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반 어디에서나 들을수 있던 이말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바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획기적인 바람을 몰고왔던 가수 김추자에 대한 유행어이다. 이런말이 대중에게 회자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던 김추자는 당대를 호령하던 여가수였다.
김추자는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적인 디바"로서 "터질 듯한 열정의 가수"로 그리고 “육감적인 섹시 디바의 원조” 로 반세기가 가까이 지나감에도 아직도 그녀의 노래는 우리에게 변함없는 울림을 주고있다.

1951년 춘천에서 태어난 김추자는 어릴때 부터 남다른 끼와 재능을 보여왔는데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그대로 따라 부를 만큼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춘천문화방송 합창단 소속이었으며 전국 무용대회에서 상을 수상했으며 춘천향토제에서 수심가로 3위에 입상을 하기도 했다.
1969년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원래 목표했던 미대에 실기까지는 붙었으나 필기에서 떨어진 그녀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대학에 입학한뒤 신입생 노래자랑에서 1위를 했던 그녀는 신중현 매니저의 추천으로 신중현을 찾아갔다. 이는 신중현의 매니저와 김추자의 형부가 친한 사이여서 형부가 연결을 해주고 김추자가 신중현의 사무실에 찾아가게 되었고, 노래를 들어본 신중현이 곡을 하나 던져주는데, 그게 바로 데뷔곡인 '늦기 전에'였다고한다. 신중현의 회고에는 당시 스타 가수였던 김상희의 녹음을 봐주느라 정신이 없는데도 며칠을 하루종일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한번 테스트나 해보자했는데 의외로 쓸만한 재목이겠다 싶어서 곡을 주었다고 한다. 신중현은 그녀에게 데뷔할수 있도록 '늦기전에' 라는 곡을 주었고 '늦기전에' ,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등이 수록된 데뷔앨범이 발매되었다.
당시 김추자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신중현 씨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사사해내었다는 신인 여가수가 등장, 가요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색적 사이키 작품 '늦기 전에'를 데뷔곡으로 김 양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외 총 6곡의 LP도 함께 발표했다. 특히 데뷔곡 '늦기 전에'에서는 프레이징의 반복이라는 사이키의 정형 외에도 우리 민요에 있어서의 창법적 바이브레이션을 도입, 현대적 가요와 고전적 융합을 꾀하고 있다. 패티김에 버금가는 안정되고 풍부한 성량과 67년도 전국 무용대회에서 고전 발레에 특선한 관록은 움직이는 가수로서의 전망을 밝게 해준다."
--'신중현 리사이틀서 선보인 신인들', '주간경향', 1969. 11. 5. 60쪽
김추자가 스타로서 발돋움하게된 곡은 1970년 ‘님은 먼 곳에’ 라는 동명의 드라마 삽입곡이었다.
TV연속극 프로그램 ‘유호극장’에서 방영한 TV연속극 ‘님은 먼 곳에’의 주제곡을 원래 패티 김이 부르기로 했으나 부르지 못하게되자 이 곡을 급히 김추자에 주었고 오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해 밤늦게서야 곡에 대한 연습과 녹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급하게 녹음된 곡인 ‘님은 먼 곳에’는 다음날 방영된 드라마에 쓰이게 되었고 드라마와 함께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김추자는 라이브에서 그녀만의 매력을 발산했는데 소울창법과 함께 시대를 뛰어넘는 앞서간 춤이 김추자만의 매력으로 대중에게 어필되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와 화려한 무대 그리고 파격적이었던 몸에 쫙 달라붙는 판탈롱(나팔바지)를 입고 공연을 하던 그녀의 모습은 많은 남성들을 매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볼수 없었던 엉덩이를 흔든다든지 다양한 손동작을 흔들면서 보여주었던 이러한 춤은 고전무용까지 섭렵했던 김추자만의 것으로 이러한 관능적인 자태로 춤을추는 모습에 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기는 간첩설까지 이어졌다. 무대하는 손짓이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소문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반공 반첩이 생활화된 국민정서상 그랬던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김추자의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을정도로 대형 스타가 되었다는 반증일거라고 볼 수 있다.
'님은 먼 곳에'라는 곡의 히트로 1970년 MBC의 10대가수상에서 신인상 수상했으며 이곡의 인기는 71년까지 넘어가 음반시장을 휩쓸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년말 TBC의 방송가요대상에서 7대 가수에 선정됐다.

1971년 7월 부산에서 김추자, 김세레나, 배호 등 여러 가수가 출연했던 공연에서 김추자는 김세레나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연 한번을 불참하였고 이러한 김추자의 행동은 업계와 선배들로부터 공격받게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는 1971년 7월 부산 공연 불참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추자에게 1971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연예활동 중지 징계를 내린다.
3개월간의 활동정지기간이 끝난뒤 12월 9일부터 12일까지 시민회관에서 대대적인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을 열기로 기획했다. MBC TV가 후원을 하기로 했던 이 리사이틀은 송창식, 이현, 은희 등 10여 팀의 가수와 14인조 신중현악단이 출연하는 초호화쇼였다.

그런데 쇼를 나흘 앞둔 12월 5일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추자의 매니저였던 소윤석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가족과 주변에서 두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한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김추자를 만나러 와서 소주병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어 수백 바늘을 꿰매게 하는 상처를 입혔다. 사건 직후 그녀는 곧바로 명동 고려병원에 긴급 후송되어 응급수술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그녀는 총 6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에도 쇼업체에서는 거액을 들여 준비한 쇼를 연기할 수도 없어서 공연은 김추자 없이 강행됐다. 쇼가 시작된 지 두 시간이 지나고 1회 공연의 피날레가 시작하기 전에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김추자가 등장했다. 이와 함께 그의 히트송 '님은 먼 곳에'가 잔잔한 백뮤직으로 흘렀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그 무대에서 했던 김추자의 멘트 내용이다.
"지난 허물은 모두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연 약속을 어긴다, 제멋대로다, 하는 것은 모두 제가 아직 어린 탓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어린 탓으로 돌리고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또 한 번 참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꼭 노래하고 싶었던 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제 건강이 회복되는 날, 다시 여러분 앞에 오겠습니다. 저는 평생 노래를 부르다 노래 속에서 죽을 결심입니다." 우렁찬 박수, 손의 상처 때문에 케이프 자락 속에 두 손이 기브스되어 있는 김추자는 손을 움직여 눈물을 훔칠 수도 없어 한쪽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퇴장하는 김추자의 뒷모습을 향해 관객들은 그가 노래할 때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노래도 얼굴도 없는 김추자', 주간여성, 1971. 12. 22., 16~17쪽>>
1년간의 재활 치료끝에 1972년 11월 MBC TV의 'MBC 그랜드쇼'에서 재기의 무대를 가졌다. 사고 이후 1년 만에 다시 TV 앞에 선 김추자의 모습은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예전 예쁘장한 미소는 사라지고 정색한 얼굴로 노래했으며 문제가 되었던 야릇한 손동작은 쓰지 않고 노브라의 차림으로 허리를 주로 쓰는 육감적인 춤동작을 선보였다.
김추자는 1년만의 재기 리사이틀을 1972년 12월 7일에 시민회관에서 열기로 계획했으나 화재로 인해 공연장이 전소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1973년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대한극장에서 열렸던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에서 3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김추자는 피습 이후 1년 4개월 만에 어렵게 재기할 수 있었다.
재기는 했으나 그녀의 위상은 예전 같지않았다. 음반시장과 방송에서는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지만 쇼무대에서는 오히려 몸값이 더욱 치솟고 있었다. 김추자는 방송도 MBC에만 출연하던 것을 바꾸어 1973년 9월에는 TBC의 '쇼쇼쇼'에도 출연했고 10월에는 KBS에도 출연했다. 이 당시 김추자는 이미 자신만의 색을 철저하게 구축하는 데 완성했고, 무대와 연출 등 다른 가수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음악방송은 가수가 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모서리에는 지휘자의 지휘 아래 방송악단이 반주를 하는 일률적인 모습이었는데, 김추자는 넓은 세트장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당시 가장 우수한 방송 인력들이 모인 TBC와 시너지를 일으켜 방송이 아닌 하나의 공연이자 연극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신중현이 1973년 7월 계약이 만료돼 다시 김추자와 같은 킹레코드사로 이적하게되면서 신중현의 곡으로 여러 장의 음반을 냈으나 히트곡이 나오지는 않았다.
" 최근 김추자 패널 쇼 비슷한 TV 쇼를 하는 여가수들이 부쩍 늘어나 여가수의 경연장 같은 것이 TV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패티김, 하춘화, 정미조, 김상희, 정훈희 등이다. 이들은 우선 섹스어필 면에서 '야녀'(野女) 김추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중평이다. 영리한 가수 패티김은 서구적인 대형 스타일이란 자신의 신체 조건을 십분 자각, 한국인에겐 너무 고압적인 듯한 그 8등신을 너무 자제하기만 하여 기량 발휘를 맘껏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와 청중과는 차단된 어떤 차가운 한계선을 누구나 느낀다. 그것은 말하자면 전달될 수 없는 에로티시즘. 하춘화는 아직 미개발 대륙의 소녀, 정미조는 그 타고난 좋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불균형, 거기다 언제나 입을 헤벌리고 있는 사람 좋은 인상이 도저히 거기에 섹스를 추출해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고, 김상희는 이미 아주머니가 되었고, 정훈희는 만년 소녀로 남아 있기로 작정하여 소녀도 여자도 아닌 것이 돼버렸다. 여가수 사상 여자 그것으로 청중에게 부딪쳐온 것은 그리하여 김추자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참다운 김추자의 정체는 도시 문명에 시달린 신경쇠약 증세의 도시민들이 김추자를 매개로 하여 원시에의 갈망을 표시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
--'주간여성', 1973. 4. 8. 18~19쪽>>
이후 김추자는 1975년 연말에 터진 연예계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다른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활동이 중단됐다.
1975년 12월 한국 음악계를 얼어붙게 만든 가요계 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 사건에서 그녀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신중현의 사무실에서 한두 번 펴봤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지목당한 대마초에는 죄다 곰팡이가 슬은 등, 그녀의 혐의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요계를 떠나게 된다.
복권된 이후 1978년 6월 20일부터 대한극장에서 열린 재기 리사이틀도 완전 매진을 기록했으나 김추자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1981년 부산 동아대 교수인 박경수씨와 결혼한 이후 김추자는 무대를 떠났다. 2014년 김추자는 은퇴 33년 만에 <It's not too Late> 라는 컴백 음반을 내고 공연을 했지만 다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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