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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여성 천재 싱어송라이터 장덕

 

장덕은 1961년 4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이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장덕의 아버지인 장규상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 화가 이숙희였다. 장규상은 안익태와 함께 국립교향악단을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한다.    
이숙희는  한국미술협회 회원, 신기회 회원을 거쳐 1973년 언론을 들썩이게 했던 여류화가회를 조직하는데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많은 개인전과 그룹전, 자선전 등을 가졌던 이숙희는 정`재계 쪽 상위계층과의 인맥도 두터었다.    
장덕 집안은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이라 할 수 있었으나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장덕은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그 자신이 만든 뿐철학이라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장덕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늘 오선지와 씨름하며 노래를 불렀고 <누가 누가 잘하나> 등의 프로에 1등을 차지하는등 여러 번 입상한 경력이 있었다. 

1975년 경 이숙희씨는 도문회라는 여류화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화백계의 대가 故 도상봉의 딸이었다. 도문회의 남편은 주한 미국 대사관 관리인 엘 클러나드(L. Clinard)라는 미국인이였다. 바로 이 엘 클러나드가 장현과 장덕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연예계에 첫 발을 밟게한 장본인이었다. 

 1975년 당시 14세였던 여중생 장덕은 서울 용산 미군 기지 내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처음 노래했다. 미8군 주최 무대에서 자작곡 ‘To be a child again’을 다섯 살 위 오빠 장현(1956~1990)과 함께 불렀다. 엘 클리나드(L. Clinard)는 장덕이 작곡한 멜로디에 영어 가사를 붙이고 남매가 무대에 서도록 주선했다. "드래곤 래츠(Dragon Rats·)"라는 팀 이름도 지어주었다. 이들은 미8군 무대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고, 1개월 뒤 TBC TV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 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장덕은 어머니에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엔 1년을 더 다녀야 된다며 말렸지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찾아갔고 다행히도 현이와 덕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라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는다. 그 해 4월 남매는 드래곤 래츠에서 어머니가 지어준 <현이와 덕이>로 듀엣명을 바꾸고 '친구야 친구',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친구야 친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개봉된 김응천 감독, 임예진, 이덕화, 전영록 주연의 영화 <푸른교실>에서 오라오라에 출연해 불렀던 '꼬마인형', '일기장'을 사운드트랙으로 싣게 된다. 

 

 

친구야 친구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한달 뒤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 때 작사,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1976년데뷔한 히트곡도 없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작곡가로서 1977년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였다.  
당시 16세 장덕은 최연소 작사/작곡가로 눈길을 끌었으며, 직접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펼쳐내기도 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수많은 언론에서는 장덕을  "천재소녀"라고 대서특필하였으며, 대중들의 관심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소녀와 가로등'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 때 만든 노래로, 당시 이혼 등으로 흩어졌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기 방의 창 밖 가로등을 보면서 작사/작곡한 노래이다.   

 

 

진미령 - 소녀와 가로등

 

장덕은 1977년 4월 16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임원식 감독의 <내마음 나도몰라>에 주연으로 출연 하였으며,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정말'도 싣게 된다.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감독인 김응천, 석래명,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 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같은 해 <현이와 덕이> 정규 1집이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는 '꼬마인형', '소녀와 가로등', '순진한 아이', '일기장' 등의 히트작품들이 수록되었다.  

 

 

장현 - 더욱 큰 사랑

 


1979년 6월 제2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작사/작곡 : 장덕)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 작곡가로서 3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 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첫사랑

 

장덕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10여편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하였으며 이후 1980년 10월 장덕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주의 내슈빌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내슈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 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내슈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였고, 한인회 밴드인 리패밀리 멤버가 되어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은 같은 리 패밀리의 멤버 이군과 1981년 10월 17일, 내슈빌에서 결혼했다. 미국에 머물던 이 시기 장덕은 미국 가수에게 '여인이여 안녕' 이라는 작품을 주어서 취입시켰는데, 당시 장덕의 미국 내 창작 활동은 미국 일간지 및 '테네시언'지에 크게 소개된 바있다. 

 

 

날 찾지 말아요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 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 한남동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 뒤 장덕은 서라벌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음반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당시 장덕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린 탓에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 6달 만에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가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 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이 사이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 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해 주기도 했다.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 리메이크하여 1984년 2월에 발매된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했다. 1984년 10월 장덕은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사랑하지 않을래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고 이에 장덕은 크게 실망했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덕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1985년 6월 장현 · 장덕 남매는 7년 만에 재결합,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며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비롯 '이젠 안녕', '그대의 투정', '해바라기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발표한다. 앨범의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단숨에 가요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인기를 끌었고 장덕의 막힌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그러나 남매는 지향하는 음악이 서로 달랐고 결국, 장덕은 다시 솔로 활동을 준비한다.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 이은하

 

 

1986년 5월에는 장덕이 작곡한 곡들 중 가장 훌륭한 곡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이은하에 의해 발표되었고 한 달후 1986년 6월 솔로 정규 3집 <님 떠난 후>이 발표되어 타이틀곡 '님 떠난 후'를 비롯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사랑해줘요', '소외' 등이 수록되었다. 포크뮤직에 디스코가 섞인 타이틀곡 '님 떠난 후'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 골든컵을 수상하였고 MBC 라디오 인기가요, KBS 2FM 인기가요 광장,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뮤직박스(도서출판), 전국 DJ 연합회 등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1986~87년 장덕은 제 2의 전성기를 보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자 가수들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 

 

 

님 떠난 후

 

1987년 7월 장덕은 타이틀곡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비롯 '이별인 줄 알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때면' 등의 곡들이 수록된 골든앨범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이별인 줄 알았어요'는 가요톱10 등에서 순위권에 오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별인줄 알았어요

 

 

9월 장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3회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연합)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불렀던 노래 '너를 기다릴거야'는 장덕의 정규 5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에 재편곡되어 수록되게 된다.  
1987년 장현도 솔로 데뷔 음반 <마지막 진실>을 발표하였다. 이앨범에는  타이틀곡 '마지막 진실'을 비롯 '연민', '어느날', '만날 수 없는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되었다. 

1988년 9월 장덕은 정규 4집 <얘얘>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다른 싱어송라이터인 김파, 김범룡과 함께 작업하며 타이틀곡 '얘얘'를 비롯해 '내 말 좀 들어요', '서울의 밤거리', '나의 꿈 이야기' 등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앨범의 타이틀곡 '얘얘'는 특히 무대 위 장덕의 귀엽고 깜찍한 율동과 춤으로 주목을 받았다. 

 

 

얘얘 (Yea Yea)

 

1989년 2월 오빠 장현은 그동안의 밤무대 일을 모두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장덕의 매니지먼트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여의도에 코아기획이라는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이 때 훈이와 슈퍼스타, 박혜성 등의 가수들도 영입하였다. 그렇게 장덕의 새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을 때였던 1989년 6월 18일 장현은 갑작스럽게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설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그전부터 혓바닥에 혓바늘 같은 것이 돋아났지만 장현은 피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기고 넘어갔는데 혓바늘로만 여겼던 것이 자꾸만 커져가고 통증도 심해지자 다니던 작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걸 중단하고 국립의료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병원의 의사는 장현에게 혀의 절반을 자르면 5년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1년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하였으나 장현은 수술을 하면 말을 할 수 없고 노래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고 자가요법을 택하게 된다.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얼마 후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비롯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니', '슬픈 약속', '수레', '나의 공주님' 등의 곡들이 수록된 장덕의 정규 5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발표된다.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는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1990년 1월에는 어렵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KBS 신년 특집극 드라마 <구리반지>에 주연으로 출연, 억척스럽고 발랄한 스무살 여성을 맡아 오랜만에 연기 활동도 하였으며 주제가도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앨범 활동 중,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게 되자 장덕은 활동을 중단하고 오빠의 병간호를 하게 된다. 

 

 

드라마 <구리반지> 주제곡

 

장덕은 그 해 출시한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 활동까지 중단하면서 오빠의 병간호를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녀는 불면증까지 걸려서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이 겨우 들었다고 한다. 1990년 2월 4일 결국 장덕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끝내 숨지고 말았다. 장덕의 사망 원인은 3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해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로 자살이 아니라고 한다. 

장덕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은 당대 대중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아무 탈 없이 노래를 불렀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가 갑작스레 사망했으니 모두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들은 장덕의 죽음을 추모하는 인사말로 방송을 시작했으며, 한동안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신청곡으로 폭주했다.  

 



오빠 장현은 당시 설암으로 투병 중이라 말을 전혀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인터뷰로 슬프다는 이야기를 메모로 보여주며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990년 8월 16일, 장현도 결국 여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때로, 1984년 데뷔한 이선희 조차 '여자가 감히 작곡을 한다'는 편견 때문에 1996년 10집에 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앨범에 실으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자 가수가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마저 신기하다고, 정수라와 이선희, 장덕이 '여자 가수 바지 삼총사'라고 적힌 잡지 기사마저 존재한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의 작품 개수는 총 136개(2021년 기준)이다. 생전 약 300여곡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고, 현이와덕이 앨범 4장, 솔로 음반 9장, 참여 음반 33장, 10여 편 영화 출연(주연/조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