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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대중가요의 역사 12부

서태지

 

 

1990년대  vol.1

 

1990년대는 80년대까지의 록음악과 포크, 그리고 트로트의 열풍이 끝났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초로 한 댄스 음악의 부흥이 일어난 시기이자 전성기로 평가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 R.ef, 터보등 댄스 그룹들의 등장 이후 댄스 음악이 주류로 떠올랐고, 1990년대 후반 데뷔한 H.O.T., 젝스키스, 신화, god 등 1세대 아이돌들이 그 인기를 이어갔다. 또한 1997년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의 데뷔로 여성 댄스 그룹의 등장도 이어졌다.

이러한 댄스그룹들의 인기와 함께 김건모, 신승훈, 조성모, 임창정, 유승준, 이정현, 김현정, 엄정화 등 솔로 가수들과 쿨, 룰라, 자자, 투투 등 혼성 그룹들의 인기도 굉장했다. 이 시기부터 2000년대까지는 댄스 음악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가수들과 솔로 가수들, 혼성 그룹 등 여러 가수들이 가요계를 양분했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 남알아요

 

특히 1992년 댄스곡 '난 알아요'로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댄스음악과 힙합의 선구자로서 문화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으며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했다.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뒤 한국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한국 대중들에게 팝적인 요소가 가득한 댄스음악, 랩, 힙합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각인시켜 주류의 문화장르로 올라서게 했다.   
​이는 X세대를 통해 신세대문화의 바람이 불기시작 했었고, 장편의 ‘웰메이드 드라마’가 제작되면서 TV드라마의 황금기도 찾아오는등 대중예술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또한 이는 군출신 대통령과 민주화운동 시대, 그리고 냉전시대와 이념대립의 시대가 종말을 맞은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 와 괴리가 있었다. 민주화된 1990년대에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어 하고 구매력까지 갖춘 10~20대들은 있는데, 이들을 만족시킬 만한 콘텐츠가 한국에는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 환상속의 그대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 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21]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대세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 이 밤이 깊어가지만


서태지는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입대로 별 활약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시나위 4집에서 베이시스트로 참여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했으며 시나위를 탈퇴한 후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랩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고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뒤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92년도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큰 폭풍이 시작되어 한국의 대중문화계에 모든 것이 격변하기 시작하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1992년 4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였으며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 하여가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첫 활동 곡으로'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가요 프로그램 1위를 모두 휩쓸었다. 1994년 8월에 3집을 발표하였다.  
3집부터는 단순한 음악적인 시도를 뛰어넘어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된 곡을 써내려가며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쳐 문화대통령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가수가 갑자기 사회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에 파장이 컸다. 통일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까지는 다들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지만,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노래인 '교실 이데아' 활동이 시작되자 매스컴과 기성세대들은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3집의 이러한 시도는 대중성을 많이 포기한 대신, 충성스러운 매니아 팬들을 결집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 - 교실 이데아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 - 컴백홈

 

또한, 1992년 ~ 1995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1995년 12월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1996년 1월 19일에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다. 1996년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 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잠정 은퇴를 발표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그리고 잠정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3명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곧바로 'Goodbye'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이동하였고, 촬영을 끝낸 뒤에는 헬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괌으로 출국하였으며 그 곳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 1996년 2월에는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를, 1996년 6월에는 싱글 '시대유감'을 발표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 필승

 


이들은 상표를 떼지 않고 입거나, 스쿨 룩 패션(1집), 레게머리 및 힙합 패션(2집), 치마 패션(3집), 염색 및 스노우보드 패션(4집) 등 매 앨범마다 음악에 따라 다른 컨셉을 시도했고, 또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된 전속 코디네이터를 도입했으며, 많은 자본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의 질을 향상하는등 1990년대 이후의 가요계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서태지는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1998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펑크,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90년대 초반에는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이승환의'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이소라의 '난 행복해' 등 이들이 이끄는 발라드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김현식의 유작 앨범 '내사랑 내곁에'를 비롯해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를 시작으로 변진섭의 뒤를 이은 불세출의 발라드 가수 신승훈, 박정운, 이승철 등이 가세하면서 우리 가요계는 발라드 호황 시대를 이어 가게 되었다. 절묘한 화음으로 R&B의 진수를 보이며 솔리드는 '이 밤의 끝을 잡고'를 발표하였고 이소라, 이선희, 이상우, 양파, 신효범,박정현 등 가창력을 앞세운 가수들의 활동도 돋보였다. 

 

 

신승훈 - 보이지 않는 사랑

 

신승훈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발라드 가수로 섬세하며 감미로운 미성의 소유자로 음악방송 14주 연속 1위라는 한국 기네스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정규앨범 7연속 밀리언셀러(1집부터 7집 모두 100만 장 이상 판매) 기록과 함께 1집부터 10집까지 골든디스크 10회 연속 수상한 유일한 가수이다. 게다가, 한국 가요음반 역사상 두 번째 기록인 총 누적판매량 1700만 장 이상기록과 아시아 최단기간 음반판매량 1000만 장 돌파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0년 11월 1일 발매한 데뷔앨범의 타이틀곡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가요프로그램마다 1위를 차지면서 데뷔 음반부터 밀리언셀러(million seller)를 달성했다. 골든디스크상도 신인상이 아닌 본상을 바로 수상했으며, 이는 향후 발라드의 황제로서, 국민가수로서 발돋움하게 된 시작이었다. 1991년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발표한후 이 노래는 1990년대 최고의 메가히트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 되었으며, 당시 16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SBS 인기가요에서 14주 연속 1위를 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그해 최다 1위를 차지한 노래가 됐다. 이 해 골든디스크 대상과 KBS 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2집의 후속곡인 '우연히'를 통해 처음 댄스를 선보이면서 꾸준히 인기를 이어갔다. 1993년 '널 사랑하니까'를 타이틀로 한 3집이 17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발라드 황제의 건재함을 보여주며 2년 연속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타이틀곡 외에도 빠른 비트의 '처음 그 느낌처럼'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후속곡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신승훈 - 그 후로 오랫동안

 

1994년 4집 타이틀 '그 후로 오랫동안'이 KBS 가요 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수상하고, '오랜 이별 뒤에'도 1위에 올라 인기를 얻었다. 4집 앨범 역시 16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6년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을 타이틀로 한 5집을 발표했다. 5집의 수록곡 '내 방식대로의 사랑', '운명'이 차례로 인기를 얻은 덕분에, 역대 2위에 해당하는 247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며 굳건한 인기를 증명했다.  1998년 6집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발표해 IMF라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13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 등으로 대표되는 댄스가수의 등장으로 발라드 가수들이 큰 타격을 입은 것에 비해, 신승훈은 6집까지의 앨범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는 등 발라드 황제의 자리를 지키며 정상권의 인기를 지켰다.  

 

 

이승환 -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이승환은 데뷔 때부터 자신의 앨범 및 본인의 소속사 뮤지션들이 발표한 모든 음반을 직접 제작한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전세계 대중음악 사상 최장 공연시간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 라이브의 황제이자 공연의 신으로 불린다. 가요계의 황금기인 199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연예계 최고의 동안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어린 왕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1989년 발매된 1집 수록곡인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의 히트를 시작으로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너를 향한 마음'  1992년 이오공감 (25共感)으로 발표하 '한사람을 위한 마음', '프란다스의 개'  그리고 1993년 발표된 '덩크 슛' 과  1995년 발표한 '천일동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다. 

 

 

솔리드 - 이 밤의 끝을 잡고

 

솔리드는 한국계 미국인 3인조 알앤비•힙합 그룹으로 김조한의 화려한 R&B 창법과 이준의 중저음 베이스와 화려한 랩, 정재윤의 세련된 작곡 실력 등 멤버 개개인의 강점이 잘 어우러진 그룹이었다. 한국계 미국인들이기 때문에 당시 미국 서부에서 유행하던 웨스트코스트 스타일의 뉴 잭 스윙, 훵크를 그대로 한국으로 들여온 장본인들이다. 
1993년 발매한 1집은 015B 장호일이 프로듀서로 나섰으며 타이틀곡은 힙합 스타일의 댄스곡 '이젠 나를'이다. 1집은 아직 대중들에게 낯선 스타일의 음악이기도 했고 홍보 부족으로 금방 활동을 접었다. 
1995년 발매한 2집의 타이틀 곡인 '이 밤의 끝을 잡고'가 댄스음악이 대세인 한여름에 발라드 음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위를 차지했고 음반 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했다. 리듬 앤 블루스 열풍을 몰고 오면서 1집까지 재발매되었으며 '이 밤의 끝을 잡고'뿐만 아니라, 후속곡이었던 '나만의 친구'도 10위 권까지 올라갔다. 
1996년 발매된 3집에선 락발라드인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로 돌아왔다. 거물급 가수들이 컴백했던 1996년 가요계였음에도 불구하고 3집 역시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타이틀곡은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 후속곡 예정에 없었던 '천생연분'은 역주행을 해서 타이틀곡보다도 더 떴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 송이 되었다. 2005년에는 아이돌 그룹 신화가 리메이크했다. 또다른 활동곡인 '이제 그만 화 풀어요'와 '해피엔딩'도 준수한 인기를 얻었다.  1997년 발매된 4집에선 리듬 앤 블루스가 아닌 마이애미 힙합 댄스곡으로 장르 변화를 시도한 '끼리끼리'를 타이틀곡으로 발표했으나 대중에겐 너무 낯설었고, 발라드 후속곡 '끝이 아니기를'이 준수한 인기를 얻었으나 전작들의 히트에 비하면 아쉬운 수준이었다. 결정적으로 음악방송 활동 자체가 전보다 미미한 데다가 1세대 아이돌들에 의해 주목도가 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 후 기획사의 멤버들 혹사 문제, 병역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은 뒤 갑작스러운 해체를 발표했다. 

 

이소라 - 난 행복해

 

이소라는 대표곡으로는 '난 행복해', '처음 느낌 그대로', '제발', '바람이 분다', '청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너무 다른 널 보면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원곡 빛과 소금) 등이 있다. 인천대학교 재학 중 아카펠라 재즈 그룹 '낯선 사람들'의 멤버로 데뷔, 특유의 음색 때문에 일부에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다 김현철과 듀엣으로 부른 노래인 그대 안의 블루가 대인기를 끌면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다. 
1995년 1집, <Vol. 1>에서 '난 행복해'를 타이틀곡으로 데뷔했는 이곡의 엄청난 히트로 93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여자 솔로 가수 단일 음반 판매량 1위 기록을 세웠다. 후속곡 ‘처음 느낌 그대로’도 크게 히트를 쳤다.  1996년 이소라 2집, '기억해 줘'를 타이틀곡으로 한 <영화에서처럼>이 '청혼'의 동반 히트에 힘입어, 이소라는 최고 수준의 여성 가수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1998년 이소라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메탈 사운드를 선보인 '피해의식' 등과 '믿음',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가 히트를 쳤다. 
낯선 사람들 활동 시절 때부터 본인이 가사를 직접 써왔으며 2집인 영화에서처럼부터 자신의 음반을 직접 프로듀싱한다. 대부분의 노래를 직접 작사하며 주로 이별이나 사랑의 아픔을 표현하는 노래가 많으며 특유의 허스키하고 섬세한 깊은 음색으로 감정을 잘 살려 부른다. 가사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지라 감정 이입이 잘 되고, 노래에 자연스럽게 깊은 감정이 묻어 나온다. 

 

 

양파 - 애송이의 사랑

 


양파는 1세대 아이돌 전성시대에 혜성처럼 화려하게 데뷔한 여고생 가수이며, 모범생이란 이미지 덕에 데뷔 당시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6년 12월 27일 정규 1집 'Yangpa'로 데뷔했으며  타이틀 곡인 ' 애송이의 사랑 '은 1997년 3월 8일 지상파 첫 1위를 시작으로 3-4월에 KBS 2TV <가요톱10>에서 최연소 골든컵 수상자의 영예를 안겨 주었으며, 각종 가요프로램 마다 1위를 연달아 차지하며 도합 12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이 음반은 양파의 앨범 중 가장 많은 82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 해 모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에는 R&B와 힙합 등 흑인 음악이 우리나라에 막 소개되던 시기였다. 솔리드의 김조한을 통해서 최초로 가요계에 R&B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자 가수는 아직까지 나타나질 않았었는데 대중들의 기대가 있었고, 때마침 그 틈새를 양파라는 어린 고등학생 소녀 가수가 파고든 것이다. 1998년 1월에 정규 2집 <Neverland>를 발매하고 '알고 싶어요!'라는 곡으로 활동했지만 전작보다는 방응이 떨어졌다. 
1999년 6월 말, 3집 <개구리 연못 속의.. 날다>를 발매하였으며 타이틀곡은 슬픈 발라드곡 'A`ddio'으로,  발표 후 가요 판매 집계에서 6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1위를 하는 등 최종 판매량은 68만 장 정도로 앨범 판매량과 노래 인기로는 1집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연달아 '애이불비', '그녀 안의 나', 'missing you' 등 수록곡들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인기를 회복하고 더 이상 아이돌 이미지의 학생 가수가 아닌 뮤지션으로 인정받으며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음악적 기반을 탄탄히 다졌던 시기였다. 2001년 4집 <erfume> 을 발매하며 직접 작사한 타이틀 곡 'Special Night'으로 활동을 이어나간다.  발매와 동시에 무난히 챠트 10위권에 안착했고 40만 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박정현 - 사랑보다 깊은 상처

 


박정현은 ​1998년 1집 <Piece>의 'P.S. I Love You'로 데뷔하였다. 프로듀서는 윤종신으로 박정현의 1집에 수록한 '오랜만에'라는 곡의 가사를 쓰면서 만나게 됐다. 윤종신은 박정현에게 발음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가르쳐줬고 박정현이 수없이 틀려도 인내심을 갖고 대해줬다. 주요곡으로는 '나의 하루', 'P.S I love you', 임재범과의 듀엣곡 '사랑보다 깊은 상처'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99년 발매한  2번째 정규앨범 <A Second Helping> 에서는 타이틀곡 '몽중인' 이 히트했지만 후속곡인 '편지할께요'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0년 3집 <Naturally>를 발표 했으며 타이틀곡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R&B 스타일 곡으로 특유의 고난도 바이브레이션이 돋보인다. '거짓말처럼'은 그가 작곡한 노래의 멜로디를 인터넷상에 공개하고 여기에 맞는 가사를 공모해 만든 곡으로 좋은 호응을 얻었다. 2002년 4집 < Op. 4>의 타이틀곡 '꿈에'로 음악캠프 1위를 차지하는등 인기를 굳히고, 2002년 월드컵 공식 가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4집은 박정현의 앨범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으며 명반 100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3부로 이어집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한울,2012)
『아이돌』(이동연 외,이매진,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민속원,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한길사,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김시업 외)

『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소명출판,2009)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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