‘덩키스’를 해체하고 잠시 ‘그룹 제로’를 이끌다가 1970년 1월부터 ‘신중현과 퀘션스(Questions)’란 새 그룹을 결성한다. 박인수는 이때 ‘퀘션스’의 객원보컬로 참여, <나팔바지>(펄시스터즈, With 박인수, 1970년 3월), <봄비/기다리겠소(1970년 4월)> 등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특히 절규하는 듯 거침없는 창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봄비

 

 

박인수의 첫 취입곡 '나팔바지'는 TV 드라마 주제가다. 1970년 3월부터 5월까지 TBC-TV <유호 극장>을 통해 매주 일요일 밤에 방송되었다. 총 14회에 걸쳐 방영된 이 <나팔바지>는 70년대 초, 밤업소인 살롱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코믹 드라마로 등장인물의 호칭도 각각 ‘나’, ‘팔’, ‘바지씨’ 등이었다.   

그룹 퀘션스는 결성과 동시에 명동 유네스코 회관 11층에 있는 레스토랑 ‘스카이 파크’에서 3개월 계약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이때 킹레코드사 측에서 음반을 제의해 와 퀘션스 첫 음반이 발표된다. '봄비'(박인수), '여보세요'(박인수), '그대는 바보'(송만수) 등이 수록되었다.   

'봄비'는 신중현이 덩키스 시절에 가수 이정화를 통해 1년전 먼저 발표한 노래로 박인수 특유의 흑인 냄새 물씬 풍기는 소울 풍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노래이다. 원래는 10분에 가깝게 녹음한 것이었지만 킹박(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이 3분 정도로 편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소울풍의 호소력 짙은 '봄비'는 이후 박인수를 지칭하는 대표곡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소울 싱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이어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중현 시민회관 라이브/실황 앨범>을 통해 박인수는 '펑키 브로드웨이(Funky Broadway)'와 샘 쿡의 ‘어 체인지 이즈 고나 컴(A Change Is Gonna Come)’을 발표한다. 이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마니아들로부터 소울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A Change Is Gonna Come

 

'A Change Is Gonna Come'(변화가 찾아올 것이다)는 샘 쿡이 부른 소울 명곡으로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시기에 탄생한 이 곡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도 변화와 자유를 향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메시지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노래다.  

박인수의 창법은 이 노래와 특히 잘 어울렀다. 그는 이 라이브 실황 음반에 이어 1992년, '변화가 있어야 돼요'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재취입, 발표했다. 후배 가수 임희숙은 샘 쿡과 박인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훗날 자신의 무덤에 ‘샘 쿡과 박인수의 음반을 함께 넣어 달라’고 했을 정도다. 

1971년 4월, 박인수는 최영훈의 편곡과 그 악단의 반주로 옴니버스 앨범 <샹제리제 / 의심받은 사랑 / 작별의 사연>을 통해서  '의심받는 사랑(Suspicion)', '나는 빈털터리(I who have nothing)' 등을 발표한다. 이 음반은 박인수, 선우성, 소연등 세 사람의 옴니버스 음반으로 모두 아마존 클럽에 출연 중인 전속 가수들이었다. 당시 MC를 보던 지명길 씨가 기획한 이 번안곡 음반의 모두 지명길 작사, 혹은 개사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박인수 씨가 종로의 아마존 클럽에 전속으로 출연하고 있을 때였어요. 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서스피션(Suspicion)' 등을 취입시켰죠, 평소 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녹음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외에도 '나는 빈털터리(I Who Have Nothing)'와 같은 흑인 소울 풍의 노래를 선곡했는데 특히 그 무렵 박인수 씨는 무대에서 샘 쿡의 '틴에이지 소나타(Teenage Sonata)' 같은 소울과 리듬 앤드 블루스를 훌륭하게 소화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실력파 가수였지요.” 
이 음반의 반주는 최영훈 악단이 맡았다. 최영훈 악단은 최영훈(테너 색소폰)·최영환(베이스 기타, 피아노) 형제로 구성된 6인조 밴드로 전설적인 ‘코끼리 캄보’의 후신이다. 이들 역시 아마존 전속 밴드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생 최영환 씨의 코가 유난히 컸어요. 그래서 동생 별명을 따서 ’코끼리 캄보‘라고 팀 이름을 지어 활동했죠.”
지명길 선생은 박인수의 초창기 모습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4~5년 쯤일 거야. 내가 아카데미 음악 감상실에 DJ로 있을 때 미8군 가수를 초대해 노래한 적이 있었어요, 박인수 씨가 그때 초대 가수로 왔었고, 또 코끼리 캄보가 디쉐네 음악 감상실에 초대받아 연주할 때도 박인수 씨가 객원가수로 노래를 불렀으니까….”  

또 다른 일화도 들려주었다. “1965년경, 임희숙이 여고 1학년 때, 내가 있던 시보네 음악 감상실에서 하는 노래 자랑대회에 출전했어. 거기서 박인수 흉내를 냈지요. '더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부르면서 박인수의 당시 트레이드 마크였던, 클라이막스 때 재킷을 벗어 던지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치는... 그 걸 그대로 흉내 내서 임희숙이 1등을 차지하며 금반지를 받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박인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 활동을 시작한 건 최소한 1965년 이전이라고 봐야죠.” 

계속해서 지구레코드사를 통해 <아니라고/꽃과 나비>(1975년)를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사할 무렵, 박인수는 1976년 7월, 대마초 단속에 걸려 갑자기 구속, 모든 활동이 중단된다.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

 


대마초 파동 이후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1980년)를 타이틀로 한 음반을 발표한다. 김기표 작곡의 '당신은 별을 보고...'는 어릴 때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로 화제가 되면서 이를 알고 찾아온 어머니와 극적으로 재회(1983년) 하기도 했다.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모자는 헤어진 지 32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음반을 기획하면서 인수형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걸 노트에 하나하나 메모했죠. 어릴 때 혼자가 된 얘기, 어느 날 열차를 타고 가다가 마지막 역에 내려, 갈 데도 없고 해서 벤치에 누워 별을 보며 눈물짓던 얘기, 아마 목포역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별과 달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을 그 모습이 그림처럼 와 닿았어요. 그때의 인수형 심정을 가사로 쓴 거죠. 그 후 이 노래의 사연이 전해지면서 헤어졌던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죠.” 작곡가 김기표의 말이다. 
전성기 시절, 무대에서 3단 고음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가수 박인수, 그러나 ‘대마초로 인한 구속(1976년 7월)’과 ‘이혼’ 등을 거치며 자꾸 가사를 잊어버리고 박자를 놓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스스로 노래들과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 무대에서 3단 고음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가수 박인수, 그러나 이후 대마초 파동(1976년 7월), 이혼 등을 거치면서 점차 무대에 서기가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나그네의 옛이야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인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1987년 신촌블루스의 1집 앨범에서  객원보컬로 참여하면서 '나그네의 옛이야기'와 '봄비' 두 곡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그가 젊은 세대에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의 히트곡 '봄비'를 새로운 편곡으로 재해석한 이 버전은 기존 팬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젊은 팬층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나그네의 옛 이야기' 는 엄인호가 몸담았던 5인조 밴드 ‘장끼들’이 1982년에 발표했던 노래를 새롭게 리메이크한 것으로 신촌블루스 3집에서는 엄인호가 다시 불렀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텐데

 

이 당시 얻은 호응을 발판으로 삼아 1989년에는 솔로 앨범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텐데/가고픈 나라>를 발매하기도 했다. 이 음반에는 '봄비'를 비롯해 역시 신중현의 곡인 '미련', 그리고 외국곡인 'A Change Is Gonna Come' 등이 실렸다. 특히 'A Change Is Gonna Come'은 미국의 소울 가수 샘 쿡의 명곡으로, 박인수가 이 곡을 소화해낸 것은 그의 음악적 역량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0년에는 장덕 추모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에서 동명의 타이틀 트랙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에 합창으로 참여했고, 1991년에는 김현식 추모 앨범 <하나로>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박인수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아티스트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러나 무대에서 가사를 자꾸 잊어버리고 박자를 놓쳐 스스로 노래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인 1994년. MBC 주부 가요열창에 출연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쓰러진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박인수에게는 심각한 건강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노래 가사를 잊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나 스트레스로 여겨졌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결국 그는 가요계에서 잠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는지 가요계를 떠난 그의 행방은 한동안 묘연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던 그는 주민등록조차 말소된 채 선교원, 노인요양원 ‘행복의 집(고양)’ 등을 전전했다. 이 무렵인 2002년 췌장암으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저혈당 쇼크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반복되는 일상마저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오랜 방랑 생활, 수술 당시 동의서에 보호자 사인을 해주었던 어머니는 이후 소식이 끊겼다. 그 후 어머니 송재덕 여사는 7~8년간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2011년 별세했다. 이 소식 또한 박인수 씨는 훗날에나 전해 듣게 된다.  

수술 소식을 접한 선후배 가수들이 치료비 마련을 위해 박인수 돕기 모금 공연, ‘리멤버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88체육관, 2002년 7월)’를 열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가 주관한 이 공연에는 최희준, 남진, 윤복희, 조영남, 김준, 임희숙을 비롯해 윤시내, 채은옥, 남궁옥분, 한영애, 최성수, 이홍렬, 이문세, 유익종, 유열, 박미경, 박상민, 박진영, 신효범, 박강성 등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대거 무대에 섰다. 그 외에도 많은 가수들이 출연료 없이 무대에 서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지만, 부득이 출연자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 서지 못하는 가수들은 대신 자원봉사에 나섰다.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로 11년째 투병 중이던 이 무렵, 뜻밖에도 가스펠을 주제로 한 기독교 음악영화 제작사로부터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뉴욕 할렘 스테이지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련

 

흑인 음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블랙 가스펠(Black Gospel)’을 찾아 떠나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로 인해 그의 삶은 또 한 번 바뀐다. 뉴욕은 박인수에겐 특별한 곳. 미국으로 입양된 뒤 할렘가를 전전하다 소울 음악을 처음 접한 곳으로써 그에겐 음악적 고향이자 제2의 삶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미국 현지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가스펠의 본 고장에서 콘서트를 열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다큐 영화로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는 영화 하이라이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때마침 운명처럼, 그 무렵 헤어진 뒤 일본으로 떠났던 부인과 아들이 30여 년 만에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부인은 뉴욕 촬영 길에 동행하게 된다. 건강상 보호자의 허락 없이 미국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 출연을 계기로 ‘인간극장(KBS TV)’을 통해 박인수의 그동안 삶이 조명되었다. 

촬영 일정 동안 미국으로 떠날 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재혼을 결정한 것이다. 
늘 음악이 먼저였기에 떠나보냈던 부인과 아들을 다시 만난 그, 결국 두 사람은 아들을 낳고 헤어진 뒤 37년 만인 2012년, 미국 뉴저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박인수는 부인과 재결합하면서 웃음뿐 아니라 삶의 의지를 되찾기 시작했다. 

팬 사인회도 열렸다. 뉴욕에 거주하는 박인수 팬, 박성양 씨. 모자 제조업체 시티헌터 대표이기도 한 그는 ‘로키(Rocky)’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모자를 특별 제작해 선물하기도 했다. ‘로키’는 미국으로 입양된 뒤 켄터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박인수의 별명이었다.    
노래를 잃어버린 한 가수가 노래를 찾는 여정, 그 감동...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인간극장 5부작’으로 전파를 타며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급기야 KBS는 다시 후속으로 ‘봄비 그 후’ 5부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방송은 앞선 방송을 보고 찾아온 동생들과의 재회, 그리고 어머니가 1년 전 별세 소식이 전해져 전파를 탔다. 

‘2부, 봄비 그 후’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역시 컴백 무대였다. 동료, 선후배 뮤지션들이 힘을 합쳐 만든 공연 ‘어메이징 그레이스’. 2012년 6월,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이 운영하는 ‘문글로우’에서 가진 이 공연에 많은 뮤지션들이 함께 뜻을 모았다.  
이 공연에는 동료 선후배 가수 김준, 임희숙, 이경우(하사와 병장), 엄인호(신촌블루스), 적우, 헤리티지 등이 출연했다. 박인수 씨도 이 무대에서 '봄비', '스탠 바이 미' 등 네 곡을 불러 많은 박수를 받았다. 

공연 타이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다 함께 합창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박인수의 컴백 무대, 긴장과 감동 속에서도 그의 노래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맞춰 ‘박인수 팬클럽’이 다음카페에 만들어졌고 응원이 이어졌다. 또한 무대에 설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전국의 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

 

이때부터 시작된 공연은 박성서의 토크콘서트/‘봄비’ 박인수와 함께 한국의 소울(Soul)을 만나다 였다. 첫 공연을 마친 뒤 SBS-TV의 요청으로 그다음 주에 바로 앙코르 공연을 가질 정도로 박인수에 관한 관심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건강상 혼자 무대에 설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박인수의 공연은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토크콘서트는 "박인수와 친구들과 함께"라는 타이틀로 2년여 동안 10여 차례의 전국 공연이 진행되었다.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나 무대로 돌아온 박인수. 그는 점차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홀로 아픔의 시간을 견뎌온 그. 다시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의 노래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날의 슬픔과 노래를 되찾은 기쁨,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는 무대에서, “이곳 무대까지 오는 게 사실 매우 힘들지만, 무대에만 서면 저절로 힘이 난다.”고 강조하곤 했다. 
이 토크콘서트에는 주인공 박인수를 비롯해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 피아니스트 김명수, 하사와 병장 이경우, 신촌블루스 엄인호, 기타리스트 김광석, 포크 가수 석명환, 김희진, 재즈 가수 캐빈(이희만) 등 선후배, 동료들이 대부분 함께하며 그를 응원했다.

그의 마지막 음반은 2013년 12월에 취입한 <준비된 만남>이다, 이 노래는 작곡가 겸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 씨가 만든 곡으로 박인수 마지막 독집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텐데>(1989년) 이후 25년 만의 작업이다.  

“박인수 씨를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입니다. 25년 만에 건네주는 신곡이죠. 이 노랫말 속 봄비의 의미는 가족, 즉 부인을 지칭한 것입니다.” 김준 씨의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 노래는 쉬우면서도 까다롭다.”는 게 박인수 씨의 소감.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닮았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그러한 고민을 안고 마이크에 몰입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바리톤 박선기와 혼성 4인조 ‘헤리티지(Heritage)’의 음성이 따뜻하게 노래를 감싸며 시작되는 이 ‘준비된 만남’은 녹음을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비록 가창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오히려 노래 속에 삶의 깊이가 더 묻어난다는 게 김준 씨의 평가다.
이전의 노래 ‘봄비’가 아픔이었다면 이 노랫말에 등장하는 ‘봄비’는 새 생명을 불어넣는 희망의 봄비다.

이제금 많은 팬과 동료들에 의해 다시금 되찾은 노래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박인수 씨는 수많은 아픔과 기쁨을 뒤로한 채 2025년 8월 18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겨울소나타 

 


박인수는 단순히 한 명의 가수를 넘어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소울과 블루스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구 음악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경험과 한국적 정서를 융합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봄비'라는 한 곡으로 그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단순히 히트곡이 아니라, 한국 음악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 이후 수많은 가수들이 소울과 블루스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박인수가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전쟁고아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은 미국 입양, 한국 귀국, 음악적 성공, 가족과의 이별, 재회, 그리고 투병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대서사시와 같다. 그의 노래에 담긴 깊은 감정과 진정성은 바로 이러한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가 한국 음악에 남긴 족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봄비'의 애절한 선율과 함께 박인수의 이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소울 음악의 아버지이자,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