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식은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부친은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조부 역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조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1958년생이나, 음력으로 설날 전날인 1957년생이기에 1964년에 서울혜화국민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외가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국민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한동안 옥천에서 유년 시절을 잠시 지냈었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5학년 때 서울에 있는 서울삼청국민학교로 전학가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전인권이 재동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둘 다 가수 데뷔 한참 전이었는데다 학년도 달랐기에 서로 누군지도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서울수유국민학교로 또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참고로 초등학생 시절에는 굉장히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1970년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보성중에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 재학 시절 처음으로 기타를 접했다. 사촌형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까지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고교 낙방으로 인해 좌절을 하여 술과 담배에도 조금씩 손을 대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전교 3등으로 입학했고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한 선배의 트럼펫에 제멋대로 손을 댄 문제로 인해 그 선배가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대판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초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17세 나이로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서울 종로의 작은 업소 ‘벌판’의 오디션을 통과해 무명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당시를 “출연료도 없이 지배인 기분에 따라 차비 몇 푼씩 받는 게 고작이었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술회했다.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점차 명동의 ‘쉘부르’, ‘썸씽’ 등 큰 무대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 때 나이를 5~6살 올려 소개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나비, 동방의 빛, 메신저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어느 날 포크 가수 이장희의 친동생 이승희가 듀엣 결성을 제의하자 이름도 없이 잠시 듀엣 활동을 했다. 이 무렵 송창식, 이장희 등 스타 가수들의 무대 막간을 메우는 들러리 가수로 국도호텔 나이트클럽에 출연했다.
밤무대에서 활약하던 무명 가수 김현식의 노래 실력을 눈여겨본 선배 가수 이장희가 1976년 김현식을 찾아왔다. 당시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가수 활동을 접고 의류 매장을 운영하던 이장희는 서울 사직동 아이템풀학원 지하에 연습실을 차리고 제작자가 되어 가수들의 음반 취입을 도왔다.
이장희는 뛰어난 감수성과 호소력 짙은 보컬을 지닌 김현식의 가능성을 보고 데뷔 앨범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현식의 자작곡을 중심으로 녹음하던 중에 이장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고, 이후 1978년 정식적인 데뷔를 준비하나, 대마초 흡연 혐의로 몇달 간의 옥살이를 거치며 데뷔가 미뤄지게 된다. 결국 <봄여름가을겨울 / 당신의 모습>은 5년간 묶여 있다가 해금 조치 후 1981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했다.
1981년 5월 발매된 김현식의 데뷔 앨범 <봄여름가을겨울 / 당신의 모습>은 포크,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수록곡은 다소 설익은 느낌이지만, 김현식 음악 인생의 공식 출발점이 된 음반이기에 의미가 있다.
이 앨범은 음악의 통일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김현식이 포크,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맑은 미성으로 소화하며 나름대로 의욕을 보였지만, 아직 음악적 노선은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록곡 10곡은 김현식의 창작곡 4곡과 김광식, 이규형(이장희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 김현수 등 외부 작곡가 3명의 곡, 이미 발표된 사랑과평화의 연주곡 2곡까지 다양하다. 이 앨범은 A, B면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A면이 밴드 세션으로 진행한 리드미컬한 분위기라면, B면은 통기타 연주를 중심으로 김현식의 미성이 도드라지는 차분한 포크 질감이다. 김현식의 창작곡인 타이틀곡 '봄여름가을겨울'은 향후 그가 리드한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모토가 됐다.
역시 그의 창작곡인 '떠나가 버렸네'는 향후 김현식의 전매특허가 된 절규하는 창법의 시작이다. '어하둥둥 내 사랑'은 펑키와 퓨전을 뒤섞은 사랑과평화의 세션 연주가 흥겹다. 통기타 반주에 미성으로 들려주는 '당신의 모습'은 실연의 아픔을 안겨준 첫사랑을 떠올리며 쓴 포크송이다.
이 앨범에는 발표 당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각기 다른 앨범을 통해 빛을 본 노래가 5곡에 달한다. '어하둥둥 내 사랑'은 김현식 1집에 먼저 녹음됐으나, 이 음반의 발표가 늦어지면서 1979년 발표한 혼성 밴드 들고양이들 2집에 '어화둥둥 내 사랑'이란 제목으로 실린 곡이 먼저 히트했다.
'떠나가 버렸네'는 1989년 발표한 신촌블루스의 <라이브 Vol.1> 앨범에서 김현식이 다시 불렀고, '당신의 모습'도 김현식 2집 앨범에 재수록하면서 비로소 반응을 얻었다. '주저하지 말아요'도 방미가 리메이크해 히트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이 2집에서 리메이크했다.
김현식 1집 <봄여름가을겨울 / 당신의 모습>은 비록 음악적으로 설익은 데뷔 시절의 음악을 담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발매된 이 음반은 김현식 음악 인생의 공식 출발점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2집을 내기 전인 1984년 3월에 태광음반에서 7인치 싱글 레코드 <사나이 노래>를 발표했는데 타이틀 곡은 '사나이 노래'이다. 1집과는 달리 굉장히 굵지만 허스키와는 거리가 먼 창법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다만 상업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실험성이 돋보였던 앨범인지라 소량만 발매하였기 때문에 남아있는 매물이 적어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가에 거래되는 음반이 되어버렸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1집 발매 후 김현식은 서라벌레코드 소속 가수들과 군 위문 공연 등을 돌며 미약한 활동을 하다가 1982년 이화여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김경자와 결혼했다.
서울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자신의 분신이라 부르며 사랑하던 아들 완제를 얻으며 구원을 받는 듯했다. 처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고모가 준 돈으로 피자 가게를 열어 직접 배달도 하며 평범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김현식은 그 와중에도 음악적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프랜차이즈의 공습에 밀려 1년 만에 문을 닫고 투자금도 날린 후 다시 밤무대 활동에 전념한다. 밤에는 그룹 ‘검은나비’의 리드싱어로 명성을 날리며 방미에게 ‘주저하지 말아요’라는 히트곡을 작곡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 TV에서 민해경과 같이 팝송을 부르는 김현식의 가창력을 눈여겨본 동아기획은 그를 스카우트해 동부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2집 작업에 들어갔다.
1984년 9월 김현식 2집 앨범 <사랑했어요 / 어둠 그 별빛>을 발매하였다. '사랑했어요' 오리지널 버전을 담은 이 음반 발표 후 김현식은 공연과 라디오 방송으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트로트, 블루스, 소울, 펑키 등 김현식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을 망라한 음반이다.
김현식은 생전에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스타스토리 김현식의 넋두리 자서전’에서, 2집 <사랑했어요 / 어둠 그 별빛>에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 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 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김현식의 의지는 동아기획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실현되었다. 동아기획은 김현식의 음악적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고, 김현식 역시 동아기획과의 연대에 충실했다.
1집에서 여러 작곡가의 노래를 불렀던 김현식은 2집 앨범을 통해 총 11곡(건전가요 제외)이 수록된 2집에서 7곡을 직접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이 앨범은 대표곡 '사랑했어요'를 비롯한 수록곡 모두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사랑과평화의 최이철이 기타를 담당한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애처로운 가사와 포효하는 듯한 보컬이 매력적인 '어둠 그 별빛'과 '회상', 소설가 겸 작사가 양인자의 노랫말이 인상적인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은 김현식 음악의 핵심인 ‘사랑’과 ‘외로움’의 마이너 감성으로 가득하다.
앨범 발표 당시 김현식은 정성조와 메신져스의 객원 보컬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사랑했어요'가 다운타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는 등 2집이 크게 성공하자, 이에 고무된 김현식은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한다.
1986년 12월 발매한 3집 <김현식Ⅲ>은 솔로 가수의 앨범이 아니라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작품이다. 젊은 실력파 연주자를 기용해 상업성과 비평적 성취를 모두 거머쥔 음반으로, 김현식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상위권에 올랐다.
이 앨범은 독집 개념으로 발표됐으나 실은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작품이다. 김현식은 2집 타이틀곡 '사랑했어요'로 언더그라운드 스타가 됐지만, 정작 그는 2집을 탐탁찮게 여겼다. 스튜디오 세션 연주자보다 자기 밴드와 앨범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자퇴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밴드로 활동했던 김현식은 밴드 음악이 익숙하고 편했다. 명성 높은 기성 연주자보다 젊은 얼굴을 원했던 그는, 동료들에게 수소문해 유망한 젊은 음악가를 영입하면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했다.
초기 멤버는 김종진(기타), 장기호(베이스), 유재하(키보드), 전태관(드럼)이었으나, 유재하가 솔로 활동을 위해 떠나자 박성식을 영입했다. 이들은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음악 작업에 깊이 관여했다. 김현식을 음악적 우상으로 여겼던 김종진도 앨범 작업 때는 동등한 동료였다.
김현식은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반영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백밴드 형태였지만, 앨범 기획과 제작, 녹음에 이르기까지 적극 참여할 만큼 독립된 밴드였다. 록, 블루스 외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현식은 김종진과 장기호의 의견을 많이 배려했다. 덕분에 앨범은 완전한 밴드의 색깔을 띠었다. 봄여름가울겨울 멤버들은 당대 음악에 밝았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최고의 보컬리스트 곁에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인 셈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곡 작업에도 참여하기 원했다. 김현식은 이들의 재능을 십분 활용했다. 숙제처럼 곡을 만들어오게끔 각 멤버에게 작업을 할당했고, 만든 곡은 합주하고 편곡해 앨범에 실었다. 김현식 본인도 작곡에 참여했다. 그렇게 만든 여러 곡이 담긴 만큼 스타일도 다양했다. 당시 록과 블루스에 심취했던 김현식의 취향이 그대로 앨범에 담겼고, 김종진과 장기호가 쓴 퓨전 재즈 성향의 곡, 유재하와 박성식의 발라드까지 포진했다.
박성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필두로 김종진의 '쓸쓸한 오후', 장기호의 '그대와 단둘이서',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등 다른 스타일의 노래는 앨범 완성도를 높이고 다양성을 부여했다. 김현식도 '빗속의 연가', '눈 내리던 겨울밤'으로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보였다.
3집을 대표하는 '비처럼 음악처럼'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김현식의 이름은 언더그라운드를 넘어 대중에게도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 곡은 발표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이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건 김현식의 보컬이다. 초창기의 미성을 벗어나 이 앨범부터 거칠어지기 시작한 목소리는 '빗속의 연가'나 '비오는 어느 저녁' 같은 블루스 스타일 곡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비처럼 음악처럼', '눈 내리던 겨울밤'에서 보여준 김현식만의 ‘소리 지르기’는 그만이 들려줄 수 있는 짜릿함이었다. 밴드는 김현식의 독보적인 목소리를 잘 보좌하면서, '눈 내리던 겨울밤' 등의 극적인 연주로 보컬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비처럼 음악처럼'의 인기로 이 앨범은 3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제3회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했다. 당대 최고의 멤버들이 만들었기에 음악적 성과도 뛰어나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13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술과 약물에 의존한 김현식의 불안한 행보로 밴드는 곧 해체됐다. 유재하는 일찌감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그 직후 유명을 달리했다. 장기호와 박성식은 사랑과평화를 거쳐 기타리스트 한경훈과 함께 빛과소금을 결성했고, 김종진과 전태관은 2인조 봄여름가을겨울로 거듭났다.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을 빛낸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드림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이혼을 하며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 신촌블루스의 멤버로서 1집 앨범 준비 중이던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 등과 함께 다시 대마초 흡연 및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 선처를 부탁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김영 사장은 김현식을 수차례 정신병원에 집어 넣어 기타, 녹음기, 컴퓨터 등을 가져다 주고 곡을 쓰게 했다.
김영 사장 덕분에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 1988년 2월에 김현식은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실망시킨 데 대한 사죄의 뜻으로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 김현식은 관중석을 꽉 채운 600여명의 팬들을 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며, 그 때의 콘서트는 잊혀지질 않는다고 회고했다. 음악 활동에 대한 열의를 다시 불태우며 밤샘 녹음 끝에 1988년 9월 4집 앨범 <Vol.4>를 발표한다.
김현식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4집 앨범에서 밴드의 이미지를 벗고 솔로 가수다운 면모를 선보였다. 거칠었던 보컬은 정련되고 성숙해졌다. 건강 악화 전에 만든 마지막 앨범이란 점도 중요하다. 1987년 대마초 파동으로 칩거하던 김현식은 이 앨범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한 4집 앨범 <Vol.4>는 김현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김현식은 20만 장이 팔린 3집의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듯했지만, 1987년 마약 상용 혐의로 구속되면서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을 발판으로 극적으로 부활했다.
4집이 나온 1988년부터 활동을 재개한 김현식은 이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노래를 들려줬다. 당시 컴백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찼던 김현식은 새 앨범 작업을 위해 스스로 곡을 모으고 다녔다. 총 10곡을 수록한 4집에는 이정선의 '한밤중에',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장기호의 '사랑할 수 없어', 윤상의 '여름밤의 꿈' 등이 담겼다. 특히 김현식이 가사를 쓴 '언제나 그대 내 곁에'는 깊은 울림이 있는 곡이다.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도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곡 대부분은 김현식이 직접 작곡가를 섭외했으며, 윤상의 '여름밤의 꿈'은 송홍섭의 소개로 추가한 곡이다.
앨범을 만들 곡을 모은 김현식은 송홍섭을 찾아가 편곡을 맡겼다. 사랑과평화 출신인 송홍섭은 김현식 1집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바 있는데, 4집부터 7집까지는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았다.
편곡 의뢰를 받은 송홍섭은 박청귀(기타), 이병우(기타), 배수연(드럼), 김희현(드럼), 김효국(해먼드 오르간), 황수권(키보드)으로 세션 팀을 짰다. 녹음은 서울스튜디오에서 진행했으며 엔지니어링은 최병철이 맡았다. 녹음은 장시간에 걸쳐 마무리했다.
이 앨범의 최고 매력은 김현식의 최전성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3집까지 김현식의 목소리가 날것의 에너지로 충만했다면, 4집부터는 곡에 맞게 감정을 조절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성숙한 면모가 보인다.
4집 녹음 당시의 김현식에 대해 송홍섭은 “밴드를 할 당시의 거친 이미지를 벗고 성숙한 프로페셔널 가수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각기 다른 스타일을 지닌 작곡가들의 곡들이 한 앨범으로 수렴될 수 있었던 건 김현식이 가진 천부적인 성정과 독보적인 표현력 덕이었다.
4집 앨범은 김현식의 건강이 악화되기 전, 음악적 감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온 앨범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때도 술을 가까이했지만 건강 상태는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선 1~3집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거친 김현식의 음악이 만개한 앨범으로도 평가받는다.
1989년에 첫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으며 1989년 3월 1일 발매된 신촌블루스 2집에서 '바람인가/빗속에서', '골목길', '환상'을 부르며 참여했다.
1989년 9월 28일 발매된 영화 <비오는 날 수채화> OST에 참여해 동명의 곡을 권인하, 강인원과 같이 부른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강인원이 공동 작업을 제안하자 재미있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원래는 권인하와의 듀엣곡으로 예정되었으나 김현식의 저음 부분이 곡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원작자인 강인원이 다시 녹음해 트리오곡이 됐다고 한다.
강인원은 다른 이유도 설명하는데, 이미 이즈음에 목이 많이 상한 김현식이 4소절을 부르고는 더 부르지 못했었다고 한다. 당시 강인원은 김현식과 권인하의 듀엣곡을 계획했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듀엣곡으로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들어가 트리오로 만들었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곡의 분위기적 문제와 김현식의 건강 문제가 섞여서 트리오곡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지명도와는 달리 김현식의 솔로 가창 분량이 권인하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김현식은 예상 외의 인기몰이를 하던 곡 홍보를 위해 사망 몇 달 전까지도 전국을 누비며 여러 차례 방송에 출연해 라이브 공연을 펼친다. 나빠지는 몸상태 때문에 적은 솔로 분량마저 강인원과 같이 불러야 했지만 곳곳에서 터지는 김현식만의 애드립은 라이브 영상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이 곡의 묘미다. 강인원에 따르면 아픈 김현식을 부려먹는 것 같아 홍보를 조기에 마쳤다고 한다. '그 거리 그 벤취'라는 솔로곡도 불렀다.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이 많고,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한다. 대마초 문제도 그 때엔 역시 가수를 넘어 많은 연예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던 분위기였다. 여하튼 혹자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라 얘기하기도 하지만, 요절한 존재에 대한 주변인들의 회고가 전반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를 따르는 음악인들이 많았기에 사람 자체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친한 후배인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도 대성통곡하면서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 슬퍼했다고한다. 술이 너무 과한탓에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나 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니,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어?"라고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골초였던 것도 수명 단축에 한몫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198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OST 앨범을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병원에 몇 차례 치료차 입원했지만, 그는 음반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하여 녹음과 공연을 이어가는 강행군을 지속했으며 통증이 심해질 땐 독한 술을 마시면서 버텼다.
1990년 3월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한 김현식의 5집<5>는 실질적으로 완결성 있게 발매된 김현식의 마지막 앨범이다. 고통스러운 내면이 담긴 ‘어두운’ 곡들로 점철된 이 앨범은 그의 음악 여정에서 완성작으로 평가받는다.
1981년 1집부터 4집까지 김현식은 각 음반마다 늘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다. 1집에서는 훵키한 '봄여름가을겨울'과 포크적인 '당신의 모습', 2집에서는 일렉트릭 블루스 록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와 슬로우 록 '어둠 그 별빛'을 선보였다.
3집은 퓨전재즈 성향의 '쓸쓸한 오후'와 봄여름가을겨울 세션의 진수가 담긴 '비오는 어느 저녁', 4집에서 들려준 애상적인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기다리겠소'는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그의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 앨범은 김현식의 음악 여정에서 완성작이라고 할만하다. '향기 없는 꽃', '넋두리' 두 곡만 들어도 당시의 김현식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여겨지고, 이는 단지 노래를 꾸미기 위해 만든 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그 거리 그 벤치', '거울이 되어' 등 최상의 트랙들이 실려 있다. 세션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박청귀의 경우도 그의 세션 작들 중에서도 1988년 한영애의 '바라본다'와 함께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앨범 녹음과 공연활동을 하면서 밤샘 녹음, 폭음, 줄담배 등은 그에게 치명적인 건강 악화를 불러왔다. 그 와중에도 김현식은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등과 함께 그의 유작 앨범인 6집 녹음에 들어갔으며, 신촌블루스와 함께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한 서울스튜디오 근처 동부이촌동 금강아산병원에서도 자주 탈출을 하여 지방까지도 공연을 다녔고 술을 마시고 앨범 녹음을 했다. 녹음할 때 "형, 술을 그만 좀 마셔요"라는 후배에게 술을 안 마시면 아파서 소리가 안 나와서 마셔야 한다고 얘기했을 만큼 고통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생명을 소진하며 노래하였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기타가 들려 있었고 병실에서도 항상 노랫소리가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6집 작업을 마무리 중이었던 1990년 11월 1일 그는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 아파트에서 간경화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인 김혜령이 임종을 지켰고, 김영 동아기획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한다.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라고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어제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나한테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김혜령은 선배였던 한영애를 찾아가 "언니... 현식이 갔어요."라고 말한 얘기에 한영애는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갔다구요, 저 하늘로..."라고 다시 얘기했는데, 이때 한영애는 온몸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아 쓰러졌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화장터 10번 화장로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야탑동에 위치한 남서울공원묘지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이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사망 후 1991년에 발표된 6집 앨범은 타이틀곡 '내 사랑 내 곁에'의 히트로 200만장이 팔려나가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그해 제6회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1991년 2월 9일 63빌딩에서 김동준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한 추모콘서트가 열렸다.
김현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 앨범이자 6집인 <KIM HYUN SIK VOL.6>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91년 1월 발매했다. 건강 악화로 그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찢어지고 갈라지지만, 병마와 싸우며 혼신의 힘을 다한 '내사랑 내곁에'는 마지막 선물처럼 우리 곁에 남았다.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앨범에는 총 10곡을 수록했다. '내사랑 내곁에'의 연주 버전을 포함해 3곡은 연주곡이다. 특히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과 '우리 이제'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사실 이 2곡은 본작에서 처음 발표된 곡은 아니었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송홍섭, 최이철, 김종진이 어레인지했으며, 배수연 등 연주자들이 참여해 완성했다. 김현식의 유작이자 대표곡으로 평가받는 '내사랑 내곁에'는 오태호 작사 작곡의 노래다. 오태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를 치던 시절 연습실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김현식이 우연히 듣고 마음에 들어 해서 준 곡이 바로 '내사랑 내곁에'였다. 그 이후 까맣게 잊고 지냈던 오태호는 이 앨범이 나오고서야 노래가 녹음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녹음 당시 김현식은 병이 깊어져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노래도 여러 차례 불렀지만 처음 가녹음한 것 이상이 나오지 않자 첫 녹음을 음반에 실었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버전 곳곳에 당시 김현식의 힘겨웠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어 더욱 절절하고 가슴 시린 노래로 대중에게 남았다.
'우리 이제'는 1986년 발표한 3집에 이미 가창과 연주 버전으로 실었고, '한국사람'도 1988년의 4집에 먼저 실었던 곡이다. '사랑했어요'는 원래 1984년 2집 수록곡이고, '이별의 종착역'은 1988년 신촌블루스 3집에서 그가 불렀던 곡이다.
또 '겨울바다'는 1988년 사랑과평화 3집에 수록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 앨범의 신곡은 '내사랑 내곁에', '나의 하루는', '추억 만들기', '사랑 사랑 사랑'의 4곡 뿐이다. 이처럼 리메이크곡과 연주곡의 비중이 높은 것은 김현식이 앨범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요절한 고인에 대한 추모 분위기도 이 앨범의 히트에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1990년 가을, 김현식은 절친했던 사진가 김중만을 찾아가 차기 앨범의 화보 촬영을 부탁했다. 그렇게 김중만이 어느 바닷가에서 빛바랜 파스텔 톤의 사진으로 담은 김현식의 모습은 6집 재킷으로 남았다. 김현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모습인 셈이다.
그의 유작이 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는 2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
세상을 떠난 김현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이듬해 1991년 실황 앨범 <김현식 In Live> 가 발매되었다. 병세가 악화된 김현식은 라이브 콘서트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상황에서 신촌블루스의 동인으로 가을 콘서트에 참여했다. 김현식이 마지막 무대에서 부른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에서 1990년 3월 발표한 자신의 정규 5집과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 OST 앨범 수록곡을 알리느라 바빴고, 신촌블루스의 동인으로 무리하게 무대에 서면서 건강이 더 악화된 탓이었다.
당시 입원 중이었던 김현식은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아무도 김현식인 줄 몰라볼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에 많은 팬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어쩌면 김현식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에 병실을 몰래 빠져나와 무대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
실황 앨범은 1991년 뉴서울레코드에서 LP, CD, 카세트테이프로 동시 발매했다. 형식은 라이브 앨범이지만 본래는 김현식의 단독 콘서트 실황이 아닌, 신촌블루스의 계몽문화센터 라이브 무대였다. 사후에 그가 노래한 부분을 편집해서 만든 음반인 셈이다.
신촌블루스 공연에서 김현식은 자신의 히트곡이 아니라, 신촌블루스 정규 앨범에 수록한 '골목길', '이별의 종착역' 등을 불렀다. 특히 1989년 신촌블루스 2집에 수록한 손시향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이별의 종착역'은 김현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른 라이브 버전이다. 이전에 신촌블루스와 함께한 대구 공연에서는 '사랑했어요' 등을 불렀지만 본작에는 경음악으로만 수록했다. 도시아이들의 '그대 외로워지면'은 1991년 6월 발매한 김현식 추모 앨범 <하나로>에 수록하기 위해 녹음했지만 누락됐던 곡이다.
1992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이 개봉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안 좋았다. 김형철이 김현식을 맡았지만 이젠 잊힌 영화가 되어버렸다.
작곡가 이영훈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김현식이 마지막 앨범 작업을 할 때 이영훈이 소식을 듣고 김현식에게 줄 노래 10곡 정도를 만들어놨었는데 아쉽게도 녹음 작업에 들어가기 전 김현식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만약 김현식이 조금 더 오래 살아있었다면 정규 7집 앨범은 이영훈이 프로듀싱을 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영훈 본인도 2006년 <옛사랑> 발매 기념 인터뷰 때 김현식과의 작업을 끝내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1996년 발매된 김현식 7집이자 두 번째 사후 앨범 <Self Portrait> 는 김현식이 병상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며 즉흥 녹음한 곡들을 카세트 테이프에 수록했는데, 이를 후배가 보관하고 있다가 1995년에 김현식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었고, 다시 어머니가 동아기획에 테이프를 전달함으로서 제작될 수가 있었다.
'다시 처음이라오'부터 'Rain'까지는 후배 가수들이 이어불렀거나 통기타를 연주하며 녹음한 음성에 반주를 넣는 등 수정이 된 음원들이고, 반복되는 '다시 처음이라오'부터 마지막 곡까지는 윗 트랙과 노래는 같으나 반주를 넣지 않은 원음 그대로 수록되었다.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머나먼 나라> 초반부에서 김현식이 자주 언급되었다. 드라마 오프닝 자체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리메이크 버전이고, 훗날 김민종도 따로 리메이크 버전을 불렀다.
김장훈과도 인연이 깊은데 김현식의 어머니와 김장훈의 어머니 두 분이 친자매처럼 친했고 이로 인해 김장훈과도 친했었다. 오죽하면 성이 같고 둘 다 불같은 성격이라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였었다. 이 덕분에 김장훈은 음악적인 부분에서 김현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일명 '밥퍼목사'로 유명한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와는 10대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최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에서도 그의 친구이자 사랑의 메신저로 김현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망 10주기를 맞은 2000년에도 조성모, 신승훈, 이승환, 김종서, 임재범, 윤종신 등 후배 가수들이 참여한 헌정 앨범 <Tribute To Kim Hyun Sik>이 발매되었다.
2002년에는 <The sickbed live (병상에서)>라는 음반이 나왔는데 병상에서 녹음한 21곡의 미발표 곡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앨범이 제작된 사연이 있다. 1990년 여름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한 김현식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역시 장기 입원 중인 한 여성과 면식이 생겼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아끼는 기타와 녹음기를 찾은 뒤 다른 환자와 간호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생애 최후의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21곡을 부르고 이걸 녹음했던 테이프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몇달 뒤 김현식은 사망했고 여성은 무사히 퇴원하였지만 들을 때마다 계속 가슴아파하다 이민을 가면서 소중히 간직해 온 테이프를 김현식을 무지 좋아하던 후배에게 양도하였다. 10여년 동안 아끼며 듣던 후배는 TV에서 김현식 추모 방송을 보고 이걸 알리기로 결심해 세상에 나왔다. 김현식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여 살려낸 17곡을 앨범으로 낼 수 있게 됐다.
2013년 10월 발매된 김현식 8집이자 세 번째 사후 앨범은 사실상 마지막 정규앨범으로 7집에 담지 못한 김현식의 미공개 노래 7곡을 포함한 21곡을 수록했다. 죽기 직전 피를 토해내는 듯한 김현식의 노래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으로 잡음을 최대한 제거를 했어도 음질이 깔끔하지는 않지만 그걸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김현식의 보컬이 모든 걸 압도해 버린다. 김영 전 동아기획 대표는 이 앨범을 발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내적 갈등을 오래 겪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 김현식이 나타나 '대장 앨범 왜 안 내?'라고 하자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수록곡중 '그대 빈들에'는 사망 이틀 전인 1990년 10월 30일에 작곡된 진정한 유작이다.
2019년 9월 그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편곡하여 <사랑했어요>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개봉하였다.
데뷔 때부터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보였다. '봄여름가을겨울', '사랑 사랑 사랑', '사랑했어요', '추억만들기' 등의 노래가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다. 라이브나 녹음에서 노래 하다가 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악에 관한 이해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현식의 목소리는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 특히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

김현식은 후배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따뜻했으나 갑질하거나 무례한 방송국 PD들에게는 더 무섭게 굴었다고 한다. 화가 나면 쌍욕은 기본에 커피잔이나 마이크도 집어 던졌다고 한다. 후배들은 그런 김현식의 모습을 보며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을 키우거나 최소한 대리만족이라도 했을 것이다. '마왕' 신해철은 김현식의 그런 모습을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 시대 PD들의 갑질이나 아티스트들에 대한 무례한 태도들을 생각하면 김현식의 당당한 모습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김현식이 강약약강의 전형적인 똥군기와도 궤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방송이나 공연 펑크를 자주 내 매니저나 공연 관계자들이 자주 골치아파했었다고 한다. 김종진이 라디오 스타에서 말하길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냥 없어지는 사람이라고. 위에서 언급한 토토즐 특집 뿐 아니라 다른 공연에서도 컨디션이 나쁘거나 무대 세팅이 제대로 안 되어있으면 통보 없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이 때 김현식의 대타로 자주 올라갔던 사람이 이승철인데, 이승철의 현 부인이 김현식이 펑크 낸 공연에서 이승철이 대타로 올라왔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고 전해진다.
사실 그는 후배들에게는 무척 상대하기 힘든 괴팍한 선배였지만 많은 선후배가수들은 그의 음악을 기리는 추모콘서트와 앨범을 발표했다. 김현식은 사랑을 노래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떠난 사랑의 가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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