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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한국적 정서를 살린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1947년 2월 22일,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백령도로 출전했던 아버지가 전사하고, 9살 되던 1955년에는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는 행방불명되었고 그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인천신흥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하였다. 

8~9살 때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낡은 악보로 음계를 공부하고 음을 조합하여 작곡을 하는 어린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공부도 상당히 잘 해 늘 우등생 집단에 속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던 그는 음악에 인생 목표를 정하고 꼭 제물포고등학교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서울예고에 진학하여 성악을 전공한다. "사람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 나는 모차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래서 내가 모차르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모차르트가 누군지 알고 나니까 엄청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클래식은 돈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다. 그러나 무료로 레슨을 해주던 분이 떠나고 홀로 연습을 하며 공부를 했지만 비싼 레슨을 받으며 시험을 준비한 동급생들을 따라갈 수 없어 계속 유급을 하고 만다.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기로 하고, 결국 1년만 다닌 후 중퇴하였다. 송창식 본인은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시킨 거다. 왜냐하면 낙제됐으니까. 나는 선생님이 없어 실기시험을 못 봐 0점을 받았다. 그때는 죽을 만큼 괴로웠다"라고 말하며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류상으로는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한다. 서울예고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이라고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우리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잃어버리면 어디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면 내가 있었다. 라디오 방이라든지 약 장사들이 들고 다니는 음악책을 펼쳐 보니까 콩나물 대가리들이 있었는데 음정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가사로 부르는 게 너무 지루하니까 그걸로 부르다 음계를 알았다"라고 말했다. 

트윈 폴리오는 우연의 산물이었다. 유명한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윤형주는 연세대 의대생, 송창식은 가짜 홍대생이었다. 원래는 연세대 토목공학과에 다니던 이익균까지 세 명이 ‘세시봉 트리오’를 만들어 활동할 예정이었는데, 이익균에게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남은 두 사람이 만든 게 트윈 폴리오다. 그들의 ‘교과서’였던 미군 부대 팝송 책에 ‘song folio’라고 적힌 것을 보고 ‘트윈 폴리오’(twin folio)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트윈폴리오



이렇게도 대조적인 쌍둥이(트윈)가 있을까? 송창식의 목소리나 창법이 거친 황야를 지나는 바람 소리 같다면, 윤형주는 포근하고 밝고 따뜻하다. “송창식 음악에서 흙냄새, 바람 소리, 힘이 느껴진다면 내 음악은 가정적이고 포근하다고 평론가들은 말하지요”라면서 윤형주도 이 점을 인정한다. 음악만큼이나 두 사람의 개성이나 삶도 대조적이다.

세시봉 출신으로 1970-19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로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의 일방적인 해체 통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작권료로만 매해 수천만원의 수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쓸 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서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세시봉 가게에서 밤에 피아노 덮개를 이불 삼아 덮고 자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료 양희은의 증언에 의하면, 송창식이 자신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면적에서 잘 수 있다"고 웃으며 이야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방황하다가 어느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이 블루스 경연대회를 보고 크게 충격받는다. 아마추어라고 비웃다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고 20년간 음악을 해왔는데 아마추어만도 못한 실력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이후 그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비스 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다. 

 


수많은 히트곡과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맑고도 힘 있는 가창력으로 양희은, 어니언스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 포크락을 주도한 한국 가요사에 남을 위대한 가수다. 세시봉-청개구리로 대표되는 초창기 포크음악에서, 싱어로는 아마추어를 완벽히 탈피했다는 평을 받는다. 

송창식 특유의 감성과 노래 가사에 나타나는 주인공 행동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애드립부터 클래식 전공자답게 엄청난 성량까지 지닌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이다. 원래는 정확한 음정, 발음을 구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부르는 미성이었는데, 트윈폴리오 끝무렵부터 창법이 변하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사를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여기에 가사를 맞추는' 것이라 하며, 특유의 웅얼거리는 느낌이 완성되었다.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막말도 곧잘 하고 노래에 자부심이 상당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할 정도다. 실제 윤형주에게는 염소 목소리 같다고 가수를 하지 말라고 디스를 한 적이 있지만, 송창식을 향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단 한번도 디스한 적이 없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출연했을 당시 조영남의 증언에 따르면 노숙자도 아니고, 아주 남루한 사람이 다 뜯어진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클래식 가곡을 환상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자신을 '쎄시봉'으로 이끌어 준 MC 이상벽을 만난 송창식은 "쎄시봉 이전에는 최말단 노숙자였다"라며 "2년 동안 서울역에서 잤다"고 밝혔다. 
이어 쎄시봉에 합류한 배경을 설명했다. 송창식은 “그 해에 겨우 건설현장에 가서 야방(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생활하는 곳)에 가서 춥지 않게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쫓겨나서 쎄시봉으로 갔다. 그 때까지는 전부 (힘든) 언더그라운드에 있다가 쎄시봉에서 밥을 준다 하니까 거기가 온그라운드였다”고 했다.  
이상벽은 “내 기억으로는 홍익대학교 앞에 기타 치는 많은 학생들 중에서 송창식을 내가 쎄시봉으로 데려갔다. 데리고 간 것이 송창식의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팝음악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싫어했다. 쎄시봉에서 조영남을 만난 게 전환점이었다. 조영남을 안 만났으면 팝송에 대한 의욕이 안 생겼을 거다. 조영남 노래를 듣고 팝송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윤형주는 연세대 의대생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윤형주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창조적인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다. 

사실 보컬로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세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하얀 손수건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이듬해 1968년 <트윈폴리오 1집> 앨범과 함께 '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또 이듬해 1969년 영화 <푸른 사과>의 조연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하였다.  

1970년 3월, 남성 듀오 트윈폴리오의 리드 보컬 송창식은 팀 해체와 더불어 MBC TV <목요살롱>을 통해 솔로 가수로 새 출발을 했다. 데뷔 초기의 송창식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만한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상업적인 포크 가수였다. 그래서 은유적인 저항적 노래 가락에 공감하는 정통 포크 팬 중에서는 그를 향해 인기에만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송창식은 타고난 노래 실력과 달콤한 멜로디로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MBC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자였던 DJ 이종환은 자신이 기획하고 제작한 <별밤에부치는 노래 씨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방송의 중요 초대 가수였던 송창식을 선택했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1971년 첫 번째 송창식의 정규 앨범<송창식 애창곡 모음 - 별밤에 부치는 노래씨리즈 Vol.1>에는 그가 직접 작곡하고 이장희가 작사한 ‘창밖에는 비 오고요’가 실려 있다. 정규 앨범에 수록한 곡으로 그가 직접 작곡한 첫 번째 노래였다. 이 노래 외에는 대부분 외국 곡에 그가 작사한 것들로 트윈폴리오 해체 이후 솔로로 독립해 1년여 동안 불러왔던 자신의 애창곡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의 트윈 폴리오 시절까지만 해도 번안곡을 부르는 가수였던 송창식이 본격적으로 작곡을 결심한 계기는 김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70년, 솔로로 독립하여 창작곡 '창밖에 비오고요'를 발표했지만, 본인의 표현으로는 욕먹지 않을 정도의 곡이어서 앨범에 한번 실은 거였다고 한다. 김민기가 1971년,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전체를 자신의 자작곡으로 채운 자신의 1집 앨범 <아하 누가 그렇게>를 냈을 때, 송창식은 그 앨범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송창식과 김민기는 서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는데, 이후 송창식은 김민기와 공동으로 만든 두번째 앨범과 초기의 최대 걸작인 '나그네' 등의 명반을 연이어 내놓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민기가 1978년 살벌한 유신독재 시절 공장의 불빛이란 노래극의 음반을 녹음할 때, 선뜻 자신의 녹음실을 빌려 줬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밀고를 했더라면 송창식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 당하고, 활동금지 처리된 뒤 그날로 가수 생명이 끝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 

 

 

상아의노래

 

이후 1972년 정규앨범인 <애창곡 모음 2집>에는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나그네’, ‘자장가’를 비롯해 윤형주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비와 나’, 김민기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내 나라 내 겨레’, 김희갑이 작곡한 '상아의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상아의 노래'는 이 앨범의 또 다른 화두이다. 앨범 발매 이후, 이 노래가 대학생은 물론 중고생까지 즐겨 부르는 엄청난 히트곡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모든 대학 축제 무대에서, 특히 여학생에게서 앙코르 요청이 가장 많았던 대학가 최고의 애창곡이었다. 또한 지금도 7080 세대들에겐 애틋한 학창 시절의 옛 추억을 불러오는 마력의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상아의 노래'는 송창식이 오리지널 가수가 아니다. 이 곡을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가수는 리나박이었다. 당시 김희갑의 아내였던 그녀는 1969년 '상아의 노래'를 취입했는데,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가수 역시 리나박이 아닌 트로트 가수 이미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1969년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에 그가 조연으로 등장하고 이 영화에서 ‘내 나라 내 겨레’가 연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푸른 사과>에는 앳된 송창식이 등장한다. 

송창식이 인기 절정을 누리자 구설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루비시스터즈 전 멤버 주미옥, 인기 정상의 TV 탤런트 한혜숙, 양정화, 홍콩 배우 로리타와의 염문설이 줄줄이 터져 나왔고, “장사하러 나간다”며 가출했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찾아오는 등 수많은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솔로 2집 앨범으로 완벽하게 스타 가수로 떠오른 송창식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밤눈

 

이어 1973년 발표한 정규 3집 앨범<Brand New Song>에는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가 대다수를 이룬다. ‘꽃보다 귀한 여인’, ‘밤눈’, ‘철 지난 바닷가(최영호 작사)’가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은 "안건마 편곡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이 음반 역시 김희갑 작편곡집에 비한다면 '모던'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송창식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존중하면서 절제되게 편곡된 사운드를 담고 있다. 
수록곡 중 히트곡 '밤눈', '철지난 바닷가'의 작사가 최영호는 소설가 최인호의 필명이다. 이 앨범에는 최인호의 본명을 작사가로 표기한 명곡 '꽃, 새, 눈물'과 '쉬잇'도 함께 수록하여 4곡의 작사에 최인호가 참여하였다. 
앨범의 대표곡인 '밤눈'은  통기타 가수 인생을 끝맺기로 마음먹고 만든 곡으로 송창식은 “다시는 만들 생각도 없고 그렇게 부를 수도 없는 노래”라고 말했다. 가식 없는 진정성을 담은 노래였기에 지금껏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며 특히 듣는 이의 마음에 숨은 그리움을 일깨우는 최고의 겨울 시즌송으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이렇게 점점 그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로 앨범을 채워가기에 이른다. 그가 6개월 단기 보충역으로 군에 입대한 것이 1973년 10월이니 아마도 이 앨범은 그가 입대한 이후에 발매된 것으로 보이고 작업은 군 입대 이전에 모두 마쳤을 것이다. 
군 생활을 마치고 새로 내놓은 앨범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다른 노래들이다. 오늘의 송창식을 만든 노래는 대부분 군에서 제대하고 난 이후에 발표된 것들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

 

1974년 4집 <Song Chang Sik> 앨범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곡으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의 과도기적 성격은 수록곡들의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앨범에 수록된 열 곡은 각기 다른 열 개의 스타일에 입각해서 만들어져 있다. 포크가 있는가 하면 록이 있고 팝이 있는가 하면 트로트가 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스타일은 한데 융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제각기 고립되어 앨범을 단편화/분절화시켜 버린다. 송창식은 이 앨범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적 장르를 실험함으로써 뭔가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음반은 무려 네 개의 히트곡을 배출함으로써 '가수 송창식'의 인기를 더욱 단단한 지반 위에 올려놓았다. '맨 처음 고백', '한걸음만', '새는' 그리고 '한번쯤'이 이 앨범에 실린 히트곡들이다. 

 

 

새는

 

디양한 쟝르가 뒤섞여 있는 가운데 앨범의 백미라할 '새는'은 송창식이 발표한 모든 노래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고도 남을 명작이다. 당시 한국 록을 주도하던 사이키델릭을 대폭 수용, 앨범 전체의 반주를 맡고 있는 동방의 빛과 함께 그 어떤 그룹 사운드에도 뒤쳐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다음 해인 1975년 그를 가수왕의 자리에 오르게 해준 '왜불러' 와 아직까지도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있고 그의 대표곡 중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고래사냥'은 그의 독집앨범에는 없고 75년에 나온 영화 <바보들의 행진> OST 앨범에 다른 가수들의 노래와 함께 실려있다. 그의 노래들이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청년문화의 기수로서 추앙받게 된다. '왜 불러'와 '고래사냥'이 영화의 대히트와 함께 1975년 MBC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최우수 인기가수상을 받으며 싱어로서 최고의 정점에 올라선다. 

 

 

고래사냥

 

'고래사냥'은 1975년 소설가 최인호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스스로 곡을 붙여 부른 노래로 당시 유신헌법을 앞세운 권위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내면 풍속도다. 이 시기에 나타난 시대이념과 감성의 표출이 바로 ‘청바지·생맥주·통기타’ 문화다. 가슴속에 울화를 품은 청년들의 묵시적 일체감이었다. 
'왜불러'는 영화에서 장발의 청년들이 장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에서 쓰였는데 청년들이 달아나면서 경찰들에게 "왜 불러"라고 놀리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 바로 이 노래였기때문에, 당시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 명단에 오른 곡이다. 

 

 

딩동댕 지난여름

 

1975년 발매한<송창식 1>에 수록된 '딩동댕 지난여름'은 1972년 포크가수들의 실황앨범<맷돌>에 '딩동댕'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던곡을 '딩동댕 지난여름'으로 다시녹음하여 수록하였다. 
같은해 발매된 <송창식 2>에서는 송창식의 곡인 '꽃보다 귀한 여인'이 수록되었다.

 1976년 발매된 <그대 있음에 / 이슬비> 앨범은 수록곡 중 '그대 있음에', '이상해', '둘이 둘이만' 등 3곡만 신곡이고이전 곡들을 재편곡하여 수록한 앨범이다. 
송창식은 포크 가수이지만 의외로 블루스 느낌이 강한 곡도 불렀다. 이 앨범에 수록한 '이슬비'와 1974년 발표한 '밤 눈'이 대표적이다. 타이틀곡 '그대 있음에'도 블루스 느낌이 강하다. 특히 '이슬비'는 여타 블루스 명곡에 못지않은 진한 블루스 느낌을 담은 곡이다. 

 

 

가위바위보

 

1978년 6월 6집 <송창식 독집-가위 바위 보>를 발매했다. 그러나 새로운 노래는 '가위바위보', '새벽길', '걷지말고 뛰어라' 세곡뿐이다. 송창식은 이 앨범을 발표한 해에 참가한 MBC 서울국제가요제 수상을 시작으로, 1979년과 1980년 2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송창식은 <가위바위보>라는 간단한 놀이를 서사적인 노래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 노래는 송창식보다 최병걸이 먼저 발표했다. 기타리스트인 아버지 최용익의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한 최병걸은 1977년 발매한 음반 <가위바위보 / 그사람>에서 이 곡을 먼저 발표했다. 

당시 송창식의 자격 정지로 인해 최병걸의 노래까지 묻히게 되자, 결국 송창식이 이듬해 이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가위바위보'를 다시 발표하면서 노래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는 1977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가위바위보>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부모를 일찍 여읜 삼 남매가 해외로 입양 가는 순간, 맏딸이 동생들을 먼저 해외로 입양보내기 위해 일부러 가위바위보에서 져주는 슬픈 이야기를 담았다. 

 

 

사랑이야

 

1978년 7월 발매된 7집 <사랑이야/ 토함산>에서 수록곡 10곡 중 아름다운 발라드 '사랑이야', 트로트 감각을 계승한 아트록을 연상시키는 '토함산'이 인기를 누렸으며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선에도 선정된 명반이다. 
국악의 리듬과 창법으로 훵크, 포크 등 서구의 팝 형식을 감싸 안는 시도가 이 음반에서 처음 시도되었으며,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토함산','돌돌이와 석순이'는 바로 이 새로운 방향성이 극에 달한 통쾌한 작품이다. '사랑이야'와 '잊읍시다'는 송창식의 시원한 발성과 섬세한 정서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며, '나의 키타이야기'는 포크에 기초한 곡 위에서 훵키한 베이스가 수를 놓으며 송창식의 목소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곡이다. 

 

 

토함산

 

'토함산'에서 도입부의 맑은 목탁소리와 염불처럼 길게 쏟아내는 보컬은 아트록의 사운드 배치를 연상시킨다. 이 곡은 1978년 경향신문 주최 서울국제가요제 국내 대회 진출작으로 선정돼 <’78서울국제가요제 옴니버스라이브>에 실렸다. 
특히 '사랑이야'에서 들려준 메이저 키 인트로와 마이너 키 보컬 멜로디를 오가는 구성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실험적이고 작가주의적인 시도였던 '사랑이야'로 그는 1979년 MBC 10대가수상을 수상했다. 이 곡은 ‘송창식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로도 유명하다. 
송창식은 시와 소설에서 받은 영감을 가사로 엮어냈는데. 문학 작품의 제목을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주제를 충분히 내면화한 후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구성했다. 그런 면에서 이 앨범에 실린 음악은 향후 송창식의 음악 활동에 이정표가 됐다. 

 

 

병사의 향수

 

비공식 군가로 불리는 일명 '고향의 향수' 는 송창식이 작곡한 노래다. 원래 군가로 지정된 노래는 아니며, 가수 송창식의 가요 '병사의 향수'(1978)가 개사되어 전해진 것이다. 원곡과는 가사와 곡조가 모두 미묘하게 다르다. 실제로, 송창식도 자신의 노래를 군가로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노래는 방위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에 대대장이 "여기 군대에 있으면 심심할 건데 군가나 한 번 작곡해보라"라고 해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본래 군가도 아닌 대중가요이기도 하며, 그 가사와 곡조가 꽤 처연하고 구슬퍼서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들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노래다. 원곡이 엄연한 대중가요였으므로 저작권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군가로 지정될 수가 없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된 부대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 노래를 훈련소 조교들이 가르쳐줘서 배운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8년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이때 발표된 곡으로는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이 있다. 

 

 

가나다라

 

 

1980년 <'80 가나다라 송창식>를 발매했으며 '가나다라'로 가요에 노악과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MBC인가가요차트 1위를 4주연속 차지하고 82년 제1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타이틀곡 <가나다라>가 대변하듯 이 앨범의 키워드는 한국적인 대중가요였다. 송창식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악과 서양 음악의 접목은 없다. 접목은 근본이 비슷한 것끼리 가능한 것이다. 가끔은 서양 노래도 부르지만, 내 음악의 기본은 국악이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가나다라'는 송창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재일교포 3세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든 곡이라고 한다. 
'가나다라'는 1982년 고 김수환 추기경이 위원장을 맡았던 가톨릭매스컴위원회가 주최한 제1회 가톨릭가요대상에서 작사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적인 음악을 지향한 송창식의 시도가 공적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에이야홍 술래잡기'는 술래잡기 놀이와 관련된 여러 상황을 유쾌하게 묘사했다. 가야금을 연상시키는 기타 연주, 중반부에 <아리랑>의 일부를 차용한 연주가 등장한다. 펑키한 리듬과 비트를 담은 '사랑사랑 오, 오, 오'에서는 송창식의 뛰어난 가창력을 엿볼 수 있다. 

 

 

슬픈얼굴 짓지 말아요

 

1982년 발매한 <'82 송창식>에서 수록곡 중 '마의태자'는 금지됐지만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그사람' 등이 인기를 누렸다. 주류 정서를 고려한 쉬운 멜로디나 작위적 가사를 쓰지 않았지만 앨범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 앨범은 이미 중견 대중음악가였던 송창식의 다양한 작곡 스타일을 망라했다. '애들은 가라'처럼 밝고 팝적인 느낌이 가득한 포크송부터 '오늘 같은 날처럼'과 같이 3/4박자의 트로트 정서가 담긴 곡까지 다양하다. 
'슬픈얼굴 짓지 말아요'는 간결하고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게 만들어진 곡이며 '나미야'는 경쾌한 왈츠풍으로 피아노 애드립이 멋지며 송창식의 가창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노래이다.

 

 

우리는

 

1983년 발매한 <'83 송창식>네서는 '우리는...'과 '푸르른 날'이 큰 인기를 얻었다.
한 편의 시와 같은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우리는...'으로 제 4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수상했으며 이 노래는 연인 관계를 넘어 세상사 여러 관계에 담긴 사랑을 표현했다. 특히 1983년 후반 발생한 KAL 747 여객기 피격 사건과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로 슬픔에 잠긴 국민을 위로하는 곡으로 사랑받았다.

 

 

담배가게 아가씨

 

송창식은 1986년 정규 음반<'86 송창식-참새의 하루>을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정규 음반에는 ‘참새의 하루’, ‘선운사’, ‘담배가게 아가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앨범 이후에는 노래만 부르고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가사의 해학성은 물론이고 형식의 자유로움을 시도하는 과감함 등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펑키한 리듬의 매력적인 기타 연주는 사랑과평화 최이철의 솜씨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2012년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동네 담배가게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순박한 청년들과 거만한 부자 청년 등이 등장하는, 1980년대 시대상을 그린 작품이었다.   

 

 

나의 기타 이야기

 

송창식의 노래는 이런 자유롭고 발랄하면서도 저항적이었던 1970년대 대중의 정서를 온전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시대의 정신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고래 사냥’, ‘내나라 내겨레’는 그 시대의 저항을 대중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노래이면서 ‘한번쯤’, ‘맨 처음 고백’ 같은 노래는 사랑의 정서를 구체적인 생활 감성에 빚대어 표현한 노래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 ‘나의 기타 이야기’ 같은 노래는 송창식 스스로 음악가로서 자신의 존재론적 자아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어울려 1970년대라는 한 시대를 표상한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공동체와 개인의 다채로운 면모들이 송창식의 노래에는 담백하고도 사실적으로 담겨있기에 동시대를 살아간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고 마침내 시대를 뛰어넘어 고전의 반열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2015년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통기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가수 송창식 노래로 만든 뮤지컬 <피리 부는 사나이>가 2026년 6월 12일 초연되어 무대에 오른다. 일제강점기 격동의 시기를 헤쳐 나간 청년들 삶과 꿈을 포크음악의 서정적 감성에 담아 그려내는 작품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송창식 음악과 일제강점기 젊은이들 이야기를 결합해서 낭만과 저항의 교차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청춘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송창식 노래가 공연이나 영화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된 적은 있으나, 전곡이 그의 음악으로 채워져 무대화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피리 부는 사나이’, ‘고래사냥’, ‘담배가게 아가씨’, ‘가나다라’ 등 한국 가요사에 족적을 남긴 송창식의 명곡 20곡이 뮤지컬로 관객을 만난다. 작가 정찬수, 편곡가 한혜신, 연출가 심설인, 음악감독 박재현, 안무가 한선천 등 국내 뮤지컬계에서 참신한 시도를 선보이는 젊은 창작진이 제작에 참여했다. 
출연진은 노래로 사람을 위로하는 청춘 ‘영수’ 역을 최민우, 김리현, 조성태가 맡는다. 비밀을 품은 경성의 스타 ‘지혜’ 역에 이태은, 이루원이 출연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열단원 ‘영기’ 역은 윤석현, 조성윤이 출연한다.  

 

푸르른 날

 



《송창식 애창곡 모음: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1971년 2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 나는 너 / 내 나라 내 겨레》(1972년 유니버어살)
《Brand New Song》(1973년 11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1》(1975년 8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2》(1975년 8월 유니버어살)
《Song Chang Sik》(1976년 8월 신세계)
《그대 있음에,이슬비》(1976년 11월 신세계)
《송창식 독집: 가위바위보》(1978년 6월 신세계)
《사랑이야, 토함산》(1978년 7월 서라벌)
《송창식 골든앨범: 그대 있음에,새는》(1979년 11월 신세계,예음)
《`80 가나다라》(1980년 9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1집》(1982년 2월 한국음반)
《`82 송창식》(1982년 2월 한국음반)
《송창식 16》(1983년 2월 서울음반)
《`83 송창식》(1983년 5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2집》(1986년 11월 한국음반)
《`86 송창식: 참새의 하루》(1986년 11월 한국음반)
《다시 부르는 노래》(1987년 12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3집》(1988년 10월 킹레코드)
《송창식 골든포크》(1989년 8월 한양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