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록은 1960년대에 등장한 신중현의 애드 훠, 김홍탁의 키보이스 등이 영미의 음악을 흡수했고 이후 지미 헨드릭스 류의 사이키델릭 록으로 사운드의 폭을 넓혀갔다. 국내에서는 미8군과 고고클럽을 중심으로 그룹사운드 전성시대가 펼쳐졌고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라스트찬스, 데블스, 김 트리오, 트리퍼스, 검은 나비 등 다양한 밴드들이 활약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의 도래는 1975년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인해 철퇴를 맞게 된다. 이 암흑기는 박정희 정부가 막을 내리는 1979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기존 한국 그룹사운드와 차별화된 록 밴드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6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음악을 레퍼런스로 삼은 새로운 세력들이었다. 라스트찬스의 전신 격인 ‘와일드 파이브’ 출신의 최우섭이 미국에서 결성한 무당이 한국에 돌아왔고 대학가요제 출신인 작은거인과 마그마 등은 여타 스쿨밴드들과 달리 프로페셔널하면서도 강한 록을 들려줬다. 이들은 1980년대 초반 앨범을 발표하면서 국내 가요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의 음악은 기존 로큰롤, 사이키델릭 록에서 진일보한 ‘한국 하드록의 시작’이라 할 만한 결과물이었고 카피 위주가 아닌 창작곡 중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했다. 또한 악곡, 연주 면에 있어서 60~70년대 그룹사운드와 80년대 중반부터 앨범을 내기 시작한 시나위, 부활, 백두산, 카리스마, 뮤즈에로스, 블랙홀, 블랙신드롬 등 헤비메탈 밴드의 중간다리이기도 했다.

무당은 흔히 한국에서 미국 스타일의 정통 하드록을 처음 시도하고 나아가 헤비메탈까지 접근한 밴드로 거론된다. 무당은 최우섭(1954~2025)이 1975년 미국에서 결성한 밴드다. 최우섭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1960년대 후반부터 미8군과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최우섭은 이태원의 세븐클럽, UN클럽, 007클럽을 비롯해 명동과 종로의 오비스캐빈, 실버타운, 미도파살롱, 마일드클럽 등에서 활동했으며 미8군 내 사병 클럽, 장교클럽에서는 신중현, 락 앤 키, 윤복희, 이금희, 서수남·하청일이 재적했던 컨트리 밴드 ‘그랜드 올 오프리’, 박인수 등의 선배들과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원래 베이스를 연주했던 최우섭은 김태일(기타), 나원탁(기타)과 함께 와일드 파이브로 활동하다가 미8군의 쇼 밴드로 스카우트되면서 밴드를 탈퇴했다.
이후 1967년에 김태일과 나원탁은 새 베이시스트로 곽효성을 영입하고 당대의 록 보컬리스트였던 김태화와 함께 라스트찬스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후 최우섭은 이중산(기타), 한춘근(드럼) 등 당시 최고의 테크니션들과 활동했고 더 후,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게스 후의 레퍼토리를 주로 연주했다. 최우섭과 본래 친구 사이였던 김태화는 김석규(기타), 노승준(건반), 곽효성 등과 밴드를 결성해 딥 퍼플의 'Child In Time'과 같은 레퍼토리를 소화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선배 그룹사운드들과 다른 ‘하드록 세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또한 김태화는 당대의 보컬리스트라는 명함에 걸맞게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혔던 김양일을 비롯해 미국 버클리로 유학 가기 전에 이미 촉망 받는 신예들이었던 김광민(건반), 한상원(기타)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최우섭은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그는 작곡을 하기 위해 기타로 전향하고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이 설립한 "블루왈츠"라는 재즈스쿨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현지의 록을 습득한 최우섭은 이듬해 미국에서 만난 차종면(드럼), 정진(기타), 김성관(베이스), 장화영(건반)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고 뒤따라 미국에 온 김태화가 보컬로 합류했다. 이들은 결성초기에는 "라스트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나중에 "무당"으로 팀명을 변경했다. 무당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시애틀, 로스앤젤레스를 돌면서 대학가,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했다. 관객은 교민과 현지인이 반반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태화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 김도향의 곡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출전하기 위해 귀국했고 인기를 얻게 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최우섭은 당시 TBC에 있던 선배 서병후한테 레이프 가렛 한국 공연을 추진하려고한다는 연락을 받고 공연을 추진했다. 최우섭은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 프로모터의 자격으로 1980년 한국에 돌아왔다.
1980년 계엄령으로 세계적인 팝 가수 레이프 가렛의 서울 남산 숭의음악당 내한공연이 무산될 뻔했다. 당시 1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는 무조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미국문화원장이 직접 나서 성사된 이 공연의 세션으로 한국인 밴드 무당이 선택되었다.
최우섭은 당시 최고 인기 밴드였던 사랑과 평화를 오프닝으로 세우려 했지만 레이프 가렛 측에서 강한 록밴드를 원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무당이 오프닝 공연을 맡게 됐다. 최우섭은 미국에 있던 정진과 차종면을 급하게 불러다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숭의음악당에서 열린 레이프 가렛의 콘서트는 8일 12회 공연이 보름 전에 모두 매진될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 몰려든 관객들 때문에 숭의음악당 철문이 부서질 정도였다고 한다. 함께 무대에 올라 강한 하드록을 선보인 무당은 화제의 밴드로 떠올랐다. 그렇게 최초의 해외파 밴드였던 무당을 통해 국내에 정통 하드록이 얼굴을 드밀게 된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자 레이프 가렛과 무당은 방송국 특집 녹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최우섭은 국내에 없던 마샬앰프 JCM800과 이펙터들을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와 연주했고, 처음 듣는 파열음에 깜짝 놀란 방송국 PD들은 번번이 연주를 중단시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무당은 국내 최대 음반사였던 오아시스레코드로부터 앨범 두 장을 내는 조건에 1,000만원의 계약금을 받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당시 조용필이 700만원을 받을 때니까 최고 대우였다. 하지만 무당의 앨범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최우섭은 미국에서 만들었던 영어 가사를 한글로 바꿨지만 거의 대부분 음반심의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국내는 광주사태 이후 계엄령이 걷히지 않은 상황으로 더욱 규제가 심해진 이른바 계엄 심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최우섭은 이태원에서 함께 활동했던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이중산에게 아예 모든 기타 연주와 편곡을 맡겼지만 연주자들의 면면에 비해 결과물은 평범했다. 파격적이었던 라이브에 비한다면 1980년 발매된 무당의 1집 <무당>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녹음을 앞두고 비자 문제로 멤버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홀로 남은 최우섭은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이중산과 베이스 박찬용, 드럼 황종수를 수소문해 녹음에 들어갔다. 녹음 과정은 난항이었다. 급조한 멤버들의 사운드는 제대로 된 헤비메탈을 선보이기엔 무리였다. 1집 앨범은 국내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사운드였지만, 급조된 멤버와 검열로 원형이 훼손된 곡 탓에 헤비메탈의 진수를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그대 생각' 등 8곡(건전가요 제외)의 창작곡을 수록된 음반은 앞면에 무당의 이니셜을 의미하는 ‘MD’ 로고를 그린 재반과, 로고가 없는 초반 두 가지가 존재한다.
서사적이고 클래시컬한 분위기의 '무지개' 등 멜로디가 좋은 수록곡이 많았지만, 급조된 멤버들과 사전 검열 탓에 원형이 훼손된 노래들은 헤비메탈의 진수와 거리가 먼 결과물을 낳았다. 최우섭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돈 여유가 있었다면 계약금 1천만 원을 돌려주고 음반 제작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곡이 심의에 탈락하고, 통과한 곡들도 가위질당해 동요 수준이 되어버린지라 1집은 고통 그 자체였다”고 털어놓았다.
최우섭은 60~70년대보다 더 나빠진 국내 음악 환경에 실망했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중산은 국내 언더그라운드 씬에 쭉 머물렀고 미국으로 갔던 장화영은 나중에 H2O의 멤버로 돌아오게 된다.
미국으로 다시 떠났던 최우섭은 2집을 내기 위해 1983년 귀국했다. 다행히 계엄령이 걷힌 상태였고 심의도 한풀 꺾여 1집에서 잘려나간 '멈추지 말아요'와 같은 곡이 2집에 실릴 수 있었다. 이 노래는 무당의 유일한 히트곡이 됐다. 2집은 최우섭과 이건태(드럼) 단 둘이 녹음했으며 최우섭 혼자 보컬, 기타, 베이스를 모두 소화했다. 무당의 1집 <무당>과 2집 <멈추지 말아요>는 수록곡이 상당부분 겹친다. 최우섭은 한국에서 다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계약상의 문제로 앨범을 내야 했고 1.5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레코딩에 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앨범은 전혀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록곡이 겹치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집이 록이었다면 2집에는 하드록에 헤비메탈의 요소가 첨가돼 있었다. 특히 '그 길을 따라', '무당'과 같은 곡은 기타 리프와 드럼 연주 면에서 하드록과 헤비메탈 사이에 존재했다. 수록곡 중에는 정통 헤비메탈 사운드를 구사하는 강력한 기타 리프를 담은 '그 길을 따라'같은 곡이 있었다. 그래서 이 음반은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3년 2집 <멈추지 말아요>를 발표한 무당은 1집 때와 달리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때의 라인업은 보컬, 기타 최우섭, 보컬 지해룡, 베이스 김일태, 드럼 한봉 등의 4인조였다. 무당은 방송활동과 함께 야외축제, 소극장 무대, 이태원 클럽 등 다양한 라이브 무대에 올랐다. 최우섭은 베이스에 김일태, 드럼에 한봉을 영입했고 보컬로는 김태화가 다시 합류했다. 이들은 "무당과 김태화"란 이름으로 용평 팝 페스티벌, 남이섬 페스티벌에서 UFO의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후 무당은 "젊음의 행진", "영일레븐", "쇼2000"과 같은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당시 장발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무대에 오른 무당은 격렬한 퍼포먼스와 연주로 일반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MR 위주인 방송국 시스템 때문에 PD, 엔지니어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면도를 요구한 방송관계자들과 다투는 일도 많았다. 또한 무당은 이백천이 개최한 롯데호텔의 록페스티벌에서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3인조로 활동하던 들국화, 동방의 빛 등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국내 유일의 라이브 그룹으로 명성을 얻어가던 무당은 1985년 2월 장길수 감독의 <밤의 열기 속으로> 영화 음악을 맡았다. 당시 직접 영화에 출연했던 리더 최우섭은 "한국 영화 음악은 감미로운 멜로디 위주였다. 또 영화 음악은 영화의 부속물로 그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밤의 열기 속으로>의 영화 음악은 이 두 가지 점에서 탈피, 새로운 영화 음악을 창조하려는데 의미가 있었다"고 회상한다. 영화 속에는 무당의 콘서트 장면이 상당 부문이 삽입되었다.

최우섭은 활동의 거점이었던 이태원에 연습실을 차렸는데 그곳에 시나위, 김종서가 재적했던 시절의 부활, 백두산 등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연주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후배 연주자들과 조우한 최우섭은 무당의 공연에 이들을 오프닝으로 세우기도 했다. 당시 밤무대 업소에서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지만 무당은 철저히 거절했다고 한다. 최우섭은 “밤무대 악사들하고는 상종을 안했고 가수들과 인사도 안 했다. 우리는 우리와 음악적으로 맞지 않으면 아예 안 봤다”고 말할 정도로 음악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상황에 한계를 느낀 최우섭은 1985년 한 TV 쇼를 마치고 나와 멤버들을 모아놓고 하루아침에 무당을 정리했다. 공식적인 해체 발표도 없이 최우섭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고, 이듬해에는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차례로 데뷔앨범을 내며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1년 최우섭은 25년 만에 무당을 재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2013년 <Past & Future vol. I>을 MD Band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이앨범은 4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이다.
2019년 무당이 The MD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앨범 <Past & Future II & I>에는 The MD의 신곡 및 군사정권 하의 심의제도에 의하여 발표되지 못했거나 강제적으로 가사가 바뀌어야만 했던 곡들이 원작자의 의도대로 다시 복원되어 수록되었다. 정규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군사정권 하에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던 메인 타이틀 ‘때늦은 후회 (Too Late)’, 밝고 신나는 느낌의 하드록 넘버 ‘Dreams Come True’, 세월호 침몰사고로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는 곡 ‘Sea of Tears’ 등 세월이 지나도 날카롭게 살아 있는 무당, The MD의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
최우섭은 2025년 11월 미국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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