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당시 전인권은 이주원이 이끄는 <따로 또 같이 1집>(1979)에 참여한 이후 솔로 독립을 한 상태였고, 비공식 앨범 두 장을 1979년과 1980년에 각기 발표했다. 1982년 8월에 이촌동 "까스등"에서 전인권과 허성욱이 함께 공연한 것으로부터 들국화는 시작한다고 할수 있다. "까스등" 공연 전에도 전인권은 "조·이"라는 듀엣으로 활동하던 조덕환, 특별한 음악경력이 없었던 허성욱과 함께 강릉에 있는 나이트클럽 등에서 노래하곤 했다.
그러다가 이영재, 이승희와 함께 트리오로 앨범 <이영재, 이승희, 최성원>(1980)을 발표한 최성원을 1982년 말에 만났고, 이듬해 4월의 이태원 "뮤직라보" 공연부터는 최성원도 참여하여 3인조 체제가 되었다. 최성원이 팀명 후보로 ‘코스모스’ ‘들장미’ ‘들국화’ 등의 이름을 제시한 것 가운데 ‘들국화’를 선택함써 오늘날의 들국화가 있게 되었다.
들국화라는 팀명으로 공연을 한 것은 1983년 11월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에스엠" 공연부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덕환이 참여함으로써 완벽한 라이업이 형성되었고, 1985년 9월에 역사적인 데뷔 앨범<들국화>를 발표했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말 그대로 ‘역사적’인데, 왜냐하면 들국화 이전과 이후를 나눠서 얘기해도 좋을 만큼 ‘80년대 새로운 대중음악의 시작’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뮤지션 세대교체, 창작, 세션, 녹음 모든 부분에서 분기점이었던 이 앨범은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조용하게 창작에 몰두하던 신진 뮤지션들 중에서 먼저 인기를 얻게된 경우였고, 이후 몇년간 유지된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락 그룹의 원형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멤버들은 원래 락커라기보다는 포크송 가수에 가까웠다. 밴드 내 역할분담 역시 4명의 파트가 확실한 게 아니라 보컬과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밴드보다는 크루에 좀 더 가까웠다. 이것은 포크 음악가들 문화의 영향이기도 했다.
재미 있는 점은 본고장인 서양에서도 이런 포크송 크루가 밴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락 음악이 현대 대중 음악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한국의 경우 1980년대에 똑같은 모습이 들국화에서 보였고 그게 결국 한국 락의 직접 시조격이 되었다. 백두산의 김도균이 들국화를 평할 때 '락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 밴드'라고 했는데 이는 이러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1집 음반 안에 라이브 콘서트 할인권과 전국 순회 콘서트 일정표를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라이브 활동을 고집하였다. 들국화는 자신들의 음악적 기교를 당시 우리 젊은이들과 청소년의 정서와 절묘하게 결합시켰고 이것을 "한국적인 록"의 등장이라고들 평가하였다. 들국화의 혁명적 돌파는 음악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소극장의 첫 공연을 시발로한 전국 순회 공연과 더블 라이브 앨범의 발매로 결실로 이들의 성공에 고무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소극장 공연의 붐을 불러일으켰다.
1집의 화려한 애드립을 포함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모두 세션으로 참여했던 최구희의 솜씨다. 일렉기타를 제외한 어쿠스틱 기타는 최성원이 연주하였다. 최성원은 조덕환의 기타 실력으로는 앨범을 레코딩하기엔 부족하여 1집에서 '축복합니다'의 어쿠스틱 기타 간주 정도만 시켰다고 밝혔다. 1집 발매 이후 조덕환이 밴드를 탈퇴했다.
1집 발매와 동시에 주찬권이 정식 멤버로 가입하였고 4명의 멤버에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함한 5인조로 진행된 전국 순회 콘서트는 말 그대로 인기 폭발하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 아래 말랑말랑한 발라드나 트로트가 주도하던 주류 대중음악계에 대해 반항적인 가사와 전인권의 절규하는 듯한 보컬을 앞세운 한국적 록을 선보였다. 또한, 이들의 음악은 당시 주 대중음악 유통 경로인 방송이 아닌 앨범과 라이브 공연을 통해 알려지며 엄청난 반향을 얻으며, 한국 최초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가능성을 열었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선정하는 모든 설문조사에서 항상 1위에 오르며, 대한민국 음악사를 논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음반이 들국화의 1집이다. 이는 단순히 특별한 방송활동 없이 180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군부독재 시대였던 1985년, 강한 록 사운드와 어우러진 전인권의 거친 목소리는 지칠대로 지쳐있던 모두를 일으켰고 특히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은 마치 억압받는 젊은이들의 함성과도 같았다. 앨범에 담긴 모든 것이 굳이 의미를 담지 않아도 음악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 혁명'이 되어주었다. 이 앨범은 한 아티스트가 발매한 앨범의 전곡이 사랑 받는 앨범이 되었으며 언더그라운드의 가수들이 전국민적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만들어낸 앨범이 되었다. 대중음악의 예술성을 한 차원 높인 것은 물론이요, 한국 대중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한 그야말로 모든 것을 겸비한 앨범이 었다.
1985년에 발매된 들국화의 첫 번째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앨범으로 한국식 록 음악과 한국식 포크 음악, 두 갈래의 흐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외국의 록 음악을 한국 특유의 정서에 맞춰 잘 소화한 혁명적인 음악을 보여준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에 뮤지션 세대교체, 창작, 세션, 녹음 모든 부분에서 분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 앨범이 발표된 후 암약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하나 둘 씩 오버그라운드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며 가요 시장에서 주류 히트곡과 작가주의 앨범이 공존하는, 소위 말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가진다. 한 마디로 한국 대중음악은 이 앨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봐도 된다.
첫 트랙 '행진'서부터 마지막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에 이르는 아홉 곡 모두가 히트하고 앨범 판매량 또한 180만 장에 육박할 정도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멤버들의 개성 넘치는 작곡이 돋보인 앨범이기도 하였다. 전인권은 '행진'을, 최성원은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일 뿐이야' 등을, 조덕환은 '세계로 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등을 작곡했다.
이후 들국화는 서울스튜디오에 그들의 팬 수백명을 데려다놓고 만든 <라이브 콘서트>’(1986) 앨범은 전인권의 트레이드 마크인 포효하는 보컬과 멤버들의 소프트한 하모니는 이질 적이지만 그 또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적인 록을 추구하는 성향에 걸맞게 외국 록백드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전곡에 녹아 있다. ‘그것만의 내 세상’, ‘행진’은 물론이고 외국곡인 홀리스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스틱스의 ‘Come Sail Away’ 등도 포함되어 있다. 들국화만의 색깔이 잘 입혀진 명반이다.
1986년 발매된<들국화 2집>은 데뷔앨범의 빛에 가려버린 비운의 음반이다.
들국화는 데뷔앨범과 2집 사이의 공연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음악적 원류인 포크와 록의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 작업에 사용된 소재는 들국화가 공연에서 레퍼토리의 일부분으로 삼았던 해외의 음악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들국화 이전에 해 왔던 멤버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최성원의 활동이다. 이러한 음악들은 들국화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 물론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것은 전인권이고, 전체적인 조율을 한 것은 최성원과 허성욱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가 데뷔앨범보다 더욱 필요하게 된 시점이 바로 두 번째 음반 제작 시점이었다.
들국화의 2집 음반 발매 당시 조덕환은 음반 녹음을 마친 후 다른 멤버들과의 음악적 의견 차이로 밴드를 떠나게 된다. 세 명이 남은 들국화는 데뷔앨범에서 드럼 세션을 담당했던 주찬권을 비롯해서 최효남(주찬권과 최효남은 믿음소망사랑의 멤버로 활동중이었다), 허성욱의 친구였던 손진태(손진태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이끌던 노란 잠수함에서 함춘호가 가입하기 전 활동했다), 최윤식, 김해식 등과 밴드를 추슬러 장기공연을 진행했고, 그 이후에는 손진태와 주찬권이 정식 라이브 멤버로 합류하며 5인 체제를 이룬다. 데뷔앨범과 두 번째 음반 사이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이 바로 이 시기에 녹음된 음반이다. 라이브 앨범 발매 후 데뷔앨범에 참여했던 최구희까지 라이브 멤버로 가입하며 2집의 실질적인 라인업이 갖춰진다. 당시 공연의 홍보전단을 보면 ‘공포의 6인 구단’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밴드로서는 트윈기타 체제를 갖추면서 가장 연주력이 뛰어난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공연과 음반은 상황이 다르다.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선 신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재평가를 받긴 했지만, 1986년에 발매한 2집은 6인조라는 최강의 멤버 구성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쨌든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의 영입, 또한 두 명의 기타리스트를 좌우로 포진시켰다는 것은 팬들로 하여금 들국화가 앞으로 본격적인 락밴드로 발전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매일 그대와' 같은 어쿠스틱한 넘버들도 무시할 수 없지만, 들국화의 진면목은 역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에 있었다. 실제 이 당시 라이브에서는 레드 제플린, 스틱스 등의 록 넘버들을 앵콜 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2집은 이런 기대와 달리 포크락 그룹을 연상시키던 1집보다도 훨씬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들국화의 음반과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옴니버스 음반이 바로 <우리노래전시회>(1984) 인데 최성원의 프로듀스로 발매된 이 음반에는 최성원을 비롯해 전인권과 허성욱이라는 데뷔앨범의 정식 멤버 중 세 명의 멤버, 즉 들국화의 핵심 멤버들이 참여하고 있음은 물론 데뷔 앨범에 수록된 ‘그것만이 내 세상’과 ‘매일 그대와’, 그리고 두 번째 음반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과 ‘제발’이 담겨있는 까닭이다.
데뷔앨범의 ‘매일 그대와’나 ‘사랑일 뿐이야’가 작곡자인 최성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반면, 두 번째 음반의 머릿곡 ‘제발’은 <우리노래 전시회>의 버전과는 완벽히 다르다. 전인권은 데뷔앨범과 달리 목소리에 스크래치를 넣어 모래알과 같이 굵은 입자의 또 다른 개성을 만들었다. 믿음소망사랑의 공중분해로 들국화의 정식멤버가 된 최구희와 주찬권, 들국화 사운드의 키를 가지고 있던 허성욱의 안정되고 매끄러운 연주와 대를 이루는 전인권 목소리의 이러한 ‘의도된 자연스러움’은 앨범 전체의 가장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너랑 나랑’은 당시까지 들국화의 곡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토속적인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데뷔앨범의 ‘행진’에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쉽게’는 신선한 하모니와 함께 음반 발매 이전부터 사랑을 받았던 곡이고, ‘하나는 외로워’는 들국화 해산 이후 발매된 ‘추억 들국화’의 음반에 수록된 ‘머리에 꽃을’을 도출하는 시발점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프로그레시브한 진행과 전인권 보컬의 매력을 가득 담은 ‘너는’은 음반의 베스트 트랙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준비된 첫 번째 음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음악, 혹은 각자의 개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일관성 없는 음반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데뷔앨범에 비해 이 음반이 푸대접을 받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음반은 들국화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공연을 소화해냈던 멤버들이 정식으로 밴드에 합류하여 밴드로서 하나가 된 유일한 음반이다. 어쩌면 수록곡의 가사들에서 ‘우리 모두’를 강조하거나 의도적으로 개인보다 전체를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밴드의 활동은 이 앨범 이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데뷔앨범의 수록곡들처럼 공연을 통해 많이 불릴 기회도, 그러한 기회를 통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곡의 생명력 역시 연장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언제나 언급되는 데뷔앨범의 벽은 또 하나의 수작이 설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들국화라는 이름과 함께 선뜻 이 앨범의 자켓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음반의 수록곡들이 기대에 못 미쳤다기보다 이러한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결국 들국화는 1987년 해산을 선언하고 전국 순회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멤버로는 결국 다시 모이지 못했다. 전인권은 들국화 해산 직후 김현식,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1년간 아무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해산 이후에 전인권은 허성욱과 함께 '추억 들국화' 음반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기타리스트 최구희는 '괴짜들'을 재결성하여 활동하고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손진태는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곧 이어 김현철, 함춘호, 조동익과 함께 '야사'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손진태는 1990년대 들어서 A급 기타 세션맨으로 맹활약했다.
다른 멤버들도 여러 가지로 음악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최성원은 나중에 솔로로도 활동하여 '제주도의 푸른 밤'을 비롯한 여러 명곡을 남겼다. 음반 제작자 겸 프로듀서로도 유명한데, 최성원이 발굴한 가장 대표적 가수가 바로 이적과 김진표. 패닉 1, 2집이 최성원 제작이다. 드러머 주찬권은 이런저런 드럼 세션에 한때는 신중현 밴드의 드러머로 뛰기도 했으며, 무려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다.
전인권은 1988년 솔로 1집 <전인권>을 발표, 타이틀 곡 '사랑한 후에'와 '돌고 돌고 돌고'를 히트시키며 솔로로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다. 이듬해인 1989년 2집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에서 '언제나 영화처럼'을 발표하고 콘서트 위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95년 다시 가요계에 복귀한 전인권이 주도하여 태백산맥 출신의 민재현, 송골매 출신의 이건태와 함께 <들국화 3집>(1995)을 발표 했다. 이전 앨범들에 비해 전인권의 보컬이나 밴드의 사운드가 록 정통의 색깔에 충실한 음반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타이틀 곡 '우리'를 비롯해 수록곡들이 팬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들국화 음악의 한 축을 담당했던 최성원을 비롯해 주찬권, 허성욱 등 원년 멤버들이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 앨범의 퀄리티와 별개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1997년에는 허성욱이 토론토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서 종종 공연을 갖기도 했다. 특히 2001년 2월 윤도현밴드, 크라잉 넛, 델리 스파이스, 동물원, 언니네이발관, 강산에 등이 참여한 'Tribute to 들국화' 헌정 앨범이 발매되고 이들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전인권은 2003년 3집 <다시 이제부터>로 14년만에 가요계에 신보를 냈고 이전과 달리 광고 및 예능 출연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정규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 을 발매해 여러 방송과 콘서트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특히 이 앨범의 '걱정말아요 그대'는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받다가 2015년 응답하라 1988의 수록곡으로 삽입되어 대중적으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되었다. 이에 더불어 최성원, 주찬권 등 들국화 기존 멤버들의 솔로 활동도 다시 활발해졌다. 주찬권은 2004년 성남에 라이브카페를 세우고 라이브 공연을 위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7년, 전인권이 다시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5번째 구속이었으며, 전인권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가게 되고 출연금지까지 받게 되었다. 출소 이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모로핀에 중독되어 결국 2010년부터 1년 반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전인권의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면서, 들국화의 재결합은 물 건너간 것처럼 여겨졌고 어느 순간부터 전인권의 근황조차 거의 들려오지 않아 많은 팬들이 우려하는 상황이 되었다.
2012년 5월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세 멤버가 모여 공식적으로 재결성 기자회견을 가졌다. 특히 전인권은 건강이 심각했던 2000년대 후반경의 모습과 달리 매우 단정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해 많은 팬들과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2012년 8월 MBC 놀러와 출연을 시작으로, 윤도현의 MUST와 콘서트 7080, 불후의 명곡 등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 연달아 출연하고 여러 락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진정한 전설의 귀환을 알렸다. 전인권은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목상태가 많이 회복되어, 이전보다 훨씬 청량한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며 원숙미까지 더해져 1980년대와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의 전성기 목상태로 완전히 회귀했다는 평을 받았다.
2013년 초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하고, 여러 락페 등을 돌며 새 앨범 발매 계획을 알렸다. 팬들에게 축제처럼 즐길 앨범이라며 앨범 발매에 대한 기대를 한 껏 높혔고, 록씬에서도 들국화의 새 앨범에 대한 기대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10월 20일, 드러머 주찬권이 자택에서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근 30년만에 재결합에 성공, 열심히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순간 일어난 비극적인 죽음이라 들국화 멤버들과 팬들은 통한을 감추지 못했다.
2개월 뒤인 2013년 12월 3일, 신곡인 '걷고, 걷고' 가 먼저 선공개되었고 6일 뒤인 9일 정규 4집 앨범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주찬권은 생전 드럼 파트 녹음을 마친 상태였고 이 외의 세션 멤버로는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 등 국내 음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인원들이 참여했다. 2CD로 구성되어 있는데, 1CD에는 타이틀 '걷고, 걷고'를 포함한 신곡이 들어있으며 2CD에는 리메이크 곡들이 들어있다.
주찬권의 죽음과 4집 앨범 발매 이후 들국화는 다시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 한 전인권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2016년 자신의 4집 타이틀 곡 '걱정말아요 그대'의 재히트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발한 방송활동과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 최성원은 다시 제주도로 낙향해 2016년 9월까지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 밤 최성원입니다> 의 DJ를 맡았다.
전인권은 뉴스룸에 출연해 "들국화의 재결합은 없다." 라며 향후 재결합 가능성을 확실히 부인하였다. 이는 최성원과의 불화가 큰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재결합 활동 당시 인터뷰와 방송에서 주찬권이 무던한 성격으로 두 사람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언급이 많았던 것으로 미뤄보아, 주찬권의 불의의 부재가 결국 다시 해체로 이어진 듯 하다.

현재의 한국 록 음악을 정립한 밴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들국화가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신중현, 유재하, 김현식, 조용필, 산울림, 송골매, 김수철, 서태지와 아이들 등과 함께 한국 대중 음악사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그룹이다. 그들의 음악세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곡으로는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이 있으며 암울하고 어두웠던 지난 날들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명곡들이다.
해방 후 새로운 형식의 한국 감성으로 각광받던 포크 음악을 잘 계승하면서도 정형화된 록 음악의 형태를 도입했고, 민주화 운동 시기 빼놓을 수 없었던, 저항 정신도 갖춘 완전체라고 보면 된다.
들국화의 경우, 한국 음악 시장에서 록씬은 이미 이전부터 들국화 전성기 당시까지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김현식 등의 걸출한 뮤지션이 있었고, 포크 계에도 세시봉 4인방,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조동진, 이장희, 정태춘, 어떤날 등등 상당한 거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새로이 태어나는 한국적인 음악, 즉 '현대의 한국음악'이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들국화는 당시 그 '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이루고 있던 큰 두 갈래인 록과 포크를 모두 포괄하는 아티스트였고,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뉘어있던 그 '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직접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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