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한 각종 공식 프로필에는 1954년 10월 10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 흔했던 늦은 출생신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하여 자랐던 평택의 도두리(棹頭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장은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 둔포(屯浦)면에 위치한 장이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므로, 이 성장기의 환경은 이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지만, 악기를 접하고 취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빈농의 가정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료한 농촌 생활이니만큼 그와 그의 셋째 형은 틈만 나면 이 기타를 붙잡고 놀았는데,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한 번 들은 노래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 동안 많은 빈도로 악기를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코드나 주법의 체계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어찌어찌하면 이러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라는 걸 체득하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하튼 이 기타로 인해 음악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택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악기와 본인의 궁합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 평택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하며 음대에 진학할 꿈을 가지게 된다. 당시 정태춘의 모습은 소박한 시골에서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성적인 소년이 맞이한 첫 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할 수 있었던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된 것이었다. 당연히 밴드부에서 현악기의 존재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날이 불투명한 시골 청소년들의 루트인 무리지어 몰려 다니기, 흡연, 외박 등이었다. 비록 내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희망 학생에서 시골의 불량 잉여로 전락해 버린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버스에 낀 성에를 갖고 시를 지어 보일 만큼 감수성 하나만큼은 다른 잉여들과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학진학은 실패.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좌절당해 방황하는 것을 보기 안스러웠는지 집안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 가량의 바이올린까지 사서 그를 셋째 형이 있는 서울로 그를 보내어 을지로 3가에 있었던 서울음대에 레슨까지 받게 하며 재수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은 외모에 대한 자학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헤세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탐독하고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니는 등 뒤늦게 찾아온 중2병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시 직전이던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 발표되자마자 재수생활을 때려치고 귀향하는데, 이는 딱히 확고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찬 결의였다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 자세가 임계점을 넘나들던 가운데 발생한 사회적 이슈가 발화점이 된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신경써서 보냈던 어린 자식이 무작정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서 반겨줄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그는 몇 번씩이나 무작정 집을 나가 전국을 방황하거나 목욕탕의 화부로 일을 하는 등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행을 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당시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는 그저 방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 축적된 감수성, 혹은 내재적인 사고들은 그의 음악적 세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도중 그는 입대를 하게 되고, 군생활 가운데 그의 초기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어찌보면 외적인 방황이 제한된 군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내재된 정서를 정리하여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한 1978년 11월,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어 군생활 동안 정리한 곡들을 처음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
1978년 당시 여전히 대중문화 전체를 포크가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음반 <시인의 마을>은 꽤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나름대로 여유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뷔 앨범임에도 굉장한 완성도를 자랑하는데, 당대의 포크송들은 외국의 노래들을 번안하는, 다분히 외국 감성의 노래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앨범은 이후 정태춘이 꾸준히 보여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정태춘 특유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적인 가사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해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촛불'이 상당한 히트를 쳤다.
이 시기 같은 서라벌 레코드 소속 가수였던 박은옥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까지 수상하면서 '연예인'으로서도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 그의 향후 행보를 결정하게 되는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시행한 음반사전심의제도와의 만남이다. 그의 첫 번째 음반의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을 포함하여 몇몇 곡들은 공윤에 의해 가사 변경을 권고받게 되고, 수정하지 않으면 음반 발매가 되지않았기에 서라벌레코드에 의해 가사를 수정하여 발표한다. 일례로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은 1978년 6월 19일 심의 결과 원작 시의 확인을 위해 보류되었다가 확인해 보니 시와 무관한 대중가요로서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있다고 부적절하다 하여 전면 개작결정 조치를 받았다. 당시 심의에서는 시인의 마을이 원래 있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으로 보고 원작 시를 찾았지만, 당연히 시인의 마을은 정태춘이 직접 작사한 곡이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시작과 연결 없는 대중가요 가사로는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부적절하다고 사료됨으로 전면 개작 요망함"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처분을 받았고 결국 서라벌레코드 사장은 정태춘을 대신해 가사의 여러 부분을 수정해 심의를 통과했다.
이 일은 이제 갓 입봉한 신인 가수 입장에서 뭣도 모르니 시키는대로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깊은 내면의 고민 끝에 만든 자신의 곡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도 합당하지도 않은 의견과 더불어 수정을 강요당하는 경험은 그에게 또다른 고민을 안겨준 듯 하다.
또한 이 시기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신인 연예인이 거칠 수밖에 없는 방송국 출연을 통한 홍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고민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랑운동회'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먹거나 밀가루 범벅에 얼굴을 파묻고 찹쌀떡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고민이 그저 내면의 고민으로 끝나지는 않는 법,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신인 주제에 건방지고 뻣뻣한 놈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스럽게 기피 대상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째 음반을 준비하게 되는데, 첫 음반의 성공을 지켜본 서라벌 레코드는 그에게 선곡의 권한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대중적 성공에 있어서는 패착이었다.
1980년 발매된 정태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는 전작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음반사는 차기작의 제작을 정태춘에게 맡겼다. 달콤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기대했던 팬들의 기대와 달리, 이 음반은 단 1곡의 히트곡도 내지 못했다. 이 음반은 시인이 되고자 했던 정태춘의 자아를 중심으로 음악 색채 찾기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정태춘의 2집은 음악적 수준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사망부가'나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의 수록곡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인 특색이 더욱 강조되고 깊이가 있는 것이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뻣뻣하고 싸가지 없으며 어딘가 불순한 놈으로 인식된 상황에서 음반의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1982년 발매된 정태춘의 3집 <새벽길 / 우네>는 2집의 실패에 이어 3집 역시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고 시장에 음반이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게 된다. 3집의 노래들 역시 정태춘 특유의 정서는 더욱 강조되었고, 반주 중 상당수를 국악으로 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았던 음반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로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는 경제적으로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작권에 따른 수입 체계나 음반 유통의 정확한 통계에 따른 인세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체계는 꽤나 허술해서, 레코드사에서 계약금조로 주는 돈에다가 월급조로 주어지는 생활비가 일종의 음반과 공연에 대한 정산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 이러한 생활비 지급이 중단된다. 음반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가 따라왔지만 그야말로 핑계일 뿐, 누가 봐도 저조한 흥행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그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장 방황이 심했던 시기였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때 손을 내민 것은 당시 메이저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지구레코드였다. 지구레코드가 제시한 조건은 4년 전속 계약으로 800만원이었다.
이 계약으로 인해 1984년 4번째 음반인 <떠나가는 배 / 사랑하는 이에게>가 발매된다. 이때부터 그의 음반은 정태춘이 아니라 '정태춘, 박은옥'의 부부 듀엣의 이름으로 발매된다.
이 4번째 음반은 나름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비록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곤궁한 이전 시절의 경제적 고난은 겪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정확한 판매량 측정에 따른 인세 개념은 없었던 시기였지만 음반사로부터 계약금 외의 수입이 발생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1985년 연이어 발매된 정태춘, 박은옥의 다섯 번째 앨범 <북한강에서 / 봉숭아> 역시 나름대로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은 타이틀곡 '북한강에서'등이 히트곡이 된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반이면서도 정태춘 음악의 특징인 서정성이 담긴 시적 가사에 토속적 정취가 느껴지는 멜로디와 편곡을 사용해 음악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음반이다.
이들 부부의 공연에서는 절반 이상의 선곡이 4집과 5집에서 나온다. 1985년 LP와 테이프로 발매 후 이후 지구레코드에서 CD로도 나왔고 ‘정태춘 박은옥 골든’이란 이름으로 4•5집을 합본한 CD로도 나왔다.
비록 대중음악인으로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회생했지만 그가 가졌던 고민과 의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내면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민과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전국적인 공연을 시작한다.
그의 전국 공연은 현재와 같은 소위 '콘서트'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대규모 공연 스탭과 물량을 동원할 수준의 가수는 아니었고, 1985년 1월 부산 카톨릭회관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진 그의 공연은 대부분 소극장 내지 대학의 강당 수준에서 벌어지는 공연이었다. 다만, 이는 어떠한 지향점을 가졌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현실적인 형편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의 공연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사실 그는 상당히 애매한 수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문과 고민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방황에 가까운 형태로 공연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러한 소규모의 공연장에서 대중과 가깝게 접촉하면서 이전과 대비하여 비교적 체계적인 형태의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1987년, 그동안의 노래들을 정리한 발췌곡집 음반을 낸 후 1988년 연이어 6집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 새노래>를 발표한다. 정태춘은 이번 앨범을 통해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작사, 작곡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편곡에도 참여하고, 북, 꽹과리, 기타도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노래들이 듣는 이들에게 아무런 설득력 없이 다시 무감한 일상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그렇게 사라져가는 여기 노래들 속에서 저 슬픈 ‘고향’이라는 단어 하나와 내려치는 북소리 만이라도 부디 오래 기억되어지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작업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의 움직임들과 함께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는 그간 우리 사회의 모순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만나고자 했다. 그들 자신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 즉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 이러한 그의 변화의 조짐과 고민의 흔적은 <무진 새 노래>에서부터 보여지기 시작하며 87년 6월 시민민주항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우리 사회의 부정의와 모순에 맞서 싸우는 이 땅 다수 소외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중운동진영에 적극 동참하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새로운 노래들을 창작 발표하기 시작한다.
<무진 새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공연을 통해서 실연된 노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단순히 전통적 음악기법과 처연한 정서 중심이었던 기존 노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공윤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이를 통해 무언가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사실, 이 음반은 당시 공윤의 기준으로는 발매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어서 가사 수정 명령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그는 19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집회와 대학가의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8년 12월부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공연을 시작한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단편적인 노래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가진 노래극 형태의 공연이었고, 당시 제도권 대중음악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당대 사회적인 시류, 특히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생과 음악생활을 통해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그의 음악적 특성은 당시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혹은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적인 정서와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소위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운동권과 연계된 탈춤, 풍물 동아리, 전통문화연구 동아리 등이 존재했었고 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중반의 청년문화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을 돌며 벌어지는 정태춘의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온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정태춘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음반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대중을 만났던 그에게 젊은 대중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의 이야기, 탁치니 억하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와 공연장 밖에서 날마다 휘날리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구체적인 이유 등을 듣게 되는 기회였던 셈이다. 1989년 4월까지 이어진 이 공연을 통해 그는 비로소 그의 음악적 지향점의 기초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노래를 위하여 공윤과의 힘겨운 싸움에 나서게 되는데 1990년 발매된 <아, 대한민국...>은 공윤측의 심의결과 및 가사 수정지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제작되어 배포된다. 단, 당대의 법률 체계를 거부한 음반이므로 공식적인 유통 경로를 거쳐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연장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같은 해 기존의 '음반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을 새로 상정하여 1991년 2월 8일 국회 본회의를 거쳐 발효시킨다. 정태춘은 1991년 1월 29일 구성된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장이 되어 이 사전검열 제도와의 전면전에 돌입한다.
<아, 대한민국...> 음반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음악에 대한 사전검열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저항을 시작한 최초의 음반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음반은 한국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이 음반은 당시 대중가요계와 민중가요계, 즉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소위 '운동권 가요'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이들에게 동시에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음반의 노래들은 정태춘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되, 담겨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통쾌한 메시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천재적인 풍자시로 추앙되었다. 당시까지 대중가요계에 형식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소속되어 있던 음악가 중에서 이정도 수준으로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제시한 이는 전무후무했다. 또한 민중가요의 측면에서는 예술적 수준의 격을 몇 차원 넘어서는 노래들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민중가요계의 메이저였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꽂다지', '조국과 청춘' 등도 민중가요 자체가 가지는 한계, 즉 메시지의 전달성을 강조함에 따라 희생되는 예술적 수준의 저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즉,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려지고 유통되던 노래들은 집회를 위한, 혹은 운동권에 참여하는 이들의 정신적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메시지 전달과 대중의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성의 수준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가사는 지나치게 직설적이었고 일반 대중이 향유하는 언어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어휘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가사에 붙여지는 멜로디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선호하는 군가나 행진곡 풍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민중가요들은 그 의미에 맞지 않게 일본 군가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요나누키 음계'를 기반으로 하거나, 희망새나 천리마 같은 강성 NL 노래패들은 '절가 형식'과 '주체창법'이란 북한식 음악체계를 시도하며 '조선', '미국놈' 등 북한에서나 쓸법한 용어까지 써서 일반 시민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 창작자들 중 상당수가 음악을 전공한 프로페셔널 음악가가 아니라 조금 높은 수준의 관심 및 재능을 가진 대학생들 내지는 젊은이들이었을 뿐이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 등장한 정태춘의 노래들은 음악적 수준에서도 메시지의 질적 수준에서도 넘사벽의 수준이었던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음악 활동을 통해 일관적으로 견지해 온 전통적 요소들은 형이상학적 수준의 이념적 지향, 혹은 이상적 지향에 따라 도입했던 어설픈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 기반하여 체화된 것이었기에 고작 대학 생활 동안 탈춤 몇 번 추고 풍물 공연 몇 번 하고 졸업한 뒤 대부분 일반 직장인이 되어 다시는 그러한 문화와 접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대학생 창작가들의 창작물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 음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그 비판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음악이 가지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선, 혹은 여집합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은 다수 대중이 선호하는 것과는 멀어져 선동적 메시지들을 담은 또다른 운동권 가요에 불과하다는 대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과 그 비판의 내용과는 역설적이게도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못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곡들이 많다는 점, 다시말해 운동권 집회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민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이 동시에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당대 격렬했던 정치, 사회적 흐름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아무런 책임감도 의무감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저항했던 대상들과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이 획일화된 사고와 태도를 가졌다는 점에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결여된다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음반이 당시 음비법상 불법으로 규정된 채 발매됨으로써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다소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1996년 정식발매시 이 음반은 <정태춘 5>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발매하였는데, 이 5라는 숫자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순서였다. 발췌곡집 등의 컴필레이션 성격의 음반을 제외한 정규음반으로 따지면 이 음반은 7집이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앞서 발매된 6장의 앨범 중 박은옥과 함께 한 음반을 제외한 순수 정태춘 홀로의 음반을 따진다면 이 음반은 4번째 음반이 된다.이는 당시 그는 이전의 자신의 히트곡들은 진정한 노래가 아니었다 생각하며 더이상 예전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그 노래들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판 사서 들으라’며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했다.그래서 그런 노래들이 여럿 실린 4,5집을 정규음반으로 치지 않으며 이런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1993년 발매된 8집 <92 장마, 종로에서>는 <아, 대한민국…>에서 넓어진 세상에 대한 관심의 폭을 유지한 채, 그 시기의 흥분을 가라 앉히고 세상을 다시 차분히 바라본다. 서울 출퇴근 지하철 안, 추수 후 짚단을 태우는 농민, 코메리칸이 모여 사는 LA, 자신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비 오는 종로거리, 섬진강의 일본 관광객들. 이런 것들을 그는 마치 스케치하듯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포크를 기조로 하면서 트로트, 남도 구음, 풍물 등 각기 다른 음악들이 가진 의미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음악적으로 풍경화를 그려나간다. 그의 풍경화는 이제 자신의 내면 풍경을 넘어서서 세상의 흐름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 앨범 역시 "가요에 대한 정부의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기자회견 등 공개리에 발표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새 법률 <음반 및 비디오 물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정태춘을 고발조처 하였다.
정태춘은 재판과 TV 토론회, 공청회 등을 통해 가요에 대한 정부 검열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재판부에 그 법률에 대한 <위헌 제청 신청>을 하였다. 1995년 말, 헌법재판소에서 이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 판결>이 나오기 직전, 국회는 <음반 및 비디오 물에 관한 법률> 중 '가요에 대한 정부의 강제적 사전 심의제 삭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서, 정태춘은 무죄 처분되었고, 일제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가요 검열제도>와 그 업무 관련의 정부 기구(<공연윤리위원회>)도 전면 폐지, 개편되었다.
결국 이 앨범은, 이 개정 법률이 공식 시행되는 1996년 6월을 기해 그 기념 공연인 < Concert 자유>(서울대 노천극장) 현장에서 이전의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과 함께 정식 시중 발매용 합법 CD로 합법 출시되었다.
이 6년 여에 걸친 <정부에 의한 가요 사전 검열제 폐지 운동>에는 가요 진영과 다양한 여타 쟝르의 예술인들이 적극 동참, 지원하였다.
1998년 2월에 발매된 9집 <정동진 / 건너간다>은 정태춘 박은옥의 20주년 기념 음반인 이번 음반은 혼돈의 7~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깊은 사색과 성찰의 산물이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랫말은 고유의 서정성과 리얼리티를 지니며 멜로디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마치 한편의 시를 연상케 하는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는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이의 삶의 태도, 자세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노랫말로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의 노래는 사랑타령, 이별타령 등의 흔한 대중가요 정서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담아낸다.
다양한 대중가요 장르 속에서 이들이 불러온 노래는 서정적인 분위기와 토속적인 노랫말 그러면서도 치열한 현실인식이 내재되어 있는 우리 삶을 그대로 관통하는 한국의 포크 가요이다. 현실을 담은 노랫말과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첫 곡 ‘정동진’은 노랫말이 줄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그대로 펼쳐내고 있으며, 분단된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을 ‘민통선의 흰나비’에서 노래한다. 노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5.18’의 가슴 아픈 심정도 청자에게 전해주고 있으며, 마지막 곡인 ‘수진리의 강’은 해 지는 도회지의 쓸쓸하지만 고단한 현대인의 일상을 토닥이며 위로해준다.
또한 이번 앨범에서는 이전 앨범에 비해 더 풍성한 관악기, 현악기가 더해진 편곡으로 듣는 이들에게 한층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건네며, 그들의 20주년을 노래한다.
9집앨범과 2002년 11월 발매된 10집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이전 앨범인 <92 장마, 종로에서>가 가지는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회한과 공존하는 희망'의 정서는 이전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이어서 단순히 민주화, 혹은 진보 세력의 패배에 의한 상실감과 그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변화상에 따른 '회한과 희망'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는 또다른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시기여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연세대 사태로 인해 대학 운동권이 그야말로 박살난 가운데 이미 대학생들은 취업을 통해 기존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만을 희망하는 존재들로 전락했다. X세대라는 그 누구도 모를 용어로 정의되는 이들과 오렌지족들이 생겨났고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가운데, 양극화의 극단적인 부작용으로 지존파가 등장하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내믹한 변화들은 IMF 사태로 귀결되어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듯 한국 사회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들에 나타나는 회한들은 더더욱 깊게 침잠되었다. '92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 나오듯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차량기지 마저 지나쳐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의 정서는 '건너간다'에 이르러서는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표정하고 지친 이들을 싣고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가'는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희망의 정서 또한 여전하여 그는 여전히 정동진에 떠오르는 '쌍무지개'와 '어둠 걷혀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을 끝으로 10년간 침묵하게 된다.
정태춘은 제16대 대선을 1년여 앞둔 2001년 12월 발족한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탈퇴했고 고민 끝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노문모가 노무현이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견인할 어떤 세대의 세력화를 이루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문건으로 제출했고 토론도 했지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곳을 탈퇴했다.
김대중 정권 즈음 부터 그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맞서는 거대 담론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90년대 이후 진보운동에서는 오히려 시민의 일상, 지역의 문제 같이 미시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편향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권력은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지만 그는 '권력은 국가에서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의 정확한 현실 인식은 함께하던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2002년 이후 일체 음악 작업과 사회 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는 경기도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소위 대추리 사태에 적극 참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택의 대추리 및 도두리 지역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정신적, 음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당시 평택 일대의 다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금전으로 치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미군과의 협상 및 국회 비준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주민들 다수의 동의도 없이 토지를 강제수용했으며 2006년 초가 되지 파종한 논밭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갈아 엎는 등의 행정집행을 강행했다. 2006년 5월 4일 새벽 4시 경찰 1만3천여명에 용역 직원 및 군병력까지 투입된 대추분교 철거 작전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고 수백명의 부상자까지 속출시키는 그야말로 '사태'가 되었다. 정태춘은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그 역시 다른 주민들과 함께 극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경찰에 연행된다.
그는 노무현의 사망 후 각종 추모 집회의 공연과 마지막 추모 문화제인 '잘 가오, 그대'의 총연출을 맡아 이미 사자(死者)가 되어버린 이와 화해를 하고, 2009년 30주년 기념 공연 등을 하긴 했지만, 새로운 앨범은 더이상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2012년 1월, 근 10년의 침묵을 깨고 그의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발매되었다. 새로운 앨범을 내지 않으려는 그를 돌아세운 건 다름 아닌 아내이자 음악 파트너인 박은옥.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만난 이후 거의 싸우는 일이 없었던 이 부부는 이 앨범의 제작을 설득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싸워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돌아세운 건 세상에 무언가 의미를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좁혀서 그저 담담하게 노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박은옥의 설득이었다.
이전 앨범에서 10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발표된 그의 곡들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메시지는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음악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더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에 비해 전반적인 사운드가 보다 차가워진 느낌을 주면서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전통적인 정서가 단순히 한국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제 3세계 음악까지 끌어안는 모습도 보여준다. 시작곡인 '서울역 이씨'에서는 여전히 낮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처연한 정서가 오히려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신곡 중 마지막 곡인 '날자 오리배'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올라 이상 세계를 향하는 모습이 표현되며, 마지막 곡이자 이 부부가 스스로에게 헌정하는 트랙인 '92 장마, 종로에서'는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부부가 다시 부르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정태춘은 이번 앨범에서 작사 작곡과 편곡 (박은옥의 노래 2곡은 '정박'의 오랜 밴드 동료 박만희가 편곡) 외에도 처음으로 얼후('눈 먼 사내의 화원')와 일렉 기타('서울역 이씨')의 연주, 앨범 쟈켓과 가사지 안의 8장의 사진도 선보인다.
'날자, 오리배...'에서는 가까운 동료들인 강산에, 김C, 윤도현이 독특한 코러스로 함께 참여하였다.
또 이 앨범에는 지난 1993년에 발표했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더 차분해진 편곡으로 부부가 다시 불러 '헌정 트랙'으로 올려 놓았다.
그 뒤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오랜만에 공개석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2019년에는 30주년 프로젝트와 비슷하나 규모가 좀 더 크게 40주년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공연,예술작품 전시,정태춘의 저서 출간과 복간,학술회 등이 진행되었다. 공연의 제목은 11집 수록곡에서 따온 ‘날자 오리배’였는데 2019년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었다. 코로나19와 조류 인플루엔자로 취소된 몇몇 지역의 공연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2023년 쯤이 되어 개최될 수 있었다.
2025년 4월 13년 만에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가 발매되었다. 시와 노래, 정태춘이 오랜 시간 집필한 붓글 등을 통틀어 문학 프로젝트로서 앨범 발매 전국 투어 공연이 치러졌으며, 6월 4일부터 15일까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붓글씨 전시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여기 수록된 곡들은 긴 노래 창작 공백기에 써두었던 시와 단문들, <붓글>의 텍스트들을 토대로 하거나 그 기간 거처하거나 움직였던 여러 공간들의 퐁광과 감회를 모티브로 하여 현재의 상상력과 시적 언어로 풀어낸 한 편의 <시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년 여간 내려다녔던 원주시 부론 강변 작업실에서의 메모들, 지인들과 자주 함께 했던 지리산 악양에서의 이야기, 그의 거처 송파와 마포에서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이번 앨범의 주 포인트는 여전히 그의 <가사>이며, 그 가사를 담아내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때로 담백하거나 화려한 편곡의 반주 연주는 그의 오랜 음악 경력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여전히 사회의 주변부와 약자들에 대한 연대와 애정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정태춘은 한국의 대중음악사와 사회운동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현재까지도 서구음악 중심인 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내포한 음악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대중음악가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물론 국악이나 사물놀이 등의 요소를 차용하여 활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으며 굳이 정태춘이라는 음악가 혼자서 그러한 위계를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의 경우 그의 음악에 축적된 전통적인 요소와 정서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과 성장, 인생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또한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뛰어든 여러 사회적 장면들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크로스오버의 음악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또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낸다는 면에서 그의 음악은 당대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고 향유된 것으로, 음악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음악이 끌어안은 정서는 언제나 주류가 아닌 소수 약자들의,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들의 것이었고, 이와 유사한 것을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포크라는 장르가 단순히 통기타 반주로 행해지는 어쿠스틱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과 소통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그는 김민기와 한대수로 시작된 이래 이미 고인이 된 김광석과 더불어 한국 포크계열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치환이나 류금신, 권진원처럼 민중가요의 영역에서 입지를 굳혀 기존가요로 진출을 시도한 예는 더러 있지만 촉망받는 기성 가요계의 신인이었다가 노래하는 투사로의 방향전환은 정태춘이 유일하다.

음악사적인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더라도 정태춘은 한국 최고 수준의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위 말하는 폭발적인 파워의 보컬은 아니지만, 정제된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듯이, 푸념하듯이, 혹은 담담하게 소화하는 그의 가창력은 모방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경지에 닿아 있다. 특유의 철학적인 가사의 의미나 감수성을 담아낸다는 측면에서 볼 때 단연코 최고의 가수. 그의 등장은 당시 트로트가 전부였던 가요판을 다양하게 바꾸었다는 평가도 있다.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그가 1990년대 초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일은 한국 문화계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앨범
정태춘 <시인의 마을> (1978년)
정태춘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0년)
정태춘 <새벽길 / 우네> (1982년)
정태춘 박은옥 < 떠나가는 배 / 사랑하는 이에게> (1984년)
정태춘 <북한강에서 / 봉숭아> (1985년)
정태춘 박은옥 < 무진 새노래> (1988년)
정태춘 <아 대한민국> (1990년)
정태춘 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3년)
정태춘 박은옥 <정동진 / 건너간다> (1998년)
정태춘 박은옥 <20년 골든앨범> (2002년)
정태춘 박은옥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02년)
정태춘 박은옥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2012년)
정태춘 <2019 사람들> (2019년)
정태춘 박은옥 <집중호우 사이>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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