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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소녀와 가로등' 을 부른 가수 겸 배우 진미령

 

 

 

진미령(본명: 김미령, 1957년 4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1976년 장욱조와의 스플릿 앨범 <잊지는 못할거야>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으며,  1977년 1집 앨범 <말해줘요/사랑을 느낄때>의 수록곡 '말해줘요'를 발표하였다. 

 

 

말해줘요

 

1977년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소녀와 가로등' (장덕 작사, 작곡)으로 참가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979년에 발표한 3집 앨범<하얀 민들레>는 MBC일일드라마 <하얀 민들레>의 주제곡 '하얀 민들레'가 수록되어 큰인기를 끌었다.

진미령은 화교라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토종 한국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광복군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김동석이며 어머니 함영희도 한국인으로, 진미령도 한국인이다. 다만, 한성화교학교를 졸업하여 중국어가 능통했고, 예명으로 쓴 성도 중국의 5대 성씨인 진(陳)인 데다가 이름 '미령'도 중국풍이어서 화교라는 루머가 퍼졌다. 게다가 진미령의 외할머니가 화교 출신이라는 루머도 있었다. 그러나 2022년 인터뷰에서 외할머니가 화교 출신이라는 기사는 언론 오보이며, 외할머니는 개성 출신의 한국인이고, 진미령 본인도 '토종 한국인'이라고 정정했다. 

한성화교학교를 다니게 된 이유는 어머니의 의견이 컸다고 한다. 어머니가 4명의 자녀들 중 적어도 한 명에게는 외국 공부를 시키고 싶어했고, 진미령의 어릴 적 꿈도 외교관이었지만, 유학을 보내거나 미국 국제학교를 다니기에는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한성화교학교에 진학시켰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국인들도 일부 입학이 가능했고, 아버지 김동석도 광복군 시절 중국에서 다년간 생활하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화교설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건 데뷔 2년 차였던 1977년 5월 무렵이다. 영화 <사랑의 스잔나〉개봉 인사차 주연배우 진추하(陳秋霞)가 내한하여 TV에 출연했다. 당시 공중파가 영상매체의 거의 전부였던 시절이어서, 홍콩 톱스타와의 인터뷰는 그 자체로 화제만발이었다.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한 프로그램에서 진미령은 유창한 중국어로 진추하와 인터뷰를 했고, 듀엣으로 노래도 불렀다. 영화가 1976년 한국 흥행 1위를 기록하자 진미령의 노래와 인터뷰도 화제가 되어 대중 사이에서 소문을 만들었다. 출신학교, 중국어, 진씨(陳氏)라는 성은 ‘진미령 화교설’을 뒷받침했다. 

 

 

지난날의이야기

 

 

혜화초등학교 시절, 시민회관 소속 어린이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다. 1976년 2월, 화교학교 19기로 졸업한 진미령은 시간이 넘쳐났다. 9월 대만의 대학 진학 때까지 남은 기간은 7개월. 거의 매일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신나게 노는 딸을 어머니는 더 두고 보지 못했다. 
 
  “놀러 다니지만 말고 노래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나중에 외교관 하더라도, 노래 잘하면 덕 볼 일이 많지 않겠느냐며 권유하셨죠. 학교처럼 아예 시간을 정해서 오아시스 레코드사로 노래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래야 마구 놀러 다니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작곡가 장욱조에게 노래를 배우던 무렵, 해군 군악대 출신의 전설적 매니저 타미 킴이 신인 발굴차 레코드사를 찾아왔다. 그는 진미령을 발탁하고, “8월 말에 대만으로 떠난다니 7월까지만 해보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둬도 되지 않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데뷔곡이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나 그대를 알아요~’라는 경쾌한 멜로디의 히트곡 ‘말해줘요’(1976)다. 예명은 외할머니 진금복(陳錦福)의 성(姓)을 따 ‘진미령’으로 지었다. ‘딴따라 할 것 같으면 호적에서 뺀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피해 할머니의 ‘빽을 쓴’ 결과다.
 
  아버지·어머니가 임지(任地)를 따라 지방에서 생활하는 동안, 외할머니는 서울에 남아 진미령을 키웠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방패막이가 통했던 것이다. 외할머니가 없었다면 진미령의 가수 데뷔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다. 
 
  혜성처럼 등장한 앳된 소녀, 당차고 당당한, 하지만 순진하면서도 우수에 깃든 목소리를 지닌, 묘한 매력을 한 몸에 구현한 가수에게 대중은 환호했다. 데뷔를 하고 얼마 후 갑자기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진미령은 성우로도 활동했고, MBC 라디오 〈가요열차〉, 싱글벙글쇼〉의 진행도 맡았다. 이주일, 박상규, 서수남, 이규혁 등이 진미령의 진행 파트너였다. ‘브라보콘’ 등 CM송도, 만화영화 주제가도 여러 곡 불렀다. 

 

 

 

 

  “1977년 MBC가 서울가요제를 만들었어요. 이듬해부터 국제가요제로 확대된 바로 그 행사입니다. 타미 킴 선생님이 출연을 제안하셨어요. 오빠와 둘이서 듀엣 ‘현이와 덕이’를 만들어 활동하던 장덕과 저를 한 팀으로 붙여서 내보내면 그림이 될 거다, 보우 타이에 하얀 바지를 같이 입고 나가보자고 하셨어요.” 
 
  장덕은 악단을 지휘했고 진미령은 '소녀와 가로등' 노래를 불렀다. 입상은 하지 못했다. 사회는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대상은 길옥윤 작사/작곡, 혜은이가 부른 ‘당신만을 사랑해’가 받았다.
 
  하지만 주최 측은 이 노래의 잠재력을 간파, 가요제 LP음반 B-1면에 이 노래를 수록했고, 모두의 예상대로 이 곡은 10대, 20대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이내 전 세대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국민애창곡 ‘하얀 민들레’(1979)는 MBC 드라마 주제곡이다. 작곡가는 ‘슬픈 노래는 싫어요’, 이은하의 ‘밤차’, 윤승희의 ‘제비처럼’, 심수봉의 ‘당신은 누구시길래’ 등을 작곡한 유승엽.으로 방송국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음색에 꼭 맞는 곡을 썼다며 취입을 권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주제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MBC가 나중에 엄청난 금액의 격려금을 작곡가 유승엽과 작사가 신봉승에게 줬다는 얘기가 있다. 〈행복을 팝니다〉의 후속 드라마 〈하얀 민들레〉는 4월 말부터 방영했고, 9시 뉴스가 끝난 황금시간대 9시35분에 나갔던 간판 일일 연속극이다. 극본은 신봉승, 연출은 박철(朴鐵)이었고, 김자옥, 박근형, 김용림, 김영란, 전운, 현석, 남성훈, 조경환, 김윤경, 오미연, 임예진, 김동현 등이 주요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하얀 민들레

 


 1970년대 중후반은 진미령에게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아침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고, 서울역으로 달려가 부산행 기차를 타고 지방공연, 행사를 마치고 침대차를 타 새벽 4시 서울역에 도착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여름 특집방송을 하면, 당일치기로 동해안·서해안 해수욕장을 다녀와야 했다. 지금과 달리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상에 오른 그녀는 당시 후회할 만한 일들이 있어 미국행을 결심했다. 어머니도 함께였다. 가수가 꿈이 아니었기에 절실함이 없었던 것도 훌쩍 이민을 결심한 배경인지도 모른다. 1981년의 일이다. 
 
  “언니, 오빠와 어머니 친척분들이 미국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민이 아니라 가족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었어요. LA로 가서 생활인으로 살았습니다. 장난감 좌판 장사도 하고, 공장에서 재봉 일도 했죠. 바짓단을 가공하면 한쪽에 25센트, 한 벌에 50센트를 받았습니다. 하하. 저녁에는 랭귀지스쿨도 다니고, 비즈니스 어카운팅도 공부했어요.”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교포 사업가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월 3000달러의 고소득 자리를 제시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노래를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했을 것’이라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는 교포 상대 위문 공연이 빈번하던 시절이다. 연예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기에,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 아는 친구들이 와도 걸음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 이주일과 조용필의 방미는 외면할 수 없었다. 
 
  “두 분 다 제게는 오빠 같은 분이시거든요. 두 분이 톱스타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하춘화 선배님 지방공연, 김세레나 선배님 극장쇼 등, 이주일 선배님이 사회 보시는 공연에 제가 출연도 했죠. 강남터미널 옆 ‘청록’이라는 극장식당에서 셋이 같이 일했는데, 일이 끝나면 포장마차를 전세 내서 편하게 뒤풀이를 하기도 했어요. 여기 있는 안줏값 다 얼마냐 물어보고 5만원에서 7만원 드리면 주인 아주머니가 다른 손님은 안 받으셨죠.” 
 
  두 사람은 “아깝지 않냐, 지금은 우리 둘 다 너를 도울 수 있다, 용필이가 곡도 써줄 수 있다”며 진미령에게 귀국을 권했다. 미국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따고, 내근과 판매를 겸하며 보험 일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이라 많이 망설였다. 장기간의 고민 끝에 귀국을 결심한 것은 1989년이다. 
 
  “집 팔고 차 팔고 서울에 왔는데 두 분께 연락을 안 드렸습니다. 이주일 선배님은 ‘홀리데이 인 서울’이라는 업소를 운영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고, 조용필 선배님은 가정사 때문에 주변 일에 신경 쓰시기 어려웠거든요.” 

 

 

아하

 


  어머니도 “두 분을 생각해서,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일이 꼬이니 노래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신인의 자세로 돌아가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다. 1989년 7집 〈From LA To Seoul 하나 그리고 둘/아하〉, 1991년 8집 〈Golden Album 혼자가 좋아/가라지〉, 1994년 9집 〈여자 나이 서른/그대 곁에 나만이〉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혼자가 좋아

 

 
  일도 쏟아졌다. 1989년 4월엔 MBC 라디오 〈즐거운 오후 2시〉를 고영수와 진행했고, 11월에는 나스타샤 킨스키 인터뷰, 주윤발(周潤發) 내한 공연에 통역 겸 아티스트로 참가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전야제 사회는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행사 1년 전에 확정한 스케줄이다. 1990년 7월에는 장덕 추모음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0년 가을, KBS 라디오가 가을 개편을 하며 〈일요공개쇼〉 MC를 부탁했다. 이 프로그램의 남성 진행자가 바로 전유성이다.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는데 1992년 청혼을 받았다. 전처(前妻) 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일부러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두 사람은 1993년 결혼식을 올렸고 2011년 갈라섰다. 결혼식 자체가 퍼포먼스였고, 5년 단위로 상호 합의해서 계약을 연장하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카페 "학교 종이 땡땡땡"


  전유성에게 감사한 일이 있다. 1995년 7월 인사동에 차렸던 카페 "학교 종이 땡땡땡" 프로젝트다. 입구에 3m 정도 철길을 깔고, 1960~70년대 물건들을 모아 당시의 교실 풍경을 재현한 명소였다. 오늘날 복고풍 식당과 카페의 유행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진미령은 또 다른 자아(自我)와 만났다. ‘요리사 진미령’이다. 
 
  “제가 요리를 좋아하거든요. 여섯 살 때부터 부엌을 출입하며 음식을 만들었어요. 외할머니도 개성 음식을 제대로 가르쳐주셨죠. 제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드실 때 희열을 느낍니다. 기본을 지키면서도, 창조적인 응용 없이는 ‘나만의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하자면 전통과 파격이 공존하는 요리의 속성도 제 성격에 딱 맞아요. 1972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목포시장을 하셨는데, 방학 때 관사로 내려가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서 아버지 식탁을 차려드렸죠. 제가 생각하는 제 ‘요리사 데뷔’입니다.” 
 
  1997년 <유성아 뭐 먹고 사니?>, 1998년에는 <진미령의 행복한 식탁>이라는 요리책을 냈다. 집에 있는 재료로, 최대한 간단한 조리법으로, 누구나 쉽게 맛있는 요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부제도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이런 요리책 처음이야’로 지었다. 1997년 11월 〈한선교의 좋은 아침〉에 출연, 재한 프랑스 방송인 이다도시와 프랑스 요리 대결을 펼쳤고, 1998년에는 연극배우이자 정통 서울 요리 연구가인 이정섭이 진행하는 요리쇼 〈맛있는 인생〉에 나가 갓김치를 선보였다.  
 
  책을 내고 방송을 하니 ‘전문성’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2003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 한국 분점을 1기로 졸업한 배경이다. 
 
  “꼬박 1년을 무쇠 같은 프랑스 조리 냄비들을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왼쪽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깁스까지 했을 정도죠. 공부를 마치니 250여 가지의 프랑스 요리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게 되더군요.”

  이후로도 진미령은 왕성하게 활동했다. 2014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은 진미령이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상이다. 최근 작은 2021년 초 SBS가 방영한 아침드라마 〈불새〉로 주인공의 고모 서희수 역으로 출연했다. 1995년 2월 뮤지컬 〈심수일과 이순애〉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서 활동했던 연장선이다. 2018년 6월에는 KNN(부산경남민방)에서 제작, 방영한 화요 시트콤 〈날아라 메뚜기〉(최인한 극본/임혁규 연출)에 출연하기도 했다. 30분씩 총 20화로 방영한 이 작품은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임랑 마을과 임랑 해수욕장이 배경. 방송국 홍보자료에는 ‘여름 파출소를 준비하는 라소장과 수영 국가대표인 그의 딸 지원, 할머니 미령을 중심으로 사랑, 가족, 치유 등 따뜻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았다’는 문구가 나온다.  

최근에는 사업가로 변신, 또 다른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다. 회사의 이름은 ‘주식회사 진미령’. 확실하게 명예를 걸고 해보자는 마음에 아예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한다. 

진미령의 음악은 포크와 발라드, 그리고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된다. '하얀 민들레'와 '지난날의 이야기' 는 그만의 맑고 서정적인 보이스와 섬세한 감정 표현이 돋보이는 대표작으로, 지금도 꾸준히 다시 불리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90년대에는 '남자의 꿈', 2000년대 이후엔 '인생', '미운사랑 (Dance Ver.)', '사랑아 반갑다' 등 변함없이 시대의 흐름에 맞춘 음악적 변신을 시도하며 오랜 기간 탄탄한 팬층과 음악적 입지를 다져왔다.

 

 

 

한잔의 눈물

 


최근에도 진미령의 활동은 활발하다. 2021년 '한 잔의 눈물 (2021 Ver.)', 2022년 '서울에서 만난 사람 (Remember Seoul)'로 신곡을 선보였고, 2023년엔 '대한민국 서울'로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성을 들려줬다. 2024년에는 제임스킹, 김수찬 등 후배 가수들과 협업한 <포에버 마이 러브 (Forever My Love)>를 통해 세대를 잇는 음악의 힘을 재확인했다. 2025년에는 '해와 달', '돈 룩 백(Don't look back)' 등 신보를 발표하며 여전히 음악적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1976년 데뷔 스플릿 앨범 《잊지는 못할거야》
1977년 1집 《말해줘요/사랑을 느낄때》
1978년 2집 《지난날의 이야기/아빠의 사랑》
1979년 3집 《하얀 민들레/비누방울》
1980년 4집 《아쉬운 사랑/무지개》
1980년 5집 《님의 목소리/아쉬운 사랑》
1981년 6집 《떠나가는 배/한오백년》
1989년 7집 From LA To Seoul 《하나 그리고 둘/아하》
1991년 8집 Golden Album 《혼자가 좋아/가라지》
1994년 9집 《여자나이 서른/그대곁에 나만이》
1996년 10집 《남자의 꿈》
2002년 11집 《새엄마》
2004년 12집 《난생처음 여자가 되던 날》
2007년 13집 《홀로이》
2008년 14집 《선남선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