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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대중가요의 역사 11부

 

 

1980년대 vol.3

 

포크는 1980년대 전반까지 송창식, 양희은, 임지훈, 남궁옥분, 해바라기, 신형원 등이 간간이 대중적 히트곡을 내었지만, 상당수는 언더그라운드로 새로운 모색을 하였다.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등의 조동진, '북한강에서'의 정태춘이 포크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을 이끌고 '사랑일기'의 시인과촌장에 이르기까지 사색과 관조의 태도를 주조해나갔다. 그러나 포크로 출발한 사람 중 몇몇은 블루스, 록 등으로 작품세계를 이동시켰다.   

 

 

시인과 촌장 - 가시나무

 

 

시인과촌장은  1981년 하덕규와 오종수가 듀오를 결성한 후, 서영은의 소설인 <시인과 촌장>'을 따와서 팀명을 짓고 1집 <시인과 촌장>을 발표한다. 오종수는 팀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 1985년 하덕규는 기타리스트 함춘호를 만나 시인과 촌장 2기를 결성하게 되고 1986년 2집 <푸른 돛>을 발표하였는데 전곡의 작사 작곡은 하덕규가 했으며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4위에 오른다. 동화적이면서 때론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으로 우리나라 포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함춘호없이 1988년에 조동익, 이병우(어떤날) 등의 도움을 받아 3집 <숲>을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이들의 대표곡이라 할수 있는 '가시나무'가 수록되었다. 하덕규는 다시 함춘호와 함께 2000년 4집 <The Bridge> 를 발표했다.  

 

 

 

신형원 - 개똥벌레

 

 

신형원은 1982년 발매된 옴니버스음반에 수록된 ‘불씨’와 ‘유리벽’으로 데뷔했으며, 1987년 2집 ‘개똥벌레’로 MBC 아름다운 노래 대상 금상을 수상했다.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따뜻한 인간애에 담아 노래하는 가요계에 독보적인 가수이다. 맑고 청아한 꾸밈없는 목소리와 창법이 특징이다. 

 

 

해바라기 -행복을 주는 사람

 

 

해바라기는 이주호가 1982년 유익종과 함께 2인조 체제로 새롭게 결성했고, 1983년 정규 1집을 냈다. 이주호가 이끄는 듀오 '해바라기'와 이정선, 한영애가 주축이 된 4인조 '해바라기'와는 다르다고 보면된다. 물론 이주호가 1973년 4인조 해바라기로 데뷔할때 멤버이긴 하지만 자연을 노래한 기존 팀과는 약간 방향이 다르다고 볼수 있다  
이주호, 유익종 2인의 원년 듀오 멤버로 1980년대 해바라기의 대표곡인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어서 말을 해', '내 마음의 보석상자', '너' 등을 발매하였다. 이들의 최대 히트곡이자 대표곡인 '사랑으로'는 1989년 6집 수록곡으로 유익종이 팀을 나와 솔로로 전향한 뒤 이주호와 이광준이 함께 활동할 때 발매된 것이다. 

 

 

 

 

임지훈은 1985년 '김창완과 꾸러기' 멤버로 활동을 시작해 6개월 동안 앨범 3장을 냈다. 1987년 1집 수록곡 '사랑의 썰물'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가장크게 히트해 그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이 곡 외에도 산울림의 곡으로도 유명한 '회상', '내 그리운 나라' 등의 곡이 유명하다. 서정성 충만한 특유의 허스키 보컬로 사랑받은 가수이다. 아이돌 그룹 비투비 멤버인 현식의 아버지기도하다.

 

https://youtu.be/_VQ7fg2OuW0?list=RD_VQ7fg2OuW0

남궁옥분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남궁옥분은 대학 재학 시절 '쉘부르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이종환 사단에 들어가 1979년 첫 앨범 <보고픈 내 친구>를 발표했다. 1981년 발표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가 KBS 가요톱10에 4주간 1위에 오르는 등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1981년 KBS 방송음악대상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꿈을 먹는 젊은이',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등을 발표하면서 1982년과 1983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로 선정되었고,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또, 1982년 실시된 TV 탤런트 및 가수 인기조사에서 여자가수 1위를 차지했다. 이후 슬럼프에 빠져 무대를 기피하기도 했지만 1985년 11월 하덕규가 작사, 작곡한 '재회'를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신촌블루스 - 그대 없는 거리

 

한편 포크에서 시작한 이정선이 엄인호와 손잡고 만든 신촌블루스는 가요와 블루스, 록 음악을 접목 시킨 음악을 지향했으며, 1986년, 신촌의 라이브 클럽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 이정선(기타), 김현식, 한영애, 정서용(보컬)이 모여서 결성되었다. 
보컬은 원년 멤버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김동환, 김형철, 박인수, 정경화, 이은미, 강허달림, 강성희 등 여러 수많은 객원 보컬들을 기용하여 다양한 음악적인 색채를 표현해 내었다. 사실 그냥 밴드 그룹보다는 페어포트 컨벤션처럼 느슨한 공동체 느낌의 그룹이었다고 보면 된다. 참여했던 멤버들은 '누구 없소'의 한영애에서 보이듯 각자 솔로로서 입지를 다졌다.  

 

 

신촌블루스 - 골목길

 

1988년 첫 앨범 <신촌 Blues>는 뛰어난 완성도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특히 외국 음악에 뒤지지 않는 블루지 한 느낌과 가요의 정겨운 느낌이 절묘하게 조합된 명반이라는 평을 받았다. 첫 번째 곡인 '그대 없는 거리'와 마지막 곡인 '바람인가'에서 들려주는 한영애의 소울풀 한 카리스마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1989년 발표한 2집 <신촌 Blues II>에서는 김현식 특유의 소울풀 한 창법이 발휘된 명반으로, 그가 부른 '골목길'은 신촌블루스와 김현식의 대표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이후 2집까지 같이 활동한 이정선이 떠나고 난 뒤, 엄인호를 중심으로 제작된 3집 <이별의 종착역>은 정통 블루스를 추구했던 이정선과는 다르게 '한국의 블루스'를 추구했던 엄인호의 취향이 반영된 작품으로 가요적인 접근이나 블루스의 무게감을 잃지 않은 수작이다. 

 

김현식 - 비처럼 음악처럼

 

 

김현식은 1970년대 말부터 록으로 시작하여 1984년 '사랑했어요', 1986년 '비처럼 음악처럼' 등의 히트곡을 낸 김현식이 록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그는 신촌블루 객원멤버로 참여하여 '골목길'을 부르기도했으며 1989년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OST에서 강인원, 권인하와  같이 부른 음반의 수록곡인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발표하여 크게 히트하기도하였다.

 

 

한영애 - 누구 없소

 

 

한영애는 1986년 1집 <여울목>을 발표하였으며 타이틀곡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동시에 1986년부터 신촌블루스 활동을 하는데 신촌블루스 1집 <신촌Blues>에서 소울풀한 창법으로 큰 반향을 얻었다. 이어서 1988년 자신의 2집 앨범인 <바라본다> 를 발매하였는데 그녀의 대표곡이라고 할수 있는 '누구 없소', '루씰', '코뿔소', '바라본다'등이 수록된 이 음반은 한영애의 대표곡들이 있는 히트앨범이 되었다. 
1992년 3집 <한영애 1992>에는 한영애의 또 다른 명곡인 '조율'이 수록되어있으며 모던 포크와 락을 시도한 앨범이다. 이듬해인 1993년 63빌딩에서 <아.우.성> 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고 이 콘서트 실황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들국화 - 행진

 

 

 1985년 포크로 활동을 시작한 전인권과 최성원이 주도하는 록그룹 들국화의 첫 음반이 텔레비전의 도움 없이도 30만장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와 록의 시대의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무엇보다도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등 들국화의 노래들은 신중현에서 송골매에 이르기까지 텔레비전을 향해 달려온 록이 보여주지 못한, 록적인 세계인식과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들국화는 1983년 보컬 전인권, 키보드 허성욱 듀오에 베이스 최성원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대한민국 락그룹의 원형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멤버들은 원래 락커라기보다는 포크송 가수에 가까웠다. 밴드내 역할분담 역시 4명의 파트가 확실한 게 아니라 보컬과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밴드보다는 크루에 좀 더 가까웠다. 이것은 포크 음악가들 문화의 영향이기도 했다.

 

 

들국화 - 그것만이 내 세상

 

1985년 1집 <들국화>를 발표하면서 엄청난 인기와 함께 대한민국 록의 전설이 되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외국의 록 형식에 잘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등이 수록된 이음반의 인기로 시작된 전국 순회 콘서트는 말 그대로 인기 폭발하였다. 1986년에 발매한 2집은 6인조라는 최강의 멤버구성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전인권과 최성원의 음악적, 음악 외적 견해차이가 불거지면서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매일 그대와' 같은 어쿠스틱한 넘버들도 무시할수 없지만, 들국화의 진면목은 역시  '행진'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에 있었다. 하지만 2집은 이런 기대와 달리 포크락그룹을 연상시키던 1집보다도 훨씬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결국 들국화는 1987년 해산을 선언하고 전국 순회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1987년 6월시민항쟁을 계기로, 대중가요계의 바깥에서 구전과 운동조직에 의존해 존재했던 민중가요가, 대중가요 시장 안으로 진입한 것도 한국대중가요사 전체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노래를찾는사람들, 노래마을 등은 민주화 열기와 함께 인기를 누리며 민중가요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 '그날이 오면', '백두산' 등을 일반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노래로 만들었다. 이들의 존재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김민기, ᄒᆞᆫ돌 등 사회비판적 포크 자작곡가수의 존재를 한 진영으로 묶어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정태춘, 김광석, 안치환 등 대중가요권 안의 민중가요의 흐름을 만들어나갔다. 이들의 활동은 방송매체에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음반과 공연에서 바람몰이를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1990년대 이후 대중가요의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급기야 음반 검열 철폐로까지 나아가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다. 

 

 

 


노래를찾는사람들은 1980년대에 군부독재로 인해 민주화 투쟁이 많이 벌어지던 와중에 1983년 가을에 서울 시내 여러 대학의 노래패들이 자연스레 모인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멤버는 무려 23명이였다.  1984년 김민기가 프로젝트 음반을 기획, 제작했으나 정권의 탄압으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1집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은 공윤의 사전심의를 뚫고 정식발매를 목표로 하면서 여러 가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애초에 기획자 김민기와 노찾사 멤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음반이 되어버린 채 1987년 발매하였다.  
그러다가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도래하면서 노찾사는 자신들의 음악을 온전하게 발표할 수 있게 된다. 이미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찾사는 수많은 집회, 시위 현장과 대학내에서 수많은 현장공연을 하면서 자신들의 자작곡과 당대의 인기 민중가요들을 부르고 있었다. 1989년 2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 2>가 발매되면서, 엄청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노찾사 2집은 발매 1년 만에 최소한 8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노래가 대중적으로 히트했다. 심지어 '사계'는 TV와 라디오를 막론하고 단 한번의 방송출연도 없이 KBS 가요톱텐 3위까지 올랐다. 
그 뒤에도 1990년대 내내 앨범 발매와 함께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꾸준히 활동했지만, 사회운동의 퇴조와 함께 노찾사의 대중적인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등이 노찾사 출신으로 솔로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안치환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찾사외에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잘알려진 안치환, '홀로아리랑'을 부른 한돌, 노래동아리 노래마을 등이 민중가요 가수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도 대중가요의 매체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자리 잡은 카세트테이프는 엘피(LP)에 비해 복제와 휴대가 편한 음반으로 각광받고 있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워크맨이라 불린 소형 카세트플레이어가 급격히 보급되었다. 워크맨 같은 1인 기기로 노래를 혼자 듣는 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1980년대 후반 언더그라운드는 이 토대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품성을 중시하는 언더그라운드의 수용자들은 1980년대 말 시작된 고음질의 컴팩트디스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수용자로 부상했다.  
반면 텔레비전은 본격적인 컬러텔레비전 시대에 돌입하여 대중가요의 시각성은 점점 중요해졌고, 1980년대 중반부터의 댄스뮤직 바람은 이러한 매체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외 직배 음반사의 국내 상륙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 한국 음반 시장에 또 다른 지각 변동이 생겼다. 1988년 EMI가 계몽사와 합작으로 첫진출한후 Polygram도 성음레코드와 합자회사로 진출했으며, Sony, WEA, BMG는 직접 배급 형태로 시장 진입을 하였으나 국내음악보다는 해외음악 배급을 우선하였다. 추후 시장이 변화하면서 해외 메이저음반사들조차 서로 합병하고 다른 회사로 팔리는등 많은 부침이 있었다. 현재 남은 해외 직배사는 소니뮤직, 워너뮤직, 유니버설뮤직 3군데만 남아있다. 5대 메이저중 EMI와 BMG는 각각 다른 메이저사들에 나눠 흡수 되었다. 가요 시장은 한국 가요의 눈부신 발전으로 그 우려를 잠재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12부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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